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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리뷰 #영화
슬픈 눈으로 고개 돌리는 청춘 로드무비
정민아 / 영화평론가, 성결대 교수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원작인 『은하철도의 밤』을 쓴 일본 동화작가 미야자와 겐지(1896-1933)의 시집 『봄과 아수라』에 실려있는 시 「무성통곡」은 여러모로 영화 <희수>와 정서적으로 연결된다. 영화 안에서도 주인공 희수가 여행 중 만난 중년여성이 들려주는 「무성통곡」에 눈물을 글썽인다.
모두들 이렇게 지키고 섰는데 / 너 아직 여기서 아파하고 있구나 / 아아 내가 거대한 진심의 힘에서 멀어져 / 순수와 작은 양심을 잃고 / 검푸른 수라도를 걷고 있을 때 / 너는 너에게 주어진 길을 / 홀로 외로이 가려 하느냐 (중략) 머리칼도 한층 검게 윤이 나고 / 뺨은 알처럼 사과 같구나 / 부디 어여쁜 그 뺨으로 / 다시 하늘에서 태어나다오 (중략) 아아 그렇게 슬픈 눈으로 / 고개를 돌리지 말아다오
겐지는 스무 대에 사망한 여동생의 죽음과 가난한 농민의 삶을 주요 시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여기서 영화 속 희수가 「무성통곡」에 눈물을 훔치는 이유에 대한 단서가 잡히는 것 같다. 노동과 죽음, 그리고 사랑. 이 영화는 여성청년 노동자의 삶과 사랑,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1990년대생 젊은 감독 감정원의 장편 데뷔작 <희수>는 이해하기 쉬운 영화가 아니다. 난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중퇴 후 염색 공단에서 일해 온 희수(공민정 역)는 홀로 여행을 떠난다.”는 단순한 설정에서 영화가 시작한다. 이후 서사는 우리가 흔히 보아온 기승전결의 진행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같은 공간과 다른 시간, 두 연인의 혼자 하는 여행의 의미
희수는 대구에서 강원도로 여행을 하고 있다. 영화는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과 겪는 짧은 에피소드들로 채워진다. 이 에피소드들은 서로 관련이 거의 없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식당 사장, 버스정류장 모녀, 민박집 할머니, 중년여성 여행자, 자전거를 태워준 소년, 거리의 헤비메탈 밴드. 영화 속 마주침의 대상은 누구나 여행을 떠나다 만날만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영화에는 희수의 여행 말고 또 다른 플롯이 끼어든다. 희수의 공장 생활, 그리고 희수의 남자친구 학선(강길우 역)의 여행, 이 두 개의 플롯이 희수의 여행 플롯과 어떤 규칙 없이 교차한다. 어떤 플롯이 플래시백이고, 어떤 플롯이 현재거나 혹은 상상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데, 장면 전환은 표시를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서사 중반부에 삽입된 「무성통곡」과 갑작스러운 희수의 눈물은 알 수 없이 전개되던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있고,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밝혀주는 기능을 한다.
이건 아마도 스포일러일 것이다. 필자가 처음 이 영화를 볼 때 많은 것이 희미했다. 그러나 앉은 자리에서 다시 한번 영화를 관람하자 많은 것들이 분명해지면서 희수의 태도가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앞으로 펼쳐질 스포일러로 인해 영화를 보는 재미가 반감될 것이기보다는 상징과 은유와 생략과 점프로 가득한 이 영화가 표현하는 영화언어의 묘미로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첫 장면은 청년여성 노동자 희수가 연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공단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관객은 작업복 입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다음 장면에서는 꽃과 촛불로 장식된 그녀를 본뜬 인형이 밝게 정면을 응시하는 것을 본다. 생일일까? 기일일까? 영화제목이 뜬 후, 멍한 얼굴로 공장을 빠져나와 힘없이 귀가하는 남자친구 학선의 뒷모습이 보인다. 희수의 뒷모습에서 학선의 뒷모습으로 이어지는 영화 오프닝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영화 「희수」中 (출처: 영화사 정원)
원래는 어렵게 휴가를 낸 두 사람이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그러나 학선이 다른 직장으로 옮기게 되면서 훗날의 해외여행을 기약하고, 희수는 홀로 여행길에 오른다. 영화 속 에피소드는 시간 순을 거스른다. 희수가 일하는 대구 공장과 그녀가 여행 중인 강원도 묵호는 불규칙하게 교차한다. 거기에 또 학선의 여정이 인서트된다.
