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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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 #작고·원로예술인
잊혀 지지 않을 이름으로 기억되다.
현대무용가 김소라
김분선 / 대구시립무용단 수석단원
김소라 교수님과의 만남
밀레니엄의 시대가 열린 2000년의 봄.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현,대구카톨릭대학교) 무용학과에 입학하게 된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현대무용실 문을 열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나무로 된 마룻바닥. 그곳은 얼마나 정성 들여 만들어졌는지 내가 밟아본 무용실 바닥 중에 최고였다. 무용실 입구에 들어서면 내 키만 한 철 상자 속 시커먼 신식 오디오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벽을 타고 흑백의 무용 사진이 걸려있었다. 다른 두 면은 커다란 거울로 운동장 만한 무용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거울 위로 나란히 나있는 창문은 하늘과 닿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무용실 한구석엔 나무와 철이 적당히 섞인 낡은 바와 언제 사용한 지 모르는 천과 공연소품들이 뽀얀 먼지를 가득 품고 있었다. 손때 묻은 작은북은 누가 봐도 이 공간을 가장 오랜 시간 함께 하고 있었을 사람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그곳은 춤의, 춤에 의한, 춤을 위한 공간이었다. 이 공간의 크기만큼이나 현대무용실이 가진 위엄이 엄청났다. 아직 추운 겨울을 채 벗지 못한 계절이라 난로 하나를 두고 갓 입학한 신입생들은 옹기종기 모여앉아 교수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김소라 교수님이셨다. 위엄이 느껴지는 304호 현대무용실에서 나는 김소라 교수님을 처음 만났다. 낯선 듯 낯설지 않는 푸근함과 단아함 속에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지고 계셨던 김소라 교수님은 웃는 모습이 참 예쁘셨다.
까무잡잡한 피부 톤에 단정하게 말아 올린 머리가 둥근 얼굴형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고 긴 목선과 떨어지는 어깨선은 숄에 가려있어도 그 선을 그대로 뽐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교수님은 스카프와 숄을 자주 하셨던 거 같다. 무용실에서도, 교수님 방에서도 외출을 하실 때도 항상 어깨에 뭔가를 걸치고 계셨던 거 같다.

3층 연구실 복도에 갓 내린 커피향이 새어 나오면 교수님이 연구실에 계시는구나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커피를 즐겨 드셨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셨던 교수님은 제자들에게 좋은 글귀나 편지를 쓰실 만큼 손글씨 쓰는 것을 좋아하셨고, 혼자 하는 시간보다 함께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하셔서 연구실에 찾아가면 어린애처럼 신나하셨다. 제자들과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하셨고, 작고 아기자기한 예쁜 물건이 있으면 제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눠 주시고는 행복해하셨다. 교수님은 다가가기 힘든 엄한 스승이 아니라 소녀처럼 순수하고, 해맑으며 마음이 따뜻했던 분이셨다.

좌) 2001년 8월 4일 전국대학무용제 서울교육문화회관 분장실에서 김소라교수님과 제자 김분선
우) 2004년 2월 졸업식날 대구가톨릭대학교 무용학과 김소라연구실에서 제자김분선
운명적 만남. 김소라와 김분선의 만남은 운명이였어.
김소라 김소라 김소라
내가 태어나고 할아버지께서 이름을 분선으로 지어오셨다.
분선? 요즘 시대에 분선이란 이름을? 분선이란 이름이 맘에 드시지 않았던 어머니는 내 이름을 ‘소라’라고 지으려 하셨댔다.
소라 김소라. 그때 어머니가 승리하셨다면 내 이름도 교수님과 같은 김소라 였을 것이다. 결국 할아버지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런 이야기를 김소라 교수님께 해 드린 적이 있다. “그런 일이 있었니?” 라며 입을 동그랗게 모으시더니 호호호~웃음을 지으시며 아주 재미있어 하셨다.

1957년 10월생으로 닭띠이신 김소라 교수님.
1981년 10월생으로 닭띠인 김분선. 미라클.
내가 태어난 1981년에는 「김소라 현대무용의 밤」 첫 발표회를 서울 공간 소극장에서 3월 27~28일 양일간 공연을 하셨다. 난 그렇게 교수님과 같은 닭띠에 같은 10월생에 같은 이름을 가질 뻔한 일들로 교수님과의 만남이 운명인 듯 느껴졌다.

