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목차보기
대구예술의 힘
Print Friendly, PDF & Email
대구예술의 힘 #작고·원로 예술인
창의성 교육, 교사교육에서 출발해야
신경애 / 경북대학교 강사, 교육학 박사
“대학교수는 미술가입니까, 미술교육자입니까.” 박휘락은 매 학기 첫 강의 때 학생들에게 대뜸 이런 질문을 던졌다. 학교급에 따라 미술교육의 목적과 내용은 달라질지라도, 교육에 종사하는 한 어디에서 근무하든 간에 교육자라는 자각과 사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미술가와 미술교육자의 역할을 분명히 할 것을 주장하는 그와의 만남을 통해 학생들은 자신들이 소망하는 교사의 일을 단순히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교육이라는 본질적 관점에서 생각하게 된다. 오랫동안 교사 양성기관에서 가르쳐온 그 다운 발상이다. 교육이란 인간의 성장과 관련되는 일이다. 교사가 교육의 질을 좌우한다는 것을 박휘락만큼 관철하는 인물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박휘락
미술교육 분야에서 박휘락의 업적은 괄목할만하다. 우선 그는 한국미술교육의 산증인이다. 박휘락은 미술교육에 대한 관심이 적고, 불모지였을 때 소신을 가지고 미술교육학의 근간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955년 학교 현장 교사에서부터 미술교육학자로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65년이라는 긴 시간의 교육경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재직시절 선구적으로 창조‧표현주의 미술교육을 도입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런 관계로 1960년대 한국아동미술교육연합회장과 한국아동미술협회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한국교육대학교 미술교육학회장, 제6차, 7차 미술교과용도서 연구위원(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역임했고, 문교부 장관상(1974년, 1976년, 1988년)을 수상했으며, 대구교육대학교와 경북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교사 양성에 힘썼다. 현재 대구교육대학교 미술교육과 명예교수, 한국미술교육학회 고문이다.
「사생화교육의 변천에 관한 연구」, 「’보는 힘’을 기르기 위한 미술 감상용 SelfGuide의 개발에 관한 연구」, 「평면표현을 통한 창의성 계발」 등 20편이 넘은 연구논문과 『판화를 통한 교육1』(1965), 『판화를 통한 교육2』(1968), 『한국 미술 교육사: 미술 교육 100년의 흐름 (1895-1995)』(1998), 『미술감상과 미술비평 교육』(2003) 등 총 12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그의 연구물은 미술교육에 관여하는 많은 이들에게, 미래 미술교육을 전망하는데 큰 영감을 주고 있다.
창조‧표현주의 미술교육을 이끌다
1935년생인 박휘락은 대구사범학교를 거쳐 영남대학교 문학부 및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미술교육)을 졸업했다. 1955년에 첫 발령을 받은 곳이 포항 중앙국민학교이다. 대구가 아니라 지방으로 발령이 난 이유는 성적이 안 좋아서였다고. 그는 피아노 연주를 못해서 특히 음악 성적이 낮았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하지만 포항에서 그는 교사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열등생으로 시작한 교사의 삶을 완전히 역전시키는 사건이 미술교육을 매개로 일어났다. 당시 성인의 미술작품 일색의 미술교과서에서 아동미술작품을 중심으로 한 미술교과서 편찬을 시도한 문교부는 전국에서 아동미술작품을 모집했다. 그의 지도를 받은 아이들의 작품이 포항 대표로 많이 뽑혀 올라가 교과서에 채택되었다. 포항시 교육청까지 박아무개가 미술교육을 잘한다는 소문이 났다. 이 소문은 급기야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국민학교 교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교장실에 불려간 그는 ‘내일 당장 짐을 싸서 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포항에서 근무한지 채 1년도 안 되어 일어난 일이다. 굉장히 획기적인 발탁인 셈이다. “당시에 교육대학교 부속 국민학교는 도(道)마다 있었지만, 사범대학 부속 국민학교는 전국에 서울대학교 부속과 경북대학교 부속 이렇게 두 곳밖에 없었어.” 그러니 부속 국민학교 교사로 가게 되었을 때 그의 자부심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1956년 경북대 부속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한 박휘락은 창조‧표현주의 미술교육에 더욱 몰두했다. 한국미술교육사에 남긴 그의 업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교사 주도의 자발적인 연구회 활동
