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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간판 자국으로 그려보는
과거 대구 문화 지도
글_황희진 매일신문 기자
대구 도심을 걷다 보면 옛 간판이 이따금 보인다. 해당 가게는 없어졌거나 이사를 했으니, 간판이라기보다는 ‘간판 자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철거 만능 개발 시대에 용케도 살아남은 흔적들이다.

간판 자국은 과거 대구의 유행 업종, 상권 분포, 거리 형태가 어땠는지 가늠하는 사료(史料)로 활용할 수 있다. 요즘은 잘 쓰지 않은 디자인의 글자체(폰트, font)도 담고 있어 관련 학계가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물론, 대구를 찾은 여행객에게 소소한 볼거리로도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몇 개의 간판 자국은 과거 대구 문화 지도도 그려보게 해 준다.

본영당서점
대구 서점 역사를 상징하는 이름이 있다. ‘본영당서점’이다. 1945년 대구 중앙로에 서점으로는 처음으로 깃발을 꽂았다. 본영당서점을 계기로 주변에 청운서림, 학원서림, 대구서적, 제일서적, 대우서적 등 향토 서점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중앙로는 대구를 대표하는 서점 골목이 됐다. 제일서적 같은 대형 서점은 한일극장, 대구백화점, 중앙파출소와 함께 젊은이들의 주요 약속 장소 역할을 하면서 모객으로 주변 상권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이게 20세기까지의 얘기다. 2000년대 초반에 대형 서점 브랜드인 교보문고, 영풍문고가 중앙로 바로 인근에 들어서 대구 서점계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인터넷 서점 시장도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군소 서점이 하나 둘 문을 닫았고, 규모로는 대구 서점계의 간판 격이던 제일서적이 2006년 폐업하며 중앙로는 서점 골목이라는 이름을 잃었다. 본영당서점은 수성구 대구MBC 건물로 이전하는 등 생존을 모색했지만 결국 2008년 문을 닫으며 60여년 역사를 마감했다.

대구 최초의 사설도서관 격인 만권당(남평 문씨 광거당)과 여러 이름난 서원이 책 문화를 꽃피웠던 인문도시 대구에서는 그러나 이제, 전통 있는 토박이 서점은 찾을 수 없다. 대구 서점 역사를 열고 또한 최후까지 지킨 본영당서점의 간판 자국은 대구문학관`향촌문화관 건너편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있는 한 건물 벽면에서 볼 수 있다.

본영당서점
녹향 음악감상실
책만큼 대구 사람들은 음악에도 관심과 열정을 쏟았다. 지금 대구콘서트하우스의 클래식 음악 공연이 걸핏하면 매진 사례를 만드는 저변을 거슬러 올라가면, 8.15 광복 후 생겨난 몇 곳의 음악감상실이 나온다. 대표적인 곳이 ‘녹향’이다.

녹향 음악감상실
1946년 대구에서 창립한 예술 모임인 예육회 멤버 故(고) 이창수 씨가 그해 향촌동 자택에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개소한 클래식 음악 위주의 감상실이다. 축음기 1대와 SP 레코드 500여장으로 출발했다. 원하는 음악을 들으려면 레코드가 유일한 도구였던 시기에 녹향은 귀중한 음악감상회 장소가 된 것은 물론 화가 이중섭, 시인 유치환 등 다양한 장르 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도 했다.

남일동의 좀 더 넓은 공간으로 자리를 옮긴 녹향은 1960년대부터 클래식 음악을 찾는 발길이 줄어들며 경영난을 겪기 시작했다.

사일동 태화빌딩, 포정동 목마다방, 중앙로 코리아백화점, 향촌동 명시당, 동성로 코스모스아케이드 등을 전전하다 1986년 화전동 대흥빌딩에 둥지를 튼 다음 30년 가까이 문을 열었다. 2011년 주인 이창수 씨가 별세한 후에도 셋째 아들인 정춘 씨가 계속 지켜온 녹향은 2014년 대구문학관`향촌문화관 지하 1층으로 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폐업하지 않은 녹향은 옛 간판도 폐기하지 않았다. 입구 옆에 간판 자국으로 전시하고 있다. 1986년 화전동 대흥빌딩으로 이전했을 때 건 네온사인 간판이다.