김소라 현대무용발표회 20년「못마루풍경」과 (故)김소라 추모 무용제 「못마루풍경」
좌) 김소라현대무용발표회20년 「못마루풍경」팸플릿 / 우) (故) 김소라 추모무용제 「못마루풍경」팸플릿
김소라 현대무용발표회 20년(2000)「못마루풍경」은 예술가의 꿈을 가진 한 아이(어린 김소라)가 엄마(모친 최원경)와 함께 못가로 소풍을 나갔다가 못 마루 풍경 그림을 완성시킨다는 이야기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김소라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한 작품이다.
「못마루풍경」은 김소라 현대춤 20년을 맞이하며 제작된 작품으로 2000년도 당시에는 무용과 영상이 함께 작업한 작품이 많이 없던 시대였기에 그 당시 신선한 시도였다고 한다.
1장 소풍 가는 길 /2장 못 마루에 올라 /3장 옛 물의 흔적 /4장 눈물 /
5장 새싹의 트임 /6장 명상 /7장 청둥오리 /8장 그림의 완성
총 8장으로 구성돼있으며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다음 장면을 암시하는 영상(따뜻한 해가 뜨고 평온한 들판 위를 찍은 영상과 잔잔한 물결 위에서 노니는 새와 연못에서 피어나는 하얀 연꽃의 영상)이 나왔다.

“교수님께선 여느 교수님들과는 다르셨어요~ 새로운 시도를 하시는 걸 좋아하셨고 작품을 만드실 땐 항상 의욕적이셨어요. 제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작품에 연결시키는 것을 재미있어하셨어요. 저도 그런 교수님과 작업하는 것이 신났던지 「못마루풍경」때에는 영상을 담기 위해 산으로 들로 호수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촬영을 했던 기억이나요.”

「못마루풍경」을 함께 작업한 영상 이봉형 선생님의 얘기다.

그렇게 교수님은 무용 공연에서 영상 비중을 크게 두어 장면전환의 암시적인 효과를 주었고, 그 당시 무용음악으로 유명했던 르네오브리 음악에 맞춰 안무를 녹여내는 다양함을 추구하셨다.
「못마루풍경」당시 교수님 나이 44세. 요즘은 무용수나이 사십대는 아직 한창때라고 말한다. 하지만 불과 20년 아니 15년 전만 해도 여자 무용수들은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갖게 되면 무대와 작별을 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매년 무대에 오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였다. 한 시대의 예술가로서 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여자로서의 삶보다 예술가로서의 삶을 묵묵히 걸어가셨던 교수님. 내 나이 마흔이 넘어가니 그때의 김소라 교수님의 춤이 얼마나 대단한 춤이었는지 그 삶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13년 전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86년 8월부터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해외 파견 연수자로 선정되어 1987년까지 1년 동안 Martha Graham school of Contemporary Dance와 Ruth Currier Dance studio, Pericance Center Ruigi Jazz center 등에서 1년간 수학하셨다. 연수가 끝날 무렵 김소라 교수님은 1987년 8월 14일 뉴욕 Nicolai Ruis Choreo Space에서 ‘김소라 현대무용 발표회’를 열어 무려 40분간의 솔로공연을 하신 적이 있었다. 그때 「Three pice for one」,「향」,「새」를 무대에 올리셨다. 그 중 「향」작품 영상을 교수님께서 보여 주신 적이 있었다.

그 영상 속 교수님은 하얀 한복과 몇 겹의 하얀 천을 겹쳐 입고 마치 선녀와 같은 모습으로 한국적 춤 선에 김소라만의 움직임을 가미한 춤을 추셨다. 그때 나는 교수님의 춤에 완전 반했었다. 10분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눈을 뗄 수 없었던 매력적인 춤사위였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향」작품을 한번 춰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작은 몸짓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자신감 넘치는 당당함과 총 5번의 의상을 갈아입으며 연출되었던 뉴욕 공연 영상. 춤에 대한 열정으로 머나먼 타국에서의 배움과 그 열정이 영상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던 교수님의 춤을「못마루풍경」에서 나는 다시 한번 만났다. 교수님의 춤은 마치 13년 전을 연상하는 몸짓으로 1시간의 공연을 이끌어가셨고, 마사그라함의 테크닉과 한국의 정서가 가득 담겨있는 춤 선으로 6분 이상의 독무를 추기에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세월 속에 묻어나는 연륜으로 무대를 장악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당시 서울과 대구 무대를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셨기에 20주년 공연은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큰 공연이었다고 한다.