경북대 부속 국민학교 시절에 그는 교사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인 ‘한국아동미술교육협회’에서 활동했다.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연구회를 만든 이 모임에서 만나면 주로 아이들의 창조성 교육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학교장들의 후원으로 ‘한국아동미술교육협회’에서 만든 연구 자료집이 『아동미술』(1965)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미술 연구지는 이렇게 탄생했다. 1회로 끝난 이 자료집 맨 뒤에는 미술교육에서 창조성을 길러야 한다는 주장이 담긴 선언문 ‘우리들의 부르짖음’이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교사가 주축이 되어 한국의 미술교육을 선도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미술교육에서 창조성을 부각하는 이 새로운 움직임을 창조‧표현주의 미술교육이라 한다. 박휘락에 따르면 창조‧표현주의 미술교육은 “어린이들은 날 때부터 내부에 창조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어른들이나 교사의 잘못으로 억압당하는 일 없이 본성에 따라 계발되고 신장되어야 한다. 미술교육의 중요한 목적이 여기에 있다”라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그는 경북대 부속 국민학교 시절 학생들이 귀가한 방과 후에 동료교사들과 미술수업에 대하여 토론하고 정보를 나누는 일종의 연수회를 조직하였고 미술이론에 대한 책을 만들어 선생님들과 공유하였다. 특히 그는 판재에 의하여 찍혀 표현되는 판화에 매력을 느껴 학생들에게 허버트 리드(Hebert Read) 사상에 입각한 창의적인 판화교육을 실천하였으며, 학생들의 미술작품 전시회를 개최하고 한국 최초의 아동 판화작품집 『판화를 통한 교육』을 발간하였다.
미술교육을 정상화시키려면 어느 한 사람이 아닌 미술교사를 양성해야
경북대 부속 국민학교에서 16년간 연속근무한 그는 장학사와 연구사를 거쳐 미술교육 연구를 계속하고 싶었다고 한다. 1978년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초등교육에서 중등교육으로 미술교육 연구의 장을 확장한 그는 고(故) 김수녕 교수의 후임으로 1984년에 대구교육대학교에 부임했다. 이후 교사의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미술교육은 바뀌지 않는다는 그의 생각은 이렇게 교원양성을 위한 삶으로 이어졌다. 대구교육대학교와 경북대학교의 강단에서 그는 미술을 가르친다는 일이 무엇인가를, 미술교사가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라는 지도를 해왔다. 박휘락이 강조한 미술교사의 자질은 학생의 개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로(Gustave Moreau)는 마티스(Henri Matisse)를 길러냈다. 모로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지만 마티스의 단순하고 힘있는 표현을 인정했다.”
잘 그린다 못 그린다가 아니라 학생의 본질을 옳게 보라
우리나라 미술교육은 그 목적을 전인교육에 두고 있다. 미술교육이 인간교육의 일환이지 미술가를 만들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는 것이다. 박휘락의 미술교육 신념은 다음의 말에서 엿볼 수 있다. “어떤 대상을 보고 그리는 것을 사생화(寫生畫)라 하는데, 개화기 때 교육과정을 보면 간취화(看取畵)라고 있다. 여기서 간이라는 글자는 살필 간자이다. 손수에다 눈 목자를 쓰고 있는데, 그냥 보지 말고 손바닥을 유심히 보듯이 성실히 보라는 뜻이다. 간호사 할 때도 이 간자를 쓴다. 간호사(看護師)의 사자가 스승 사자이다. 그래서 교사가 학생을 볼 때 그림을 잘 그린다, 못 그린다 하는 것 보다는 학생의 본질을 옳게 보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의 근대미술교육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경험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창의성 중심 미술교육으로 전개되었고, 학문에 기초한 교육사상의 영향을 받아 DBAE(Discipline-Based Art Education)가 도입되었으며, 포스트모던 사상의 영향을 받아 다문화 미술교육, 시각문화 미술교육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21세기 미래교육의 비전으로 창의‧인성‧융합교육을 추구하고 있다. 창의‧인성‧융합교육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바로 창의성이다. 이처럼 창의성을 중시한 교육이 시대를 넘어 다시금 강조되고 있다. 학생의 개성과 잠재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 박휘락의 연구는 미술교육과 교사교육의 장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교육은 인간을 길러내는 것인데, 이는 하나의 인간을 창조하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한 心象의 기록 19-1』 79.0×107.0cm, Mixed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