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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리뷰 #연극
제38회 대구연극제 – ‘그들’을 이야기하다
전호성 / 플레이스트(PLAYIST) 극작가 겸 연출가
지난 3월 30일부터 4월 4일, 닷새에 걸쳐 제38회 대구연극제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코로나로 인해 한 해 전 제37회 대구연극제가 일정 연기, 적은 수의 참가팀(3팀), 소극장 개최 등의 어려움 속에 개최된 것에 비하면, 올 해 대구연극제는 마치 그 어려움에 힘껏 맞서기라도 하는 듯 약진했다. 전년에 비해 참가팀도 2배나 증가(6팀)했고, 통상적인 일정에 맞춰 진행되었으며 지역의 공공 공연장 두 곳의 객석을 가득 채웠다. 이에 대한 여러 진단과 평가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내년에 있을 제38회 대구연극제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갖기에 충분했다. 비단 연극제에 대한 기대와 희망 뿐만 아니라, 2022년에 대한 기대와 희망 말이다.
역대 대구연극제 포스터 모음
대구연극제는 그 해 대한민국연극제에 참가할 대구 대표팀을 뽑는 경연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기존의 공모/지원사업들처럼 서류에 의한 경쟁과 평가가 아닌, 무대화 된 작품을 견준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렇기에 참가팀들은 그간의 경험과 노하우를 집약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무대를 만들고자 노력한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재원을 비롯하여 몇몇 제약이 아쉽긴 하지만, 결국 세상 모든 것이 그렇지 않은가 한다. 주어진 제약 안에서 최선을 다 하는 것. ‘대구 대표’라는 목적지는 그 어려운 항해를 견디게 해 주는 강력한 촉진제이기도 하니 말이다. 간혹, 대중적 재미 보다는 예술적 경쟁에 너무 치우쳐 ‘그들만의 리그’라는 불평을 듣기도 하지만, 객석의 관객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무대예술인의 본질적 바람을 아는 필자로서는 꼭 그렇게 생각하지만은 않는다.

올 해 대상은 어떤 작품일까. 어떤 팀이 경쟁의 승리자가 되어 대한민국연극제 출전권을 획득할까. 사실, 그것이 대구연극제가 가지는 주요한 의의이기도 하고, 대다수의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 것 또한 그것이기에, 한편으론 그 이야기만 남겨지는 것이 못내 아쉽다. 작년에도 했고, 올해도 했으며, 내년에도 하게 될 연극제. 끊이지 않을 지속 가능한 축제라는 것에서 오는 여러 장점과 이야깃거리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관행적으로 치러지는 행사라는 비판을 면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코로나 시국임에도 맥이 끊어지지 않고 성황리에 열렸다는 이야기나, 어떤 작품이 대상을 타고 또 어떤 수상자가 나왔다는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

대구연극제 시상식 사진
예술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바꿔 말 해, 예술은 필연적으로 그 시대의 그리고 지역의 사회상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2021년과 함께 한 제38회 대구연극제는 무엇을 품고 있을까, 그리고 최근 대구예술계의 어떤 경향에 빚지고 있을까에 대해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되짚어보자니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대구연극제에 임하는 지역 연극계의 분위기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연극제에 참가하여 그간 쌓아 온 역량을 발휘하고 공정한 심사를 통해 대상을 거머쥐어 전국대회의 본선행을 따내겠다는 본질적 바람은 달라지지 않았으나, 그 중 ‘참가작품선정’에의 과정이 말이다. ‘좋은 작품’이 승패를 가른다는 생각에서였을까. 유명한 극작가의 검증받은 작품을 선점하기 위해 고심하고, 좋은 대본을 접한 이들이 으레 “이번 혹은 다음 대구연극제에 이 작품으로 참가할 거야”라는 이야길 하곤 했었다. 다양한 요인이 있겠지만, 어쩌면 이것이 최근 우리 대구 연극계의 두드러지는 새로운 경향이 아닐까? 제38회 대구연극제 참가작 6편 중 5편이 창작극이었다. 5편 모두 대구 창작자들의 창작 대본이었다.