「못마루풍경」에서 김소라 교수님은 20년 동안 쌓아온 예술의 혼을 잔잔하면서도 강한 몸의 언어로 작품을 표현하고 계셨다. 그런 영광스러운 무대에 교수님과 함께 오르다니 그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1학년 병아리에게 듀엣이라는 큰 역할까지 맡기셨다.
아무것도 모르는 1학년에게 맡기기엔 너무 큰 역할이었을 텐데 교수님께선 개의치 않으셨다.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대구에서 무용수 김분선이 듀엣, 리프트를 잘하는 무용수의 타이틀을 갖게 될 거라는 것을 아마도 김소라 교수님께서 제일먼저 알아봐 주신 것일지도…

교수님은 제자 양성에도 욕심이 대단하셨지만 작품에 대한 욕심 또한 대단하셨다. 작품 대부분의 움직임을 직접 만들어내셨을 만큼 움직임에 대한 연구와 작품에 대한 욕심이 강하셨던 분이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움직임 하나하나 손끝, 발끝의 섬세함과 표현 방법까지 모든 것을 직접 지도해주셨다. 연습 시간 내내 1:1 지도를 해주셨으며 “상체를 사용해야지~더 뽑아서 써야지~”라며 상체의 느낌을 살려보라는 얘기를 많이 하셨다. 그땐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때의 교수님 나이 언저리쯤 들어서니 그 말뜻을 조금 알 거 같다.
작품 속에 새로이 시도된 무용과 영상의 조화,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 풍부한 상상력과 아름다운 색채미의 움직임이 가득한 작품「못마루풍경」.

김소라 교수님께서 돌아가시고 1주기 추모공연에서도 「못마루풍경」이란 제목으로 재해석되어 공연됐다. 그래서인지 김소라 교수님의「못마루풍경」은 가장 많이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되었다.
(故)김소라 추모공연에는 어머니인 최원경 선생님의 지도하에 교수님이 아끼던 제자, 교수님을 잊지 못하는 제자들이 모여「못마루풍경」이 재해석되었다. 「못마루풍경」초연에는 딸이 어머니께 받치는 공연이었지만, 1년이 지난 「못마루풍경」은 어머니가 딸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2000년 김소라 현대무용 발표회 20년「못마루풍경」과 2011년 (故)김소라 추모 무용제 「못마루풍경」은 김소라의 예술정신과 움직임은 그대로 살아있었으나 오직 그녀만이 그곳에 있고 없었다.

사랑하는 나의 딸 소라
딸 소라가 공연을 준비할 땐 늘 어머니는 연습실에 찾아오셨다. 1981년 김소라 현대무용 발표회를 시작으로 현대무용수로 안무자로 활약하며 많은 작품을 연출, 안무하셨던 김소라 교수님. 그런 순간마다 어머니이신 최원경 선생님은 늘 함께이셨다. 든든한 버팀목이자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 어머니.
1981 「연」,「저문 날 허공에」,「대화 」
1983 「귀천」,「군상」,「비혼」
1984 「새」,「풍경제」,「거리에서」
1985 「강」,「하늘을 향한 두 개의 창」,「열풍1」,「공 구르기」
1986 「향1」,「Three pice for one」,「새」
1987 「춤추는 명상」,「Fantage」,「열풍2」,「섬」,「어둠의 여행」
1989 「초향」
1990 「적멸의 새」,「글로드 블링에 의한 Movement Fantage」
1992 「향2」,「첼로트리오의 의한 다섯 개의 춤」
1994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내안의 바다」,「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흐르는 약속」
1995 「문」,「적색시대」
1996 「몸굿」,「오보에와 무용수를 위한 독백」,「언제나 갈 수 있는 곳」
1997 「나미츠힐의 낙화」
1998 「일곱빛깔의 념」,「사계」,「신라의 향」
1999 「회생」,「동해」,「비상」
2000 「겨울새」, 「못마루풍경」
2001 「하늘춤」, 「리듬을 타고」
2003 「파장」, 「봄바람 속에 안긴 한반도」
2004 「여정」
2005 「시간의 얼굴」, 「숨」
2006 「가을 춤을 추다」, 「who」, 「시간의 얼굴2」
2007 「dream」, 「물의 꿈」, 「춤의 창, 신라의 빛」
2008 「다리를 건너가다」, 「slowlife」
2009 Project Dance Runway
대구가톨릭대학교 무용학과 현대무용실은 버스정류장에서부터 15분의 오르막길을 올라가고도 3층이라는 계단을 걸어 올라와야지만 무용실을 만날 수 있다. 차가 없으셨던 최원경 선생님께서는 공연 연습이 있는 날에는 꼭 그 먼 길을 걸어 무용실을 찾으셨다.
거친 숨소리에 “에고에고 다리야” 라며 두 손을 무릎 근처에 올려놓으시고는 깊은 탄식 “휴~~~”를 내뱉으시며 그 길이 얼마나 힘드셨을지를 온몸으로 표현하셨다.
좌) 세계춤2000-아시아댄스마켓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실에서 / 우) 제20회 국제현대무용제 「하늘츰」 서울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최원경선생님이 만드신 의상
최원경 선생님께서는 패션 감각이 뛰어나셨다.
패션에 남다른 감각이 있으셨던 최원경 선생님께서는 김소라 교수님의 공연의상을 직접 만드신 적도 있다. 2000년 세계춤 2000-아시아댄스마켓참가때와 2001년 제20회 국제현대무용제에 소라댄스앙상블로「하늘춤」이란 공연을 할 때였다. 최원경 선생님께서는 직접 서문시장에 들르셔서 원단을 떼고 디자인을 하시며 손바느질로 정성스레 의상을 만들어오셨다. 그렇게 만드신 의상은 언제나 하얀색의 의상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교수님 공연에서는 하얀색 의상을 많이 입었던 것 같다.
춤은 나의 운명
대구 무용계의 역사를 쓰신 부모님 밑에서 자란 김소라 교수님이 무용을 하게 된 것은 아마도 운명 이였으리라. 짧고 강한 발자취를 남기고 가셨음 또한 운명 이였으리라. 지금이 일어난 이 일도 운명이었으리라.
(故)김소라 추모 공연 후 10년이 지났다. 아직도 김소라 교수님을 잊지 못하는 제자들이 많다. 그런 제자들이 모여 교수님의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으로 공연이 무산되기도 했지만… 공연을 준비하며 교수님에 대한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런 상황에 한줄기 빛과 같은 일이 생겼다.

