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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집에서 일하니?…우린 ‘천국’에서 일한다”
– 원격 근무 확산에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 워케이션족들
변효선 / 이투데이 기자
#셜리 블룸필드 NTCA-농촌 광대역협회 최고경영자(CEO)는 화창한 봄날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해변에서 꿈만 같은 일주일의 시간을 보냈다. 남편, 반려견 캐시와 셋이서 함께 해변을 따라 산책을 하고, 날씨가 쌀쌀하다 싶으면 대여한 주택 벽난로에서 마시멜로를 구웠다. 하지만 이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휴가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들은 일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워싱턴DC의 혼잡한 업무에서 벗어나고자 휴가지에서 원격으로 일을 하는 ‘워케이션’을 시도했던 한 것이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소개된 ‘워케이션’ 사례다.

워케이션이란 ‘일(Work)’과 ‘휴가(Vacation)’의 합성어로, 여행지에서의 업무를 인정하는 새로운 근무 형태다. 수년 전만 하더라도 생소했던 이 제도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계기로 점차 확산하는 추세다. 감염병 유행으로 원격 근무가 보편화하면서 근로자들이 평일에도 사무실에 메여 있을 필요가 없게 되자, 사무공간의 자율성과 근무 방식의 유연성이 대폭 확대된 것이다.
더 이상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 정장을 차려입고 붐비는 지하철이나 버스에 몸을 싣지 않는다. 짧게는 수십 분에서 길게는 수 시간씩 출퇴근을 위해 허비할 필요도 없어졌다. ‘9 to 6 사무실’ 슬로건은 해묵은 키워드가 됐고, 노트북을 열면 1분 만에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다. 시원한 바닷물에 발을 담근 채 회의에 참여하거나, 고즈넉한 숲속에서 보고서를 작성하는 ‘워케이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해외에서는 이러한 근무형태가 이미 익숙한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하나의 트렌드로 부상했으며,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워케이션 근무를 적극 장려했다. 에스토니아, 조지아, 바베이도스, 바하마 등 유럽과 카리브해 섬나라들은 ‘워케이션 비자’나 ‘디지털 노마드 전용 비자’를 발급하면서 워케이션족 유치에 발 벗고 나섰다. 덕분에 최근 카리브해 섬나라들에는 장기간 가족들과 함께 ‘천국’에서 온라인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전문직과 자영업 직종의 미국인들이 넘쳐난다는 소리도 들린다.

최근 트렌드로 떠오르는 워케이션 (출처: 클립아트코리아)
이러한 움직임은 우리나라에서도 점차 확산하는 추세다. 강원도, 경상남도 김해시, 경남 하동군에서 선제적 워케이션 프로그램이 가동되면서부터다.

경남 하동군은 올해 6~7월 경남형 한 달 살이 ‘오롯이 하동, 워케이션’ 사업을 진행했다. 참가자들에게는 4박 5일 동안 숙박비 전액과 차량, 다양한 문화예술 체험·농어촌 체험·관광지 입장료 등이 지원됐다. 워케이션이라는 프로그램 의도에 맞춰 어디서든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휴대용 와이파이와 테이블·의자도 함께 제공됐다.

‘오롯이 하동, 워케이션’에 참여한 참가자들이 노트북으로 일을 하고 있다. (출처: 하동군청 제공)
하동군 관계자는 “언택트 시대에 맞춰 워케이션 수요자 대상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고 여겨져 해당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반기에도 9월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현재는 코로나19 확산 심화로 잠정 중단 중”이라며 “상황이 좋아지면 즉시 시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경남 김해 역시 올해 상반기 ‘Gimhae live & life & 요즘 김해, 지금 여행’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 워케이션족 잡기에 나섰다. 강원도 역시 재택근무자들을 겨냥해 ‘강원 워케이션’이라는 여행상품을 내놔 큰 인기를 끌었다. 강원 관광재단은 해당 관광상품이 출시 두 달 만에 8000박 넘게 팔려나가는 ‘대박’을 터뜨렸으며, 덕분에 지역 내 주중 숙박률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5% 이상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참가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빅데이터 회사에서 근무하는 이동윤(35·남)씨는 올여름 경남 하동군에서 워케이션 형태로 업무를 봤다. 그는 “사무실에서 근무할 때는 보는 눈도 많고 오가는 사람들도 많아 항상 긴장한 채 자리에서 일할 때가 많았는데, 워케이션을 하면서부터는 필요한 장소에서 원하는 시간에 업무를 처리할 수 있어 일에 대한 집중력이 더욱 향상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동윤(윤(35·남)씨는 올여름 경남 하동군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출처: 이동윤씨 제공)
경남 김해에서 워케이션 프로그램에 참여한 IT 엔지니어 성민지(29)씨는 “색다른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힐링이 됐다”며 “퇴근 후에는 관광지나 맛집 등을 방문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스스로 보상을 줬는데, 이것이 일하는 데 동기부여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또한 김해는 서울보다 밀집도가 낮아 코로나19 감염 걱정도 덜했고, 심적으로도 많이 안정됐다”고 부연했다.

참가자들의 이러한 반응은 비단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는 유연한 근무 방식이 근로자들의 생산성, 행복, 충성도 및 작업 만족도에 긍정적 효과를 보인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워케이션 근무 형태가 업무상 스트레스를 감소시킨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시스템 업체 TIS와 NTT 데이터 경영연구소 등은 올해 3월 합동으로 전문의의 감수를 받아 워케이션과 재택근무를 비교한 실증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은 참가자들을 수도인 도쿄에서의 재택근무조와 아름다운 해변과 온천으로 유명한 와카야마현 시라하마초에서의 워케이션조 두 그룹으로 나눠 이뤄졌다. 그리고 △일본 후생노동성이 지정한 ‘직업성 스트레스 간이 조사표’에 근거한 설문조사 △신체에 장착한 단말기로 모은 심박 수 △수면시간 등의 데이터를 토대로 면밀하게 참가자들의 심신 상태 등을 비교·분석했다.

그 결과, 워케이션 참가자들의 업무상 스트레스는 해당 기간 중 평균 약 56%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두통이나 어깨 결림, 식욕 부진 등의 신체적 문제점 역시 약 50% 저감됐다. 이뿐만이 아니라 이들은 일상 업무에 복귀한 이후 업무 능력의 향상도 인정받았다고 한다. 반면 재택근무자들에게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최근에는 멀리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워케이션족들을 위한 ‘재텔근무’도 일반화하는 분위기다. 호텔 장기 숙박권을 끊어 자신만의 사무실로 사용하거나, 아침에 호텔로 출근해 저녁에 집으로 퇴근하는 또 다른 방식의 워케이션 형태가 나타난 것이다.

전문가들은 워케이션과 같은 새로운 근무 형태가 코로나19 사태 종식 이후에도 ‘뉴노멀’로 자리 잡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