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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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 #작고·원로 예술인
노래와 이야기 할아버지1)
– 어진길 김성도 이야기 –
정영웅 / 동화작가
하나, 「어린 음악대」2)
‘노래와 이야기 할아버지’로 불린 김성도는 1914년 경북 경산에서 출생하여 계성중학교를 거쳐 연희 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동요작곡가로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어린 음악대」는 1934년 연희전문학교 학생일 때 작곡했다.
‘교회에서 풍금을 만지다가 우연히 이 곡조를 얻어서’ 가사를 붙였다고 한다.
따따따 따따따 나팔손으로/ 따따따 따따따 나팔 붑니다.
우리들은 어린 음악대/ 동네 안에 제일가지요.

쿵작작 쿵작작 주먹손으로/ 쿵작작 쿵작작 북을 칩니다.
구경꾼은 모여드는데/ 어른들은 하나 없지요

이렇게 탄생한 「어린 음악대」는 ‘원유각씨가 동화를 방송했는데 그 배경 음악’으로, 또 ‘프린트판 악곡집에 실리면서’ 전국에 퍼진다. ‘어떻게 하면 좋은 곡을 지어서 남에게 부를 수 있게 할까’ 하는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구김살 하나 없이 건강하게 자라는 어린이 모습은 언제 누가 보아도 반갑고 고맙다. 식민 지배에 시달리던 절박한 그때나 내 나라에서 내로라하고 사는 오늘날이나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초등학교 국정 음악 교과서에서 이 동요가 빠진 적이 없다.
학교를 졸업한 그는 황해도 신천과 함흥에서 교직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동요곡을 생산한다.’ 윤태웅 동요 「아기별」과 「봄」, 김영일 동요 「권투선수 오뚝이」와 「산골 동네」, 강소천 동요 「호박꽃 초롱」과 「보슬비의 속삭임」 등이 이때 작곡한 곡들이다.
「아기별」과 「보슬비의 속삭임」도 「어린 음악대」와 함께 국정 교과서에 실렸는데 「아기별」은 ‘아무 해명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작사한 윤태웅이 6,25전쟁 중에 행방불명된 때문이리라. 「아기별」은 이렇게 교과서에서 사라졌지만 어린이들의 입에 살아남는다.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고무줄을 넘으면서 부르던, ‘서산 너머 해님이 숨바꼭질할 때면 수풀 속의 새집에는 촛불 하나 켜놨죠’ 하는 노래가 바로 「아기별」이다.
둘, 대구아동문학회 창립과 안데르센 동화 번역
해방이 되자 김성도는 월남한다. 1955년 모교인 계성학교 교사로 부임한다. 그의 활발한 문단활동이 이때부터 시작된다. 1956년 계성어린이글짓기대회3)를 김진태, 윤혜승, 윤운강 등 문인들인 동료교사들과 같이 주관하고 1957년에는 이응창 등과 같이 대구아동문학회4)를 창립한다.
계성글짓기 대회가 백일장이 되어 해를 거듭하게 되자 경북지방은 전국에서 글짓기 교육과 아동문학 동호인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이 된다. 도내 곳곳에 동호인 모임이 생기고 그 열정어린 자리에 「어린 음악대」 작곡자인 그가 초대되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헤어질 때 「어린 음악대」를 합창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이 지역 아동문학 문단이 달라진다. 60년대를 기점으로 역량 있는 아동문학가들이 대거 배출된다. 초등학교 문예지도 교사이기도 한 그들은 사립학교, 잡지사, 신문사, 출판사 등 여러 방면으로 진출하여 한국아동문학의 발전을 주도한다. 대구 경북이 ‘한국아동문학의 메카’ 혹은 ‘한국아동문학의 요람’이라고 불린 것도 이때부터였다.