이인석 르리앙 대표가 한국 1세대남성무용가 김상규 선생의 예술 활동 자료들이 포함된 유품을 구입 후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에 기증한 활동자료 중에 딸인 김소라의 관련 자료도 발견되었다.『월간대구문화 2020년 10월(419호)』
대구의 1세대 남성무용가 김상규 선생님과 그의 무용파트너이자 아내가 된 최원경 선생님의 딸로 태어난 김소라. 최원경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뒤 유품 속에서 김상규 선생님의 활동자료와 딸 김소라의 팸플릿과 사진이 발견 된 것이다.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 이인석 컬렉션
4장의 사진 중 낯설지 않은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 아기 소라 사진을 보는 순간 처음 교수님 댁에 놀러 갔던 때가 기억이 났다.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청구빌라맨션 아파트 9층. 생각해 보면 그 현관문은 누구를 기다리는지 항상 열려 있었던 것 같다. 교수님 댁에 놀러갈 때면 현관문이 잠겨 있지 않은 걸 알지만 어김없이 벨을 눌렀다. 그러면 두 분은 함박 미소와 함께 반갑게 맞아주셨다. 어머니이신 최원경 선생님께서는 손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시며 맛있게 먹는 제자들 모습을 보고 기뻐하셨다. 그중 윤기 좌르륵 흐르는 잡채는 일품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청구맨션 주위가 훤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방에 앉아 교수님이 내려주시는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그때였던 것 같다. 아기 김소라를 본 것이. 최원경 선생님께서는 앨범을 꺼내시어 교수님의 옛 사진을 보여주셨다. 그때 보았던 그 사진이 바로 하얀색 옷을 입고 있던 아기 김소라였다.
최원경 선생님께선 사진을 아주 조심스레 쓰다듬으시더니
“예쁘제~ 우리소라는 내 뱃속에서부터 춤췄다. 소라가 내 배에 있을 때도 내가 춤을 췄거든. 보통 아가들은 돌때 한복을 입히는데 나는 우리 소라 하얀 옷을 입혔다.”
딸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셨던 최원경 선생님께서 애정 어린 눈빛과 소녀 같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하얀색은 최원경 선생님께 특별한 의미가 있는 듯했다. 아기 소라에게 입혔던 옷도 공연 의상에 하얀색이 많았던 것도.
살아 숨 쉬는 김소라
그녀를 기억하는 제자들
향년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지만 아직까지 그녀를 기억하는 제자들이 많다.
좌) 83학번 정민희제자와 김소라 / 우) 제 7회 국제현대무용제 「호수에 잠긴 달」팸플릿 1988
83학번 정민희 제자는 김소라 교수님께서 83년도에 대구가톨릭대학교(전,효성여자대학교) 무용학과 조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 함께 한 제자라고 한다.
“대학 4학년 교수님께 의지를 많이 했었는데 미국 연수를 떠나셔서 고민과 조언을 편지로 받았어요.”
‘어떤 나타난 결과만 목전의 현상을 바라보지 말고, 그 이면의 보이지 않은 진실과 인간의 삶의 다양한 생태 또 인간 감정과 이성에 의해 빚어지는 갖가지 일들을 그냥 무심히 스쳐 지나지 말고 그 속에 어떤 그 무엇을 발견하는 눈을 키우라는 것이다. 그건 마음의 눈이기도 하겠지. 특히나 무용예술을 해 왔고 좋아하는 사람은 또 창작을 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또 많은 이재를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필요한 것이다. 크고 거창한 것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 같은 것을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일수록 일투족을 행할 때 나의 올바르고 맑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가를 항상 대조하며 가다듬고 닦는 것이 제일 첫 번째 할 일이고 둘째는 그런 마음가짐으로서 가정과 사회에 내가 어떻게 쓰일 수 있는가 꼭 필요한 사람이 될 것이 가는 늘 곰곰이 생각하거라…. (중략)… 수많은 스타일의 춤을 접하면서 더욱 절실한 것은 무용이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긴긴 시간이 필요한 것이고 테크닉적인 완벽함도 제일 기본이기도 하나 그걸 극복한 뒤엔 내면적인 표현과 자기의 춤 언어로서 자기의 소리를 말해야 한다고 느낀단다.’
-『미국연수중 제자의 고민에 애정담긴 편지글 中 김소라 추모공연팸플릿에서 발췌』 –