정소산무용학원
예술가의 흔적은 그가 남긴 예술 작품으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전시`공연 팸플릿이라든지, 언론 기사라든가, 그리고 그가 예술 활동을 펼친 공간 및 기리는 공간의 명칭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대구에 적잖게 있다. 달서구의 도로명인 상화로, 북구 이인성 사과나무거리, 여행지로 인기를 끌고 있는 중구 김광석길(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같은 것들이다. 전자의 경우는 찾기 힘들다. 앞서 언급한 철거 만능 개발 시대 탓에 많은 예술 공간이 사라지고 비워졌기 때문이다.
정소산무용학원
대구 남산동에 있는 ‘정소산무용학원’ 간판 자국은 20세기 대구 무용사를 이끈 무용가 정소산(1904~1978)을 21세기로 이어주는 흔적이다. 대구에서 태어난 정소산은 5세 때부터 고전무용을 배웠고 21세 때부터는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여러 권번(기생조합)에서 후학을 길렀고, 서울 숙명여고 무용 교사도 지냈다. 그러다 정소산만의 예술 공간이 1950년 그의 나이 46세 때 탄생했다. 대구 하서동에 세워진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다. 정소산은 여기서 1천명이 넘는 무용수를 가르쳤다. 그동안 알려진 정소산의 이력에서는 이곳이 가장 유명하지만, 그가 말년에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춤꾼 양성에 힘쓴 공간인 남산동 정소산무용학원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중앙시네마, 한미여관, 팍스뮤직
취재 중 사진으로 찍었지만 원고를 쓰는 사이 건물 철거나 업소 이전 등을 이유로 현실에서 사라져버린 간판 자국들도 있다.
중앙시네마
1997년 대구 최초의 복합상영관으로 개관했다가 2007년 폐업한 ‘중앙시네마’ 건물은 한동안 옛 간판이 벽면에 부착돼 있었다. 그러다 2017년 2월 공사에 들어가면서 건물이 가려져 그마저도 확인할 수 없게 됐다. 대구에 뿌리를 둔 영화관 역사는 수많은 극장이 폐업하고 한일극장과 아카데미극장이 CGV대구한일과 CGV대구아카데미로 바뀌면서, 현재 만경관만이 그 맥을 잇고 있는 상황이다. ‘중앙시네마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만나겠습니다’라는 벽면의 문구로 바로 앞 약령시 버스정류장을 이용하는 수많은 대구 시민과 마주해 온 중앙시네마도 이제 완전히 사라지게 된 셈이다.
한미여관
봉산동 학사골목에 있던 여러 여관은 대구를 방문한 화가들이 숙박을 하거나 아예 화실처럼 쓴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여관들은 현재 모두 폐업한 상태다. 남은 건물들 중 유일하게 굴뚝 부분에 적혀 있던 ‘한미여관’의 간판 자국이 2017년 1월 건물이 철거되면서 사진으로만 남게 됐다.
팍스뮤직
‘팍스뮤직’은 서점보다 더 큰 타격을 받고 사라진 대구의 레코드점들 중 토종 음반 가게의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는 곳이다. 1990년대 중반 그래미레코드라는 이름으로 개업했고 2000년대 들어 지금의 팍스뮤직으로 바뀌었다. 20년 넘게 중앙로 롯데영플라자 뒤편에서 영업을 해오다 2017년 2월 대구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 대현프리몰로 매장을 옮겼다. 가게를 밝히던 간판은 잠시 간판 자국으로 남았다가 이내 떼어져 역시 사진으로만 볼 수 있게 됐다. 팍스뮤직은 새 음반은 물론 중고 CD 및 LP도 취급하고 있어 과거 레코드점에 대한 향수도 느낄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