1958년에서 1961년에 그는 안데르센동화전집과 그림동화전집을 번역 출간한다. 그의 안데르센 예찬은 남달랐다고 한다. 생전에 그를 아는 이들은 하나같이 ‘동화의 원형은 안데르센에서 찾아야 한다. 기법과 환상은 안데르센 동화에서, 내용은 우리 것으로 해야 한다.’는 그의 지론을 들었다고 한다. 짐작컨대 안데르센 동화 출판은 일반 독자뿐만 아니라 작가나 작가지망생도 염두에 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나라 동화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 이때(60년대)부터였다. 의도를 드러낸 이야기에서 본격적인 동화로 변모한다. 그가 말하는 ‘동화의 원형’에 가까워진 것이다. 1965년에 발표된 김요섭의 「날아다니는 코끼리」나 1969년에 발표된 권정생의 「강아지 똥」같은 화제작도 안데르센 동화가 소개되지 않았다면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셋, 「생각하는 시계」와 「색동」
김성도는 1957년도부터 주로 동화를 쓰기 시작한다. 그의 동요를 본 윤석중이 “푸근한 맛이 없다”는 말을 듣고 동화로 바꾸었다는 말이 있고, 일제 말부터 멈추었던 집필활동을 재개한 것은 ‘선배가 써야 한다.’는 윤혜승의 권유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그는 여러 유형의 작품을 발표했는데 젊은 대구아동문학회 회원들이 모여 윤독하며 독후감상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특히 화제가 된 작품은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생각하는 시계」였다. 어머니의 부재를 극복하는 이야기인데 화자가 시계였다. 시계가 생각하고, 말하고, 해설까지 하다니! 당시로 봐서는 놀라운 발상이었고 그런 만큼 우리나라 동화의 지평을 넓힌 작품이었다.
그는 안데르센 동화 못지않게 우리 전래 동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빨간 병, 파란 병」, 「주둥이 닷발 꽁지 닷발」, 「꾀 많은 종」 등 전래동화를 재화했는가 하면, 전래 동화를 닮은 창작동화도 썼다.

「색동」1964, 이수남 소장
그의 대표작 중에 하나인 「색동」이 그런 동화인데 제일 맏누나가 다섯이나 되는 동생들의 뜻을 빠뜨리지 않고 모아 막냇동생이 돌날 입을 돌빔인 고운 색동옷을 짓는다는 이야기다. 마치 색동옷의 유래인 듯 에필로그까지 달았지만 이것 역시 그가 꾸민 것이다.

이야기하는 방식이나 수법도 전래동화에서 빌려 왔는데 이야기의 서두에 자주 나오는 해설하는 부분, 예를 든다면, ‘전쟁이란 어느 때나 좋지 않은 일입니다.’(팔씨름), ‘새로 지은 이야기보다는 옛날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지요.’(꾀 많은 종), ‘옛날도 아주 오랜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빨간 병 파란 병) 하는 것들을 들 수 있다. 이는 이야기하는 효과적인 방식으로, 청자의 주의를 모으면서 이야기를 들을 채비를 하게 한다.

이야기 틈틈이 발견되는 유머와 풍자도 재미를 더한다. 벽을 향해 ‘인도야, 나오너라. 국광아, 나오너라.’ 하고 노래조로 외치는 소리를 듣고 웃음을 금치 못할 것이며, 「팔씨름」에 나오는 ‘동쪽나라에서는 소가 귀해지고 서쪽에서는 그 많던 돼지가 귀해졌습니다.’하는 대목에서는 상대방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 무리인 줄 알면서도 국력을 쏟아 붓는 나라 사이의 군비경쟁을 떠올리게 된다.

