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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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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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 – 원로예술인
배우고 또 배우는 배우
연극인 ‘홍문종’의 삶과 예술
안희철 / 초이스시어터 대표
2020년 올해는 6.25 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코로나 19의 위기가 없었다면 이를 기념하는 다양한 공연들이 펼쳐졌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성황리에 공연 중이던 작품을 포함하여 계획되었던 다양한 기획공연들도 모두 연기되거나 취소되었다. 그나마 온라인 중계방송이라는 방법으로 공연계에 산소호흡기 하나 정도만 겨우 달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방식에 대한 의견도 다양하다. 당장은 도움이 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공연계에 독이라는 의견과 공연계에 새로운 대안이 될 것이라는 의견 등 호불호가 나뉘고 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지금은 어느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최대의 위기임이 분명하다.
바이러스와 인류의 소리 없는 전쟁이 심각하게 펼쳐지고 있는 올해, 수많은 연극의 막이 내려갔다. 6.25 전쟁 중에도 멈추지 않았던 연극무대가 처음으로 멈춰버린 것이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1953년 2월, 서울에 있던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이전한다. 이후 국립극장은 서울로 다시 돌아가던 1957년까지 대구를 한국연극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국립극장이 서울로 돌아간 후 그 극장은 한일극장이라는 이름의 영화관으로 바뀌게 된다. 대구시민의 약속 장소이기도 했던 그 극장은 현재 헐리고 그 자리에 쇼핑몰이 서 있다.
– 유망한 운동선수, 어쩌다 공무원이 되다
6.25 전쟁 중에도 막이 올랐던 연극, 관람을 멈추지 않았던 관객, 그야말로 대구는 공연의 도시였다. 대구에 머물다 떠나간 국립극장은 대구를 서울에 이어 가장 활발한 연극과 공연의 중심도시로 만드는 토양이 되었다. 그러한 역사와 모든 지점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대구, 이곳에 연극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가 바로 원로연극인 ‘홍문종’ 선생이다.

홍문종 선생의 17세 시절 모습
홍문종 선생은 해방과 6.25 전쟁 사이에 태어났다. 그야말로 격동의 역사, 그 중심에 낀 세대인 셈이다. 해방 후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을 꿈꾸며 키워가던 시대에서 갑작스럽게 겪은 6.25 전쟁이라는 비극, 그 비극의 바람은 선생의 가족사에도 불어닥쳤다. 선생의 부친께서 6.25 전쟁 중 전사한 것이다. 이후 어려워진 선생의 집안 사정 때문에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지 3년 만에야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지금도 20대의 젊은 연극인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건장한 체격 때문에 선생은 당시 투척 운동특기생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유도로 종목을 바꾸게 되고 1969년 전국체전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받는다. 그야말로 전도유망한 운동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유도 연습 도중에 왼쪽 광대뼈를 다치게 되지만 여러 이유로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는 않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대충 맞춘 광대뼈는 그대로 굳어버렸고 선생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얼굴이 비대칭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선생은 운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면서도 어릴 적 꿈이었던 가수나 영화배우를 버릴 수 없어 운동선수 시절에도 발성 연습을 따로 했었다. 그렇게 쉬지 않고 자신의 숨겨둔 꿈을 키워가고 있던 바로 그때 벌어진 그 한순간의 사고 때문에 선생은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선생은 비대칭 얼굴이 카메라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어릴 적 꿈을 포기하고 평범한 직장인의 길로 돌아섰다. 당시에는 국가유공자 자녀의 취업을 돕던 원호청(국가보훈처)의 규정이 있었다. 부선망 독자라는 사유로 취업의 도움을 받았으니, 이는 6.25 전쟁 중 전사한 부친의 도움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그렇게 해서 선생은 교육청에서 촉탁직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 1969년, 연극계에 첫발을 내딛다
교육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그때, ‘무지개’의 희곡 작가 고(故) 이만택 작가를 어느 학교의 교감 선생님으로 만나게 된다. 그를 통해 연극인 고(故) 이필동 선생을 소개받는다. 고(故) 박상근 선생과 함께 대구연극사에서 빠질 수 없는 두 선생을 모두 만나게 된 것이 이즈음이다. 돌이켜보면 돌아가신 부친으로부터 시작된 인연의 끈은 교육청을 거쳐 다시 연극으로 이어진 셈이다. 1969년, 인류는 달에 첫발을 내디뎠고, 홍문종 선생은 연극계에 첫발을 내디디며 대구연극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된 것이다.