“대학 4학년 교수님께 의지를 많이 했었어요. 그 당시 미국 연수를 떠나셔서 고민과 조언을 편지로 받았구요. 교수님께서 연수 다녀오시고 함께 한 작품 중에 제7회 국제현대무용제 「호수에 잠긴달」(1988년작)이 기억에 가장 많이 남아요. 30년이 지났지만 그때 입었던 의상을 아직도 가지고 있을 정도니 말이에요. 초록색 쉬폰으로 된 원피스인데 커다란 천을 가슴부터 둘둘 쟁여 매 핀으로 고정해 입었어요. 그 의상은 턴을 돌 때 느낌이 좋았어요. 마치 달을 비추고 있던 잔잔한 호수가 물결을 일렁이는 느낌이랄까? 그 공연을 끝으로 89년에 저는 결혼을 해 서울로 갔어요. 이후 다시 교수님을 다시 만난 때가 2010년 성모병원에서 투병을 시작하신 시점이었어요. 병원에 오실 때 면 밥도 함께 먹고 수다도 떨고 아마 그때가 내 인생에 교수님과 가장 가깝고도 긴 시간이며 잊히지 않은 기억이 될 거예요.”
좌) 제1회전국대학현대무용제전 「회생」서울교육문화회관 분장실에서 1999(제자 김성영 소장 사진)
우) 김소라 현대무묭 안동,구미 초청공연 팸플릿 1999
96학번 김성영 제자는 “수줍음 많고 말수가 적은 편이라 교수님께 잘 표현하는 학생이 아니었는데 교수님께서는 저를 많이 예뻐라하셨어요. 소라댄스앙상블로 활동하며 교수님과 공연도 많이 했어요.
「내 안의 바다」,「일곱 빛깔의 념」,「사계」,「신라의 향」,「회생」등 교수님 공연 중에는「회생」(1999)이란 작품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보통 교수님 공연에서 의상은 타이즈나 쉬폰 같은 천을 많이 사용하셨었는데… 작품「회생」의상은 세련된 디자인에 타이트한 원피스 의상인걸로 기억하거든요. 그러고 보니「회생」작품은 한국무용협회 안동지부에서 초청을 받아 안동종합시민회관대극장과 구미문화예술회관의 초청공연, 대구춤페스티발,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도 꽤 많은 곳에서 공연했었어요.”
‘지는 것, 사라지는 것은 언젠가 피어나고 되돌아오는 순환의 이치. 삶의 뿌리 깊이에서 비록 보이지 않더라도 순간순간 끊임없이 생명의 원기를 끌어올리고 있지 않은가. 회생의 실뿌리에서부터 솟구치는 생명감, 이는 암울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 아닌가. 신록의 아름다움을 통해 또 하나의 시작을 예감한다.’
「회생」작품내용 중…
“교수님께서 「회생」팸플릿에 쓰신 글 이예요. 글 쓰시는 것을 좋아하셨어요. 그땐 이 글을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지금에 와 다시 읽어 보니 교수님의 글은 철학적이었던 거 같아요. 글 속에 인생이 있고 춤이 있고, 춤이 글로 표현되는 느낌도 있고, 글도 마치 예술적으로 표현된 것 같았어요.”
2008작품 「다리를 건너가다」중 사진 이경윤
04학번 강수민 제자는 2008년 작품 「다리를 건너가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제가 교수님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장면이 있었어요. 교수님께서 편찮으시기 전에 함께 오른 마지막 무대라 그런지 이 작품은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다리를 건너다가 문득 발아래 흘러가는 물을 본다. 물에 떠있는 수련도 어느덧 물속 깊은 곳에서 떠오르는 기억의 환영. 세월의 물살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모습들이… ’
『「다리를 건너가다」팸플릿 작품내용 中』
“작품의 제목과 내용에서처럼 교수님은 다시는 돌아오실 수 없는 다리를 건너셨어요. 하지만 교수님께서 27년간의 교단생활을 하시며 학업에 재능이 있는 제자들은 지도자의 길로, 춤 언어에 재능이 있는 제자는 무용수로 길로, 창작 능력이 있는 제자들은 안무자의 길로, 교수님은 다시 돌아오실 수 없는 다리를 건너셨지만 교수님께 가르침을 받았던 많은 제자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교수님을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교수님의 예술 혼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교수님의 말씀대로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어요. 저도 교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낌없이 주셨듯이 그런 지도자가 될 거예요.”
소라댄스앙상블
김소라를 이야기할 땐 소라 댄스 앙상블을 빼놓을 수 없다.
소라댄스앙상블은 김소라 교수님의 예술감독 아래 30여 년간 공연활동을 활발하게 이어 온 무용단이다.
대구지역사회 무용예술의 활성화와 한국 현대무용 발전에 기여하고자 창단된 단체로 1983년 김소라가 대구효성여자대학교(현,대구카톨릭대학교)의 조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 그녀와 춤의 길을 함께 걸었던 대구가톨릭대학교 무용학과 현대무용전공 제자들로 구성되어져있다.

