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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리뷰 #전시
회화의 가능성,
<팀 아이텔_무제(2001-2020)>전
방선현 / 영남대학교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미술가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1967-)은 덴마크 코펜하겐 시청 광장에 그린란드 빙하에서 가져온 얼음조각들을 시계의 형태로 설치한 「얼음 시계(Ice Watch)」(2014)를 선보였다. 얼음조각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작아지다 마침내 사라지고 마는데, 엘리아슨은 이를 통해 기후변화의 심각성과 ‘시간’의 흐름을 시각화했다. 또 다른 미술가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1943-)은 빛을 활용해 관람자가 ‘공간’을 새롭게 감각하는 설치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처럼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영역에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탐구는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으나, 그간 추상 회화가 아닌 구상 회화에서 이를 다룬 작품들은 만나보기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로 대구미술관의 <팀 아이텔_무제(2001~2020)>전에서 접한‘시간’과 ‘공간’에 관한 아이텔의 회화는 더욱 새롭고 풍성하게 느껴졌다.
<팀 아이텔_무제>는 회화의 가능성을 연구한 아이텔의 작품을 통해 오늘날 회화가 갖는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마련되었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아이텔의 20년간의 작품과 신작이 한자리에서 소개되었으며, 그의 작업에 영향을 끼친 서적과 작품의 모티프가 된 사진도 함께 살펴볼 수 있었다. 전시는 총 11개의 주제를 지닌 섹션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한 화면에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고 공간 구축을 시도한 그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좌) 선큰가든에 마련된 아카이브 | 우) 팀 아이텔이 촬영한 사진들
아이텔은 그가 촬영한 사진 중 관심이 가는 소재를 찾아 불필요한 요소들을 지워나가며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 따라서 화면의 배경은 단조롭고, 인물들은 홀로 있어 적막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띄는 것이 특징이다. 아이텔의 회화에 나타난 인물들은 소통 없이 제각기 다른 일에 몰두하는 현대인의 모습으로, 코로나19로 인해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좌) 팀 아이텔, 녹화 Recording, 2008. | 우) 팀 아이텔 전시 도록에 수록된 사진으로 「녹화」의 모티프가 된 사진임을 알 수 있다
커다란 격자무늬 유리창이 있는 3전시실은 ‘격자와 지평’이라는 주제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술관이 배경인 그림들을 보며 아이텔이 대구미술관 3전시실의 창문 격자에 아이디어를 얻어 이를 화면에 옮긴 것이 아닐까? 라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아이텔은 수직과 수평으로 공간을 형성하는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에 영향을 받아 창의 격자로 공간을 만든 「빨강과 파랑(Red and Blue)」(2002)을 선보였다. 아이텔의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바로 이 순간을 촬영해 그림을 그리는 아이텔의 작업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격자와 지평’은 2001년부터 2년간 제작된 그림들로 그의 공간 탐구에 있어 출발점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팀 아이텔, 빨강과 파랑 Red and Blue, 2002. 사진 출처: Artsy 홈페이지
‘하늘과 땅’은 자연을 소재로 한 그림으로 구성된 섹션으로 불필요한 요소들이 제거된 단순한 화면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회색 구름(Grey Cloud)」(2004)에서 한치의 굴곡도 없이 곧게 뻗은 지평선과 단단한 직사각형 모양의 집은 차가운 현대 건축을 연상케 한다. 또한 어둠이 내려앉은 밤하늘과 거대한 회색 구름의 조합은 이질적이고 묘한 감정이 들었다.
팀 아이텔, 회색 구름 Grey Cloud, 2004. 사진 출처: Pinterest 홈페이지

팀 아이텔, 이중 풍경 Double Landscape, 2017. 사진 출처: Artsy 홈페이지
‘자르고 이음’은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해 공간을 재구성하던 방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1-2개의 수직선으로 화면 분할을 시도한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컷(Cut)」(2016)과「이중 풍경(Double Landscape)」(2017)의 수직선은 화면을 둘로 나누며 시간에 따른 인물의 이동을 표현하는 장치로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 공간 재구성과 시간성을 한 화면에 도입해 회화의 가능성을 한 차원 더 넓힌 셈이다. ‘통로와 오프닝’에서 소개되는 작품에는 한 화면에 여러 개의 수직선이 존재하는데, 이는 공간과 다른 공간의 통로 역할을 한다. 앞의 섹션인‘자르고 이음’에서 수직선은 화면을 두세 개로 나누고 있다면, ‘통로와 오프닝’의 수직선은 화면 분할을 넘어 공간 간의 연결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보트(Boat)」(2004)는 강이 아닌 실내에서 배를 타고 노를 저어 전진하는 남녀의 뒷모습을 묘사하는데, 이들이 향하는 정면은 벽으로 막혀있다. 그러나 화면 왼쪽의 작은 통로는 돌파구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벽 너머로 펼쳐질 새로운 공간을 상상하게끔 한다. 「오프닝(Opening)」(2006)에도 통로를 살펴볼 수 있는데, 모여 있는 아이들 뒤편의 작은 통로는 새로운 공간이 열릴 것(opening)을 암시한다.