선생은 낮에는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도 퇴근 후에는 연극 연구생으로 연극을 공부하고 배우훈련에 몰두했다. 볼펜을 입에 물고 하는 발음훈련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꾸준한 훈련 등을 거쳐 연극무대에 오른 건 3년이 흐른 뒤인 1972년이었다. 그렇게 데뷔가 늦어진 것은 제대로 된 훈련을 거쳐 무대에 서야 하는 극단 ‘공간’의 연구생 신분이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선생을 포함해 거의 모든 연극인들이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연극인의 신분을 이어가던 시절이어서 제작여건이 만만치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연극배우로 데뷔하게 된 작품이 셰익스피어에 대적할 프랑스의 대작가 몰리에르의 「수전노」였다. 이 작품에서 선생은 메뜨르 시몽이라는 하인 역을 맡게 된다.
연극 수전노 활동당시 사진
생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연극배우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머지않아 점차 배우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며 인정을 받게 된다. 1975년, 서울 국립극장에서 주최한 “전국소인극경연대회”에서 「우리들 세상」이라는 작품으로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렇게 대한민국 연극계에 선생의 이름 석 자를 새겨넣었고, 이후의 수많은 수상경력들은 웬만한 연극인의 공연경력을 넘어설 정도가 된다. 배우 홍문종의 역사는 1970년대부터 그렇게 빛나기 시작한다.
– 초대 대구연극협회장이 되다
1981년 지방자치제법 시행으로 대구시는 경상북도에서 분리 독립하여 대구직할시로 승격된다. 그래서 연극협회는 대구시와 경상북도 두 개의 지부가 필요하게 되었다. 기존에는 경북연극협회였으나 이제는 대구연극협회와 경북연극협회로 나뉘게 된 것이다. 갈등과 혼란이 존재하던 그때, 선생은 갈등을 봉합하고 중재할 적임자로 선택되어 대구연극협회 초대회장이 된다. 선생은 1982년부터 3년간 맡았던 연극행정의 길을 ‘당시로선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지 결코 배우 이외에 다른 길은 꿈을 꿔 본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배우의 길을 걷다가 선배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연출의 길을 걷게 되는 것도 거부했다. 사실 거부했다기보다는 배우 이외의 다른 길은 생각해 본 적도 없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대구연극협회 하계연수회
첫 작품에서 코믹한 역할을 잘 해낸 덕분인지 선생은 이후에도 희극에서 웃음을 안겨주는 역할을 많이 맡았다. 오영진의 「시집가는 날」이라는 작품에서는 캐스팅 단계에서 삼돌이와 맹진사 역을 두고 여러 고민이 오갔지만 결국 삼돌이 역을 맡게 되고 다른 배우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연기로 웃음을 안겨준다. 물론 한참의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어서는 다시 맹진사 역을 맡아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오영진의 「시집가는 날」
지금까지 선생의 출연작은 200편을 넘어선다. 그래서 출연 기록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분량의 정보가 된다. 때로는 웃음과 눈물을, 때로는 풍자와 노래로, 선생의 변신은 그야말로 다채로웠으며 누구보다 빛나기 시작한다.

대구시립극단 감사패
1998년 창단된 대구시립극단에서는 2002년부터 3년간 훈련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연극을 하면서 연극으로 매번 정해진 월급을 받는 보기 드문 경우였다. 훈련장으로 몇 년간 근무하며 후배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던 그때, 선생은 훈련과 공연을 통해 익힌 그간의 노하우를 시립극단의 정단원은 물론이요 객원단원과도 공유하며 대구 배우들이 성장하는 데 일조한다. 하지만 선생의 화려한 경력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라디오 방송 출연을 빼놓을 수 없다.
– 천생 배우, 천상의 목소리로 날아오르다
1999년 한국방송대상, 전국으로 생중계되던 그 시상식에서 홍문종 선생은 「달구벌 만평」이라는 대구MBC 라디오프로그램으로 개인부문 성우상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된다. 방송국 개국과 함께 시작되었던 이 프로그램에서 홍문종이라는 이름 석 자는 영원히 빠질 수 없는 이름이 된 것이다.