또한 젊은 안무가들의 실험적인 창의성과 새로운 창작 모티브의 발전을 기여하고 소극장 무용 공연문화의 대중화를 확립하고자 함에도 이바지 하였다. 30여 년이 다 되어가는 교단생활을 하며 그녀와 함께 춤의 길을 걸어왔던 제자들 모두가 소라댄스앙상블의 주인인 것이다.
세상에서 잊혀 지지 않을 이름으로 기억되다.
「2009 Project Dance Runway」 소라댄스앙상블이 기획한 마지막 공연.
투병생활을 하시면서도 제자들을 위한 창작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 온 힘을 다하셨다. 좋지 않은 환경에도 제자들의 연습하시는 모습을 끝까지 보셔야 직성이 풀리셨다. 하루빨리 학교에 다시 돌아가 넓디넓은 현대무용실의 위엄이 다시 살아나길 손꼽아 고대하셨던 김소라 교수님. 힘든 투병생활을 이기고 2010년 하반기 다시 교단에 설 부푼 기대감으로 제자에게 새 슈즈를 부탁하셨다.
2010년 8월 1일. 유난히도 쨍하던 여름날.
새 슈즈는 주인을 잃었다.
김소라 교수님은 제자들이 열어 드린 304호 현대무용실 문을 열고 그토록 바라시던 무용실을 찾으셨다. 주인을 기다리는 손때 묻은 낡은 작은북만이 조용히 김소라 교수님을 반겼다. 교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현대무용실에는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어깨가 들썩이는 춤사위가 벌어진다. 그토록 바라시던 제자들과의 만남, 춤의 축제에 교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짓고 계셨으리라. 제자들은 아낌없이 받은 사랑을 눈물로 대신하며 교수님이 거닐던 그 길을 따라 교수님과의 추억을 되짚어갔다.

(1957년 10원 31일~2010년 8월1일) 향년 53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하셨지만 아직까지 김소라 교수님을 기억하는 제자들이 많다. 제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셨기에 세상과 이별을 하셨지만 잊혀 지지 않을 이름으로 기억되는 ‘현대무용가 김소라’로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