영화 「희수」中 (출처: 영화사 정원)
학선은 희수가 가 보았던 공간을 뒤따른다. 귤과 동백꽃, 그리고 여자아이는 두 사람을 정서적으로 이어주는 매개다. 시간차가 있는 두 사람의 여행에서 귤은 같은 민박집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며, 학선은 동백꽃을 가만히 바라보았고, 희수는 동백꽃을 땅에 묻어주었다. 버스정류장에서 엄마 손을 잡은 여자아이를 마주치는 것은 같은 공간에 두 사람이 있음을 전한다.
영화 「희수」中 (출처: 영화사 정원)
공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관객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희수가 뒤로 돌아서 들어간 순간 기계는 멈추고 경고 벨이 작동했고, 다음 쇼트에서는 희수가 여행지에서 난로를 쬐고 있다가 불이 꺼져버리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서사가 전개되면서 희미하게나마 죽음의 냄새가 유령처럼 공간들을 떠돌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무게감과 크기가 압도적인 공장의 기계가 주는 압박감,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하지만 외롭게 느껴지는 여행길의 스산한 무드는 희수의 운명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슬프게도 짐작게 한다. 그러면 학선의 여행은 그리운 사람을 떠나보내기 위한 애도 제의일 것이다.
영화 「희수」中 (출처: 영화사 정원)
대사가 많이 없이 느리게 진행되는 데다 현재와 과거가 어떠한 시각적 장치 없이 이어 붙여져, 관객은 스크린 속 희수와 학선의 공간에 참여하여 계속해서 두 사람이 놓인 공간과 처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등장인물의 행동이 있는 곳에 관객의 생각이 머무르는 전개 방식은 적극적 관객에게 지적 흥미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주류적 서사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쉽게 꿰어맞춰지지 않은 장면들의 연속이 낯설고 힘겹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면 이런 방식의 영화를 만드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때다.
로컬 시네마의 성취와 대안적 실험
감정원 감독은 대구에서 단편영화 연출과 독립영화계 활동가로 활약하고 있다. <희수>는 지난 4월에 개최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부문에 올라 처음 상영되었다. 전주영화제는 심사평에서 “노동자로서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한 여성의 파리한 흔적을 쫓는 이 영화는 극단적으로 간결한 표현을 통해 지나칠 수 없는 성취를 이뤘다”라고 평가했다. 영화는 대구시로부터 제작비 지원을 받고, 전주시에서 후반작업 지원을 받았으며, 강원영상위원회의 협력을 받았다. 대구독립영화협회의 일원들이 스태프로 참여하고, 독립영화계에서는 유명배우들인 이들이 주조연으로 등장한 영화의 엔딩크레딧에 지역 각 기관의 로고가 뜨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작은 예산과 소박한 규모로 이 정도의 도전적이고 성찰적인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도전과 실험이 점차 사라지고 상업성이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제작되는 한국영화계 현실에서 주제적, 스타일적 대안은 독립영화에서 찾게 마련이다. 하지만 독립영화계 또한 대중성을 중심에 놓고 사고할 수밖에 없는 미디어 환경에서 진정한 대안과 도전정신은 지역의 로컬 시네마에서 자주 목격한다.

그중에서도 지난 몇 년간 대구의 독립영화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단편영화와 장편영화를 막론하고, 부산영화제와 전주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르고, 단편영화제와 독립영화제에서 수상하고 있는 대구영화에는 어떤 경향성이 있다. 오래전 뉴시네마의 젊은 기수들은 할리우드 고전영화를 보며, 기승전결로 이루어진 주류적 스토리텔링과 쉽게 스토리를 따라가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편집이라는 기본 원리는 관객을 수동적으로 만든다고 하여 거세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대안적 혹은 대항적 스타일을 내세운 뉴시네마 혁명은 파편적이고 뷸균질적인 스토리텔링, 자유분방하게 점프와 생략으로 이어붙인 편집, 표현의 자유를 누린 과감한 주제의식으로 시네마를 새롭게 정의하게 했다. 그러나 자유경쟁과 약육강식이라는 치열한 뉴미디어 환경에서 위와 같은 대안적 스타일이란 것이 과거 젊은 영화인들의 치기처럼 여겨지는 지금, 진정한 인디 정신과 대안적 실험영화 실천은 지역 독립영화인에게서 발견되고 있다. 그 선두에 대구영화가 서 있다.

어렵고 힘겨운 일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도 연주하는 ‘사형집행단’이라는 지역 인디밴드의 가슴을 끓게 하는 헤비메탈 샤우팅처럼 대구영화의 최전선에 선 활약은 한국영화계의 지형을 조금씩 흔들 것이다. 이것이 <희수>의 활약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