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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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 #작고·원로 예술인(아카이브)
창작음악이 진정한 경쟁력
임언미 / 대구문화 편집장
– 작곡가 우종억(1931~ )
호기심 많은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나이는 열 살 남짓. 악대부로 활동하던 형의 트럼펫 부는 모습이 너무나 멋져보였다. 어느 날 형이 두고 나간 트럼펫에 살짝 입술을 대어 불어 보았다. 형에게 들킬까 두려워서였을까, 음악가로의 길에 대한 저도 모를 예감 때문이었을까. 쿵쾅 쿵쾅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소년은 바로 작곡가이자 지휘자 우종억이다.
그는 1950년부터 약 20년 간 트럼펫 주자로 활약했고 대구시향 부지휘자와 상임지휘자를 거쳤다. 계명대 음대에서 1997년 정년 때까지 교편을 잡는 등 작곡과 지휘, 후진 양성 등 지역 음악계 여러 분야에서 초석을 놓았다.
시향 단원 시절 연주모습
대구시립교향악단 지휘자 시절 단원들과 함께(1975)
지휘 분야에서의 그의 업적은 뚜렷하다. 대구시향 부지휘자와 상임지휘자를 16년 간 맡았다. 한국지휘연구회를 창설했고 국내 최초로 계명대에 지휘전공 과정을 신설했다. 그렇지만 그의 역량은 작곡 분야에서 가장 크게 발휘됐다. 그는 1990년 영남작곡가협회를 창립했고 1991년에는 영남 국제현대음악제를 창설했다. 2002년에는 세계 음악사에 동양 음악의 자리를 굳건히 구축하겠다는 취지를 내걸고 동아시아작곡가협회를 창립했다. 같은 해 동아시아 국제현대음악제도 창설했다.
그가 지금까지 작곡한 작품은 50여 곡을 훌쩍 넘는다. 교향곡, 관현악곡, 실내악곡, 합창곡, 가곡,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의 곡들은 국내를 비롯해 일본, 미국, 호주, 폴란드, 독일, 러시아 등지에서 많은 교향악단에 의해 연주되고 있다.
군악대 활동에서 대구시립교향악단 창단 멤버로
우종억은 1931년 경북 달성군 월배면에서 태어났다. 그가 처음 음악을 접한 것은 11살 때. 계성학교 악대부에서 활동하던 형이 집에 트럼펫을 갖고 와서 부는 것을 보게 됐다. “형이 트럼펫으로 도라지 타령을 연주하는데 그 음이 정말 좋더라고. 좋아 미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본 형이 연주법을 가르쳐줬지요.”
졸업 후 형은 시내에서 대구음악사를 경영했다. 우종억은 대구상고에 진학하면서 형의 악기점에서 기거하며 학교를 다녔다. 덕분에 자연스레 여러 악기를 접해볼 수 있었다. 음악 가까이에서 생활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음악가의 길을 꿈 꾼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국문학도를 꿈꿨다. 평소 국어 시간을 좋아했고 국어 선생이 그의 작문 실력을 인정해 서울대 국문학과로 진학을 권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됐다.

육군 군악대 시절
전쟁 통에 대학 입시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마침 육군군악학교가 부산에 있어 그는 육군군악학교 군악대 입대를 선택했다. 1951년부터 1955년까지 만 5년간 군 생활을 했다. 군악대 시절은 그의 음악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군악대에서 트럼펫 연주자로 활동하며 이재옥(전 서울대 교수), 전봉초(전 서울대 교수), 양재표(전 KBS교향악단 첼로 수석), 이재헌(전 KBS교향악단 단원, 연세대 교수) 등 현재 한국 음악계를 움직이는 인재들과 함께 생활했다.
군악대 활동을 하면서 전국을 다니면서 다양한 곡을 연주했다. 그러다 보니 그 곡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단원 중 화성악을 공부한 사람을 찾아 틈틈이 화성법을 배웠다. 그 결과 그는 군 생활 중 행진곡 <푸른 날개-blue wing>를 작곡할 수 있었다. 단순히 화성법만 아는 상태에서 곡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행진곡을 워낙 많이 연주하다 보니 곡을 읽는 순서가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행사 때 제 곡을 연주할 기회가 있었어요. 음악이 쫙 울려 퍼지는 순간, 마치 위대한 작곡가가 된 기분이 들어 정말 좋더라구요.” 자신이 창작한 곡이 무대에서 객석으로 울려 퍼질 때의 감동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그 때의 감동이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고 했다.
제대 후 1956년, 집안의 권유로 대구대 상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렇지만 그는 음악에 한창 재미를 들였던 터였다. 상과대학 공부가 적성에 맞을 리가 없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57년, 대구시립교향악단의 전신인 대구교향악단 창단 멤버가 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틈틈이 경음악 재즈밴드를 결성해 미군부대를 돌며 연주활동을 이어갔다.
결국 그는 1961년 계명대 종교음악과로 편입을 결정, 정식으로 작곡을 전공했다. 학창시절에도 이기홍(1926~2018)과 함께 교향악 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1964년, 이기홍 초대지휘자와 함께 대구시립교향악단 창단 멤버로 이름을 올렸다.
제6회 대구관현악단(지휘 이기홍)
평단원에서 상임지휘자로
그는 대구시향 트럼펫 수석 주자로 활동하다가 1970년 부지휘자의 자리에 올랐다. 1975년에는 앞니 두 개를 교체하는 바람에 트럼펫 연주에 지장이 생겨, 트럼펫 연주자로서의 길을 마감하게 된다. 그는 이후 지휘자로서의 활동에 매진하기로 했고 1977년,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좋은 지휘자가 되기 위해서는 폭 넓은 음악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 도호가쿠엔 음악대학에서 지휘를, 센조구 가쿠엔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일본 유학 시절
“도호가쿠엔 음악대학 오자와 세이지 교수는 혼자 유명한 음악가가 되는 것보다 교육을 통해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음악계를 키우는 더 큰 일이라고 말했어요. 상당히 인상 깊은 말이었죠.” 그때부터 그는 개인의 성공보다 우리나라 음악계를 키우는 교육에 힘을 쏟아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고 했다.