달구벌만평 성우상 수상 자축연
이 프로그램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흔히 말하는 대타 진행이었다. 원래 진행을 맡고 있던 김경호 진행자의 해외일정 등으로 생긴 공백을 메우는 대타 역할로 처음 방송을 하게 된 것이다.
연극인이기도 했던 인기 진행자 김경호 선생과 비슷하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배우로 추천받아 대타로 방송을 했고, 단번에 모두에게 인정받으며 공백이 생길 때마다 불려가는 대타가 된 것이다. 결국 이후 진행자가 바뀌는 개편의 시기, 아나운서, 전문 MC 등 여러 명이 「달구벌 만평」의 새로운 진행자로 나섰으나 모두 프로그램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는 평을 받게 되고, 결국 여러 진행자를 돌고 돌아 대타로 나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선생에게 마이크가 넘어오게 된다. 그렇게 마이크를 잡은 1984년 10월부터 2020년까지 무려 36년째 한 프로그램의 진행을 이어오며 방송계의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다.
좌)달구벌만평 진행하는 사진 / 우)달구벌만평 포스터
정치, 사회 등 신문기사에 나오는 시사성 강한 문제들을 주제로 촌철살인의 풍자와 고발을 이어가는 「달구벌 만평」에서 선생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한 다양한 역할을 혼자서 다 소화해내야 한다. 매일 공연하는 모노드라마이자 최고의 원맨쇼인 셈이다. 그래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내는 연기력이 늘어난 반면 만평방송에 맞는 독특한 감탄사와 특유의 뉘앙스들이 입에 배면서 연극연습 중에도 그러한 대사톤이 나와 놀란 적도 많았다.
하지만 가장 어려웠던 점은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맞는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아침방송 바로 전날 밤에 녹음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녹음한 방송 내용과 맞지 않게 상황이 변하면 다시 방송국으로 달려가서 새로 녹음을 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방송 때문에 해외여행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또한 방송녹음 시간이 연극인들이 한창 술잔을 기울일 시간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회식에서 빠지고 술도 자제하게 되었다. 이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방송을 펑크 내지 않는다. 기어서라도 간다.’는 확고한 신념과 실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방송에 대한 정신은 연극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생은 늘 남들보다 연극 연습시간에 먼저 와서 준비하고 새로운 배역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공부하는 등 자기관리에 철저했다. 그 힘이 선생의 50년 연극 인생을 지탱하고 끌고 온 바탕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생에게도 일생일대의 엄청난 위기가 닥쳤었다.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다. 코로나 19의 위기를 겪고 있는 바로 올해의 이야기다.
– 꺾을 수 없는 열정, 꺾이지 않는 투혼
2019년 12월 초, 선생은 대구시립극단의 「크루서블」에 출연한 후 가벼운 감기 증상을 느낀다. 그리고 12월 말, 대구연극협회에서 주최하고 주관한 ‘청춘연극제’의 낭독극 「이수일과 심순애」까지 빡빡한 일정을 이어간다. 선생은 이 작품에서 극의 진행을 이끄는 변사 역으로 대구의 원로연극인 김삼일, 서영우, 채치민 선생과 호흡을 맞추며 관객의 박수를 받는다. 선생은 공연을 성황리에 마친 후 ‘몸이 조금 좋지 않지만 그래도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기뻐했다. 그리고 이어진 연극인의 밤 행사까지도 자리를 지키며 후배연극인들과 함께했다. 그 자리에서 ‘아파서 죽더라도 공연은 다 하고 나서 죽어야지.’ 하며 유머를 잃지 않았던 선생의 말이 그 후 갑자기 무겁게 다가왔다.
선생은 아팠던 기억을 떠올리며 ‘처음에는 호흡도 빠르고 걷는데도 어려움이 있어 척추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통증은 점점 심해져 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을 취소시킬 수 없다는 책임감에 기어가듯이 겨우 방송국에 가서 녹음을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이 더 반복되면 모두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 2020년 1월 2일 방송 이후 더 이상 방송을 진행할 수 없다는 의사를 전달한다. 방송국에서는 선생의 건강상태가 좋아지기를 기다리겠다며 연극인이자 방송진행자인 류강국 MC를 대타로 세우며 방송을 진행한다.
그리고 쓰러진 선생은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선생의 증상은 예상한 것과 달리 감기도 아니었고 척추관협착증도 아니었다. 원인불명의