좌) 팀 아이텔, 보트 Boat, 2004. 사진 출처: Pinterest 홈페이지 | 우) 팀 아이텔, 오프닝 Opening, 2006. 사진 출처: 대구미술관 홈페이지
‘다른 삶’과 ‘변두리’에서는 현대인에 대한 아이텔의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모두 일상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로 인물이 위치한 공간은 모호하게 표현되고 있다. ‘데이 포 나잇’은 화면 전체의 색을 어둡게 칠해 밤의 풍경을 연출하는데, 전시장의 조명도 어두워 더욱 집중해서 그림을 바라보게 되었다. 밝은 공간을 어둡게 연출하는 촬영 기법을 일컫는 ‘데이 포 나잇’처럼 아이텔은 노숙자와 길거리의 쓰레기 더미와 같은 사회의 단면을 포착해 짙은 색조로 표현한다. 「소유(Possession)」(2006)는 커다란 짐수레를 힘겹게 끄는 노숙자를 화면의 중앙에 배치한 그림으로, 노숙자의 짐이 과연 그의 가치를 증명해 줄 소유물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생각이 스쳤다.
팀 아이텔, 소유 Possession, 2006.
‘역사적 유물’은 가상의 공간에 그가 촬영한 유물의 사진을 그려 넣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만든다. 현실이 아닌 가상공간 연출은 ‘허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점은 각각의 작품들이 모두 연결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앉아있는 형상(Seated Figure)」(2018)의 화면 오른쪽에 일부 노출된 그림은 「산(Mountain)」으로 이어진다. 또한 「푸른 벽(줄무늬)(Blue Walls)(Stripes)」에서 벽 앞에 서 있는 남성 뒤의 작은 통로는 전시장의 벽을 전면에 그린 「벽(Wall)」(2018)으로 이어진다. 연결성을 갖는 각각의 그림들을 전시장에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그림에 나타난 공간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좌) 팀 아이텔, 앉아있는 형상 Seated Figure, 2018. 사진 출처 : 대구미술관 | 우) 팀 아이텔, 산 Mountain, 2018. 사진 출처: Pinterest 홈페이지
좌) 팀 아이텔, 푸른 벽(줄무늬) Blue Walls(Stripes), 2019.
사진 출처: Ocula 홈페이지 | 우) 팀 아이텔, 벽 Wall, 2018. 사진 출처 :Galerie EIGEN+ART 홈페이지
전시의 연계 프로그램이었던 워크샵 “나의 탐구”는 사진을 활용해 그림을 그리는 아이텔의 작업 방식에 착안해 참여자가 본인의 사진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워크샵은 6명의 참여자가 거리를 두고 홀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는데, 타인과 연결되지 않고 홀로 있을 때 나를 더 잘 알 수 있다는 아이텔의 신념을 반영한다.
팀 아이텔 워크샵
이 워크샵이 특별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단순히 사진을 캔버스에 그대로 옮겨 그리는 것이 아니라, 더는 제외할 것이 없을 때까지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며 그림을 그려야 했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싶은 사진을 선정하는 것뿐 아니라 제거할 것들을 고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사진을 찍었던 당시의 시간과 장소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끊임없이 생각해 중요한 것들만 남겨야 했기 때문이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탐구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볼 수 있었다.
좌) 필자가 선정한 사진 | 우) 팀 아이텔 워크샵에서 필자가 그린 그림
필자는 워크샵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아이텔의 인터뷰 내용이 떠올랐다. 그는 스마트폰 때문에 집중력을 잃고 작업에 몰두할 에너지를 잃을 것을 염려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자극이 도처에 널려있어 깊은 사유를 방해하지만, 아이텔의 작업 방식처럼 오롯이 나를 마주하는 시간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은 삶과 예술을 더욱 견고하고 다채롭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아이텔은 향후 창작 계획을 묻는 인터뷰 질문에 다른 두 순간을 한 화면에 합치는 방식 이외에도 회화에 시간과 공간을 표현하기 위한 연구를 지속할 것이라 답했다.1)이번 전시를 관람하며 회화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으며, 보다 더 확장될 그의 작업을 기대하게 되었다. 앞으로 대구의 여러 전시장과 미술제, 아트페어에서도 시간과 공간처럼 동시대 미술의 소재를 탐구한 회화들을 자주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작가들의 치열한 탐구의 과정에 귀를 기울이고, 발을 맞추어 함께 해야 할 것이다.

  • 1)대구미술관 《untitled(2001-2020)》 팀 아이텔 인터뷰 https://www.youtube.com/watch?v=AjkeVzn9GcQ (접속일: 2020. 1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