‘신제품’이라는 것은 호기심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호기심에 의한 선택이란 대개 모험이라는 표현으로 수식된다. 선택의 결과가 만족스러울지 그 반대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대구연극제의 의의에 대해 언급했다. 경쟁을 통해 승자가 되고자 하는 모든 참가팀의 바람도 언급했다. 그런데, 창작극(신제품)이라니. 대구연극제의 규정상 창작극에 가산점을 준다는 조항이 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그 어느 때 보다 모험하지 않아야 할 대구연극제에서 창작극(신제품)이라니. 객석을 많이 채우는 것 보다, 수익을 많이 올리는 것 보다,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무대에 창작극(신제품)이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것이야말로 최근 우리 지역 예술계의 두드러진 경향이라 진단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에 덧붙여, ‘좋은 작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시대의 인식도 달라진 건 아닐까.

좌) 교육극단 나무테랑 – 그들의 기억법 / 우) 극단 미르 – RESET(벗어날 수 없는 진실)
좌) 극단 연인무대 – 옥시모론의 시계 / 우) 극단 처용 – 탈날라 하우스
지역 문학인의 원작소설을 각색하여 무대로 옮긴 극단 연인무대의 도전과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특유의 컨셉으로 창작공연을 올린 극단 미르의 일관성, 극단의 이름만큼이나 해당 주제에 충실하고자 했던 교육극단 나무테랑의 작품을 접하며, 이를 (과연 그것이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객관적이라는 잣대를 빌어 좋은 작품과 좋지 않은 작품으로 구분하는 것은 유의미하지 않다는 생각마저 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참가팀 저마다 ‘좋은 작품’을 어떻게 규정짓고 있는가에 대한 새로운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저마다 규정짓는 그 ‘좋은 작품’이란, 어쩌면 직접 창작하고 표현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각각의 예술관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그만큼 우린 다양해진 시선과 개념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쉽게도 다섯 편의 창작극은 대상을 거머쥐지 못했다. 일각에선 작품의 완성도에 다소간의 아쉬움을 탓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초연과 재연을 거듭하지 못한 창작극이기에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지점임을 간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필자는, 그들이 완성도를 다소 포기하면서까지 집중하고자 했던 저마다의 지점을 들여다보고자 노력했다. 지면 관계상 모든 작품들을 다 거론할 수는 없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그 중 두 작품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덧붙여 이는 필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과 더불어 기대에 근거했음을 밝힌다.

예술이란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이들에 의해 다양한 방법으로 정의되어 왔다. 그 중 특히나 필자의 마음에 와 닿은 하나를 소개하고 글을 이어갈까 한다. “예술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극단 에테르의 꿈 – 연극 12만 km 대표이미지
극단 에테르의 꿈 – 연극 12만KM / 박지수 작가
유토피아를 향해 야수에 오르게 되는 멕시코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빌어, 꿈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을 중점으로 다루며, 종내에는 꿈이란 과연 무엇인지, 그 꿈이란 건 과연 이루어지긴 하는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남미의 이국적인 표현이라든지, 그 과정 속에 녹아들어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창단 7년차의 「극단 에테르의 꿈」에서, 첫 대구연극제 참가작에 왜 ‘꿈’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왔는지, 박지수라는 청년 극작가는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왜 희망과는 다소 동떨어진 결말을 그리게 되었는지에 대해 궁금했다. 왜? 라는 의문은 대본을 쓴 박지수라는 한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게 했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필드에 나와 경험을 쌓고, 스스로 극단을 창단하여 7년간 이어 온, 이제 30대 중반에 들어선 청년 창작자 그 자체에 대해 말이다.

극작가 박지수가 기대한 ‘에스타도스 우니도스’는 무엇이었을까? 제3자의 시선에서 그는 꿈에 도달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는 전공을 했고, 동료들과 함께 창단했고, 2021년 대구연극제에 도전할 수 있는 경험과 경력을 갖추었으며, 지역 예술계에서도 차세대로서의 평판도 듣고 있다. 그런 그가, 한편으론 꿈에 다다른 그가, 극 중 마리아의 입을 빌어 우리에게 묻는다. “꿈이란 게 과연 이루어지기는 하는 걸까요.” 「연극 12만km」는 ‘꿈을 쫓는 자의 현실’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를 저 멀리 남미의 아이들을 통해 풀어낸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토록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했지만 별로 달라질 것 없는 현실에 대한 절망. 어쩌면, 꿈을 향해 내달리던 – 야수 위에서 바라보던 풍경과 그 풍경을 함께 보며 고행을 나눴던 동료들 – 그 과정이, 결국 도달해서 발을 딛고 있는 ‘에스타도스 우니도스’보다 아름다웠음을 말하는 것만 같았다.