넷, 「팔씨름」 과 「대포와 꽃씨」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대포와 꽃씨」와 「팔씨름」은 우리나라 분단 현실을 다룬 작품이다. 우리나라 건국을 도와주기 위해 마련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아무 성과 없이 결렬되는 것을 보고 지었다는 「팔씨름」은 「대포와 꽃씨」와는 다른 시각에서 분단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 짝을 지어 같이 읽는 게 좋겠다.
두 이야기는 다 같이 대립과 갈등을 전제로 한다. 「팔씨름」에선 동쪽 나라와 서쪽나라가, 「대포와 꽃씨」에선 남쪽나라와 북쪽나라가 적대하고 있다. ‘이웃 작은 나라들도 어느 한쪽을 편들어야 했습니다.’하는 걸로 봐서 「팔씨름」은 진영 간의 겨룸인가 하면 「대포와 꽃씨」는 당사자 간의 문제이다. 따라서 현실을 타개하려는 노력이 「팔씨름」에서는 냉전의 논리라면 「대포와 꽃씨」에서는 화해의 논리다.
「팔씨름」에선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팔씨름을 하기로 한다. 선수를 뽑고 이기기 위해서 벌이는 경쟁이 치열하다. 선수들의 완력을 기르기 위해 고기를 먹이다 보니 동쪽에서는 소가 귀해지고 서쪽에서는 그 많던 돼지가 귀해질 정도다. 그렇지만 팔씨름은 성사되지 않는다. 오른팔로 해야 한다, 왼팔로 해야 한다 하면서 자기편이 유리한 쪽만 고집하다가 시도조차 못한다. 적대의 구실이 된 왕자와 공주를 결혼시키는 것도 생각했다지만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유욕과 지배욕을 버리지 않고, 또 불신이 해소되지 않는 한, 다른 핑계거리를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포와 꽃씨」의 해결방법은 「팔씨름」과 다르다. 적대의 구실이 되고, 이웃에서 은근히 부추기는 ‘키’ 같은 건 아예 거론하지 않는다. 포탄 대신 꽃씨와 꽃 뿌리를 주고받는다. 상대방에게 없는 보배로운 것을 주고받으면서 신뢰를 회복하고 대립과 분쟁을 해소하는 것이다.
동서 대립과 갈등, 즉 1차 냉전시대가 소련의 해체로 30여년 전에 끝났다지만 우리에겐 그렇지 않다. 아직 분단 상태에 있으며 나라안팎 어디서나 소모적인 진영의 논리가 판치고 있다. 당사자가 되어 화해하려는 시도가 더러 있었지만 그때마다 진영의 논리에 휘둘려서 막히고 만다. 3/4세기가 지나가는데 얼마나 세월이 더 흘러야 매듭이 풀릴 것인가! 어떻든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날카로운 눈은 아직도 살아 있다.

1981년 계성문학회원들과 수성못에서(안경 쓴 이가 김성도)
김성도는 1964년 『색동』에서 1982년 『피리와 달』까지 10권의 동화집을 발간한다. 1971년 동화 「생각하는 시계」로 소천문학상을, 1980년에는 동화 「대포와 꽃씨」로 대한민국아동문학상을, 또 같은 해 동요작곡가의 공적을 인정받아 한국아동음악상을 받는다. 큰 키에 인자한 인상의 그는 1965년 문협 경북지부장과 예총 경북지부장을 역임하고 1979에는 현대아동문학가협회장이 된다. 그리고 1986년 동시인이자 동요작곡가이며, 번역 문학가이자 동화작가로서의 바쁜 일생을 마친다. 그의 노래비가 모교인 경산 하양초등학교 교정에 있다.
  • 1)신현득이 『계성문학 5집』, 「김성도 특집」에 쓴 글의 제호다. 그대로 빌려 쓴다
  • 2)1986년 ‘도서출판 대일’에서 발간한 『소년과 소녀』 6호에서 8호까지 3회 분재한 자서전적 이야기 「김성도」에서 부분 발췌 요약한 것이다.
  • 3)1975년까지 경상북도 5개 지역에 분산 개최되었다. 1971년의 경우 50여 개교 1000여 명의 어린이가 참가했다고 한다
  • 4)2020년 현재 작고하거나 회를 거쳐간 회원이 65명, 현회원이 70명이나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