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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리뷰 #4 – 신간소개
김원일의 <푸른 혼> 다시 읽기
김윤미 / 극작가, 계명대 교수
교양과목 중에서 학생들에게 매번 제시하는 과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 문학관을 다녀오는 것이다. <마당 깊은 집> 문학관은 계산 성당 뒷골목에 있다. 그곳은 시인 이상화 고택, 청라언덕, 약전골목 등 대구 근대화거리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위치여서 학생들에게 탐방과제를 내기에 적합한 장소다. 학생들은 마음에 닿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고 몇 줄의 짧은 시를 적어 과제를 내야 한다. 내가 학생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들이 도시의 이야기에 잠시나마 귀를 기울였으면 해서다.
광장을 만드는 것은 역사를 만든다고 했던가. 공간이 사람을 품어내고 사람의 품을 또한 공간이 어떻게 넓히는지 생각한다면, 도시는 바로 역사가 덧씌워진 시간의 흔적일 것이다. 대구에 켜켜이 쌓인 시간들이 생각보다 다양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오롯이 남아있음을 발견할 때, 그 시간들이 오래전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이다. 이런 느낌이 들기 전까지 나는 진정으로 대구에 살지 않은 셈이다.

어느 날 우연히 대구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흐드러지게 핀 가창 댐의 벚꽃 길을 흐를 때, 행정리의 한적한 들판에서 푸르고 선명한 하늘과 익은 벼들이 일렁이는 풍경을 마주할 때, 팔공산 자락의 은빛개울들과 나무행렬을 만날 때, 강철같이 탱탱한 과일들과 짙푸른 야채, 매번 새로운 길을 열어 보이는 분지를 둘러싼 산길을 걸을 때, 이미 오래 전에, 누군가가 처절하게 꿈을 꾸며, 혹은 굶주림을 견디며, 도시로 떠나고, 돌아오고, 누군가와 어울리며, 내가 밟은 흙을 밟고 내가 선 곳에서 달을 보고 하늘을 보며, 한탄하고 울며 소리치며, 우정을 나누고 그래도 희망을 가졌다는 것을…
풍경을 풍경으로 바라볼 때, 그곳에는 어떤 이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 풍경 속으로 걸어가면, 사람들이 새겨놓은 시간의 흔적이 보인다. 그곳에 묻힌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게, 묻힌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김원일의 <푸른 혼>을 만나고 나서 보이는 것들이 있다. 소설 속에는 익숙한 거리의 이름과 장소가 나온다. 사람들이 보인다. 해방 직후 식량난에 대구에는 굶주린 아사자가 속출했다. 팔공산으로 숨어든 산사람으로부터 아들을 지키기 위해 대구읍내 초등학교로 장남을 전근시킨 가난한 농부는 결국 시대를 향해 걸어간 아들을 잃고 만다. 팔공산에서 태어나 팔공산에 묻히기까지, ‘나’의 독백으로 이야기 하는 첫 번째 중편 <팔공산>. 두 번째 중편 <두 동무>는 고향으로 가는 버스에 우연히 동석한 부산 고학생의 우정을 그린다. 학업을 중단하고 집안일을 돕기 위해 고향가는 김길원과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준병. 그렇게 만난 둘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를 격려하고 지원한다. 검정고시로 서울대 물리학과에 합격한 김길원은 자신에게 힘을 준 이준병이 부산사범학교를 마치고 초등교사로 따분해 할 때 그를 격려하여 서울의 경희대 경제학과에 입학하도록 응원한다. 두 명 모두 가난한 농부의 명석한 아들들이었다. 김원일은 그들의 우정을 어떻게 이렇게도 우직하게 묘사해놓았는지 모르겠다.

“김길원은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동무 이준병에 대해 구속된 이후에도, 만약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 길에 서지 않았을텐데, 네가 여군을 내게 소개해주지 않았어도 사형선고만은 면했을 텐데, 하고 그를 원망해본 적이 없었다. 긴 세월 동안 그와의 우정을 통해 어떤 생각을 실천하며 사는 생이 진정한 삶인가를 늘 함께 모색해왔고, 그로부터 사랑과 우정과 신의가 인간관계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우쳤고, 끝내 죽음의 길까지 어깨동무하여 가지 않는가.”

이 책에는 <여의남 평전>이라는 중편도 있다. 경북대 정치학과 출신인 여의남은 통인사 대처승의 아들이었다. 경북중학교와 경북고를 나온 TK출신 여의남은 출세가도가 보장된 삶을 버리고, 서른 살에 어머니가 준 동자상을 삼키고 마지막으로 사형을 당한다. 김원일의 <푸른 혼>에는 대구매일신문 논설위원이었던 서상원을 그린 <청맹과니>와 경주 서악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4.19당시 경북 상주고등학교 교사였던 도운종의 마지막 순간을 그린 <투명한 푸른 얼굴>, 1974년 11월에서 2004년 4월까지 남편을 위한 아내들의 증언과 탄원서로 이뤄진 <임을 위한 진혼곡>이 실려 있다.
그렇다. 김원일의 <푸른 혼>은 1975년 4월 9일 서대문 구치소에서 함께 사형 집행된 7인과 또 한 명의 젊은이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사형선고를 받자마자 다음날 아침 형장에서 스러진 이 젊은 죽음으로 인해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법학자회의에서는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다. 김원일은 <푸른 혼>이 인혁당 사건을 중심에 놓고 연작으로 집필된 여섯 편의 중편소설이라는 것. 각각의 인물들이 모두 처형당한 실제 인물에서 빌려왔고, 재판기록과 증언, 사실에 근거하여 재구성된 소설임을 밝히고 있다. 실제 이름을 쓰지 않았지만 주인공들이 누구인지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알 수 있다.

<푸른 혼>의 인물들은 김원일이 쓴 <마당 깊은 집>의 실제 배경 속을 걸어 다녔었다. 약전골 일대와 염매시장의 돼지국밥집에서 열띤 토론을 했던 그들은 누구인가. 가난한 부모와 가난한 이웃을 둔 그들은 침묵함으로써 출세가도를 달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여 시대에 목소리를 낼 줄 알았다. 그들의 배경이 하나같이 허약하여, 그들을 지켜줄 배경 또한 든든하지 못했다. 그들은 남한과 다른 체제에 살았더라도 그들의 가난한 이웃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을 것이다. 그들의 억울한 죽음에 김원일 작가는 소설을 쓰는 동안 꿈속에서 그분들을 만났고 그분들의 설움에 찬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한 때는 공자의 이름과 같은 한자 구(丘)를 썼던 대구(大丘)는 공자의 이름을 쓸 수 없다는 이유로 대구(大邱)가 되었다. 이 커다란 언덕을 가진 도시는 가난한 이웃과 부모를 위해 똑똑한 머리로 이상을 꿈꾼 청년들을 품었다가 잃었다. 조금만 더 그들의 항변을 들을 시간이 있었다면, 서둘러 생명을 베어내지 않고 기다렸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푸른 생이 한순간 으스러진 후 남은 가족은 어떻게 살았을까.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알았던 젊은 아버지와 아들은 몰매를 맞고, 역사에 작은 이름이나마 기록되었으나 젊은 아내들은 어린 아이들과 함께, 그 긴 시간을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의 길남이 엄마처럼 한스럽게 손발이 닳도록 어두운 삶을 일구었을 것이다. 거칠고 무미건조한 김원일의 소설 <푸른 혼>을 다시 읽는다면, 대구가 품었다가 놓쳐버린 설움의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