30대 청년의 현실이란 비단 예술인만이 아닌 현재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모든 청년들에게 동일하다. 막연하리만치 신기루같은 목적지를 향해 갖은 위험과 고난을 겪고 있는 시기. 당장 눈앞의 산을 넘으면 그곳에서 또 다른 산이 등장하는 현실은 우리의 이상적인 목적지를 더더욱 멀게 느껴지게 하고 우리의 용기마저 꺾어버린다. ‘포기하면 편하다’라는 자조에 마음이 흔들리고, 서로를 경계하며 반목하는 중에 누군가는 또 이렇게 강조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 라고. 거기 더 해, 극 중 페냐로 상징되는 동시대 선배들의 조력은 감동적이다.

연극 12만km 공연사진
만듦새의 미흡함이나 정통적 희곡 형식의 배반 등은 한편으로 사소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 시대의 청년 창작자가 지닌 꿈에 대한 내면의 자문자답, 직접 겪고 있는 현실에의 은유, 그리고 동시대인로서의 선배와 동료들에 대한 기대와 희망. 이런 요소들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고,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면 그리고 그들의 삶에 아름다운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이 곧 연극이고 예술이 아닐까. 동시대인으로서 –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예술계 선배로서 – 그대들의 ‘에스타도스 우니도스’에 반드시 도달하길 기도한다. 그곳으로 향하는 과정에 함께 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언젠가, ‘꿈이란 게 이뤄지긴 하는 거군요’라고 말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창작플레이 – 연극 만간 포스터
창작플레이 – 연극 만간 / 김하나 작가
한동안 이슈였던 귀농/귀촌의 문제를 표면적으로 다루고 있다. 섬 원주민과 외지인의 갈등과 그에 따른 인간군상들의 변화를 좋은 배우들의 앙상블로 속도감 있게 풀어냈다. 소재에서 비롯된 다소 전형적일 수 밖에 없는 과정과 결말의 구성, 몇 몇 쉬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등장인물의 과장된 언행 등에 의문이 생겼지만 작품 후반부 극중 인물의 한 마디 대사로 모든 것이 해소되는 ‘기적’을 경험했다. 앞서 언급했던 「연극 12만km」의 작가를 작품 해석에 끌어들였던 것처럼, 「연극 만간」 또한 그 작품과 더불어 작가에 대해 끌어들이면서 해석이 완성되는 느낌이었다. 오래된 관행과 기득권, 그리고 정착에 대한 이야기. 이는 비단 귀농/귀촌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그것은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우리가 맞닥뜨려야 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정착한다는 것. 어떤 지역에서, 구역에서 내 자릴 확보하고 안착한다는 것. 이건 모든 신규 유입자들의 큰 고민이다. 그것이 나이가 어리거나 또는 여성이거나 할 경우 그 난이도는 더 높아진다. 이 작품의 작가인 김하나 극작가는 일찍이 10여년 전부터 굵직굵직한 작품들에 작가로 참여해왔다. 경력을 살펴보니 불과 10여년 사이에 40편이 남는 작품을 써냈다. 이 정도면 거의 쉬지 않고 창작을 해 왔다는 말인데, 문득 궁금해진다. 극작가로서 그녀는 먹고 살 만 한가.

연극 만간 공연사진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창작의 고통’ 이라는 것이 있다. 이 말이 너무도 흔한 나머지 그 고통마저도 그게 와 닿지 않는 느낌이다. 창작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다. 더욱이 창작물이 무대화되기까지 끊임없이 수정과 보완의 작업을 해야 하는 극작가에게는 만만치 않은 작업이거니와 관객을 만나기 전, 2차 창작자인 연출자와 배우, 각 분야의 스태프들 또한 만족시켜야 하는 외로운 작업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관객들의 박수는 받지 못하는 그림자로 존재해야 하는 멤버이다. 최근 들어 극작가에 대한 정서적 대우와 저작권법 관련 이슈 등으로 인해 예전에 비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현실은 녹록치 않다.