2년간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우종억은 1979년, 이기홍 대구시립교향악단 초대지휘자에 이은 제2대 상임지휘자의 자리를 맡게 됐다. 대구시향 평 단원으로 시작해 부지휘자를 거쳐 상임지휘자에 이른 최초의 사례였다.

1979년부터 1987년까지 대구시향을 이끌면서 그는 한국 음악계의 발전을 목표로 과감히 도전했다. 대구시향 정기공연 레퍼토리 선정을 위해 창작곡을 공모했다. 이 일은 대구 음악사에서 획기적인 일로 기록된다.

1979년부터 1987년까지 대구시향을 이끌면서 그는 한국 음악계의 발전을 목표로 과감히 도전했다. 대구시향 정기공연 레퍼토리 선정을 위해 창작곡을 공모했다. 이 일은 대구 음악사에서 획기적인 일로 기록된다. 창작곡 공모는 신진 작곡가들에게 창작곡 발표의 기회를 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국립교향악단, KBS교향악단에서 일 년에 한 차례 정도 창작곡을 연주하던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지역에서 관현악곡 창작곡 공모를 시작한 것은 지역 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임주섭(영남대 작곡과 교수), 박기섭(대구교대 작곡과 교수) 등은 당시 창작곡 공모에서 발굴된 작곡가들로 현재 지역 작곡계를 주도하는 사람들이다.
설계가 탄탄해야 좋은 곡을 쓸 수 있어
젊을때 모습
그는 1986년 9월, 대구시향 상임지휘자에서 물러났다. 그때부터 그는 계명대 교수로서 후학을 가르치며 더욱 작곡에 매진했다. <바이올린 협주곡 ‘비천’(1992)>, <심포니 교향곡 ‘아리랑’(2001)>, <관현악을 위한 ‘백두산’, ‘아리랑’(2006)>, <트럼펫 협주곡(2006)>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는 한동안 불교 사상에도 심취했다. 사람의 일생을 그린 실내악곡 <염불>을 발표한 데 이어 <피아노와 플루트를 위한 심음곡(深音曲)>을 발표했다. 탱화 ‘심우도(深牛圖)’ 이야기에서 착안한 것이다. 즉 ‘심음(深音)’, 소리의 도를 찾겠다는 것이다. 그의 곡은 전국 여러 음악단체에서 레퍼토리로 인기리에 연주되고 있다.
“작곡은 건축과 같아요. 오랜 시간 고민해 설계한 후 그 구상대로 지어 나가는 거죠. 설계가 탄탄해야 좋은 곡을 쓸 수 있어요. 설계가 잘못된 건축물이 쉽게 무너질 수 있듯 구상이 잘못된 곡은 제대로 연주될 수 없어요.”
우종억은 작곡의 과정을 건축물을 짓는 것에 비유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세월의 깊이만큼 깊은 맛을 낼 수 있는 곡이 되려면 제대로 된 구상단계를 거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때문에 그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작곡가 대열에 오른 후에도 곡을 쓰는 것이 조심스러웠다고 했다. 연륜이 쌓일수록 더 조심스레 연구하고 노력했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2009년 발표한 오페라 <메밀꽃 필 무렵>이다. 이 작품은 그가 2006년 구상 이후 만 3년 이상 노력해 작곡했다. 무엇보다 팔순에 이른 노작곡가가 신작으로 오페라였다는 점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메밀꽃 필 무렵>은 2009년 10월 구미문화예술회관에서 초연되었고 같은 해 연말 제2회 대한민국오페라대상에서 창작부문 금상을 받았다. 초연 이후 수정 보완을 거쳐 2011년에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제2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에 초청 되었다. 예술의전당 공연 때는 그가 직접 지휘를 해서 화제를 모았다. 이 작품은 이후에도 전국 각지 갈라 콘서트 무대에 오르는 등 대중성을 인정받는 창작 오페라의 대열에 올랐다.
창작곡을 선보여야 우리나라 작곡이 발전

최근 모습
창작곡의 중요성에 대한 생각은 그의 음악 생애에서 큰 줄기로 자리하고 있다. 기존의 곡들은 해설과 음반이 나와 있어 연주하기에 부담이 없다. 반면 창작곡은 악보만 있을 뿐 모든 것이 지휘자와 연주자의 해석과 노력에 달려 있기에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는 창작곡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영향력 있는 음악 단체에서 관현악곡 등의 창작곡을 선보여야 우리나라 작곡이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주가 하드웨어라면 창작은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어요. 연주자들의 수준은 세계 정상급에 올랐다고 봐요. 이제는 창작에 힘을 쏟아야 해요. 정명훈, 조수미 등이 우리나라 음악을 세계무대에서 연주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음악이 그저 좋아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음악 발전에 한 획을 긋겠다는 뚜렷한 목표의식이 필요하다.

연주자, 대학교수, 지휘자, 작곡가……. 10대부터 80대 까지 음악의 길만 매진해온 우종억은 음악계 후배들과 수많은 제자들에게도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다. 80대 초반에도 오페라곡을 발표하고 80대 후반까지 지역 음악계 현장을 다닐 정도로 건강했던 그가 최근 들어 부쩍 쇠약해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음악가들은 늘 공부해야한다’, ‘책을 가까이 하라’고 강조해온 그의 음악관과 철학은 그의 뒤를 잇는 많은 음악인들의 가슴에 그대로 남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