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거슬러 갈 것 없이, 객관적으로 돌아볼 만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해보자. 기억에 의지하는 일이라 왜곡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기억이 뜻하는 바는 분명하다. 아모르 파티 amor fati.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고난과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삶을 긍정하라.
교과서 모퉁이 빈 공간에 그림이 가득했다. 바다를 가르는 배와 자동차, 말 그림 같은 거였다. 다시 말해 수업시간에 딴 생각 했다는 거다. 숫기 없던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았다. 친구들 사이에도 있는 듯 없는 듯 잘 드러나지 않았다. 붓글씨로 우리 집 문패를 만들어 붙였는데, 큰아버지가 와서 보시곤 감탄했다. 사실, 붓으로 쓴 게 아니라 도안한 거였다. 저녁 먹고 있는 가족을 그린 그림을 젊은 나의 어머니는 신기해했다. 장기자랑 시간, 칠판에 분필로 쓱쓱 그림을 그리자 와아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별로 잘난 것 없던 나에게 그런 칭찬과 관심은 사는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작은 재능은 자부심이 되어갔다. 원래 잘한다, 잘한다 하면 더 오버하게 되는 법이다. 김동인의 「무지개」라는 단편소설을 각색한 만화가 내 최초의 책이었다. 물론 손으로 직접 묶은 세상에 한 권 뿐인 책이었다.
그런 기억 중엔 불길한 복선도 있었다. 급하게 환경미화를 해야 할 상황이 닥치자 담임 선생님은 수업하다 말고 나에게 얼른 집에 가서 붓글씨 하나만 써오라고 했다. 친구들은 모두 교실에 남아있고, 나는 홀로 텅 빈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다. 낯선 일탈이었다. 모두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데 나만 혼자 떨어져 나온 묘한 기분. 그건 몹시 외롭고 불안한 해방감이었다. 그 쓸쓸한 해방감이 작가의 길이라는 것을 그때 눈치 챘어야 했다. 그날 급히 써간 붓글씨는 ‘웅변은 은, 침묵은 금’이었다.
그 후 참을 수 없는 본능으로 노을을 그리고(중학교), 점심시간에 재미로 쓱쓱 친구들의 미술숙제도 대신해 주면서(고등학교) 나는 미술을 멀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결국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왔다. 대입전공 선택. 앞으로 너는 평생 무엇을 하며 살래?
참고 참았던 그림에 대한 갈증이 들불처럼 일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어서, 어릴 적 나에게 쏟아진 칭찬 때문에 나는 운명처럼 고단한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2000년대 초반 즈음에는 디지털 시대가 활짝 열렸다.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이미지와 영상의 편집이 자유로워지고, 인터넷은 가상공간이라는 바다를 펼쳐 보였다. 2003년부터 2005년 사이에는 디지털 기술로 옛 그림을 움직이게 하거나, 그동안 내가 만든 조각 작품들이 컴퓨터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축제를 벌이는 동영상작업에 몰두했다. 그렇게 나름대로 디지털 시대의 시각예술을 구현할 방법론에 대해 고민했다. 그런 고민들을 묶은 책이 『작업일지, 우리시대의 미학-사이보그, 동양, 디지털』(단행본 출판, 천부도원, 2006)이었다. 동시대 과학기술과 문화적 정체성이 만나는 지점. 「사이버 호접몽」, 「디지털 영상과 동양미학」, 「오행과 디지털 영상」등의 주제로 작업을 하는 동안 밀레니엄 10년이 지나갔다.
이제 최근의 몇몇 전시와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밝히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해야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yeOfaNJZ9E4
2017 같은 해, 대구예술발전소 레지던시에 참가했다. 결과물은 「The Living Room of RATAVA」. 이야기를 쓰고(리우), 영상설치작품을 제작(리우)하고, 설치작품을 무대 삼아 댄스팀(아트지)과 연극배우(박세기)가 다원예술공연을 펼쳤다. 우주선에 갇혀 어딘가로 향하는 인공지능(A.I)에 대한 이야기다.
몽유산해도는 고대신화집 『산해경山海經』에 등장하는 열 두 캐릭터를 매달 월간 대구문화에 소개하고, 조각작품으로 제작한 후, 디지털 공간에서(백귀야행처럼) 한바탕 축제를 벌이는 영상으로 마무리 한 작업이다. 몽유도원도를 배경으로 한 산해경의 요괴행진. 일 년 간의 이 프로젝트는 그동안 계획해온 작업방식의 전형을 보여준 것 같아 흡족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_12v2ckQDs&feature=youtu.be 바로가기
https://www.youtube.com/watch?v=jWD0wYS2XQw 바로가기
앞으로도 이야기를 쓰고, 영상설치작업을 하는 프로젝트를 이어갈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게 그나마 내가 잘하는 일이고, 또 과정이 즐겁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관련 이야기와 미술작업이 만나는 「미래신화」가 내 작업주제다. 그것을 나는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을 뜻하는 「사이파이(Sci Fi) 이야기」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