최근 김하나 극작가는 「난연」 이라는 이름의 단체를 창단하여 극단 대표로서 제2의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한편으론 축하하고 격려해줘야 할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롯이 ‘극작가 김하나’ 로 살아갈 수는 없었던 현실 때문이겠지,라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다시 작품 이야기로 돌아가서. 작품 속 외지인 두 사람을 제외한 섬 원주민들은 시종일관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제3자의 입장에서 공연을 객관적으로 관람하며, 감정이입 할 대상을 찾고, 공감하는 일련의 과정을 경험하려는 관객에게는 참으로 낯설고 불편한 작품이라는 인상이 컸다. 귀농/귀촌인에 대한 원주민들의 태도가 모두 저렇지는 않을텐데, 지나치게 일반화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외지인들이 느낄 부당함과 불합리함에 대해 피력하려는 의도였다 하더라도 객관적인 관객의 시선으로는 수긍하기 쉽지 않았다. 어쩌면, 객관적이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이미 극이 시작되면서부터 외지인이 느꼈을 그 부당함과 불합리함을, 결코 이해 되지 않는 외지인의 심정을 나누고 싶고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오롯이 필자의 개인적인 감상일 뿐일 수도 있다. 작가와 관련한 이야길 나눠보고 싶었지만, 작가는 부연 설명하는 존재가 아닌 작품으로 할 말을 다 했을 테니 불필요한 일이다.

신입들이 맞닥뜨리는 부당함과 불합리함은 논리와 이성으로 잘잘못을 따져 묻거나 객관적으로 논하며 해석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극 중 이장의 대사처럼 “여기는 원래가 그렇다” 라는 말로 뭉개버리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원래 그런’ 것들을 논리와 이성으로 이해하기 불가능하다는 절망이 그들에게 부당함과 불합리함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작가가 느꼈을, 청년으로서 또 여성으로서 느꼈을 그 절망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 또한 작가에게 “원래 그런 거야” 라는 말로 절망을 더한 적은 없었던가. 이름 모를 어떤 후배와 지망생에게 그랬던 적은 없었던가.

「12만km」와 「만간」의 희곡이 연극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대구연극제’가 가진 무게감과 대한민국연극제에서의 종합적 평가를 고려한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그와는 별개로, 이번 연극제 참가작들이 가지는 우리 지역의 어떤 흐름과 기운, 경향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공유하고자 했다. 지역 창작자들의 약진과 창작물이 내재하고 있는 창작자의 개인적 내면과 경험에 대해 집중했다. 문학 장르에도 이런 경향이 있었다. 거대 담론, 진리에 가까운 명제, 역사적 소명 등을 다룬 대하소설과 같은 문학작품들이 주류를 이루던 언제부턴가 사소설(私小說)이라는 창작자의 개인적 문제나 현상 등을 주제로 쓰는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한편으론 동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 개인의 사적인 담론들이 기존의 주제와 메시지에 견주어 동시대 독자들에게 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리라 생각한다. 이와 궤를 이어 보자면, 현재 우리 지역에 많은 작가들이 활동하며 각자 저마다의 이야기를 풀어 내는 것에 더없는 지지를 보내고 싶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들이 직시하고 있는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동시대를 살고 있는 대중들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좌) 12만km 커튼콜 / 우) 만간 커튼콜
덧붙여, 내년 연극제에도 지역 창작자들의 다양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한다. ‘좋은 작품’이라는 미명하에 관념적이고 천편일률적인 주제, 소재 일변도인 예술계에, 저마다의 실체적 이야기로 대중과 교감하길 고대한다. 또한, 그들이 창작자로 살아갈 수 있는 현실적 바탕 또한 진일보하기를 고대한다. 보다 적극적으로 개인의 사유를 풀어내길 고대한다. 좋은 연출가와 배우, 스태프를 만나 완성도 높은 공연으로 무대화되길 고대한다. 지면 관계상 대구연극제와 2개 작품과 작가에 대해서만 언급했지만, 2021년 대구엔 밤하늘의 별과 같은 많은 창작자들이 지금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듯, 그들이 만들어가는 지역 예술계의 아름다움 또한 많은 이들이 알아봐주길 고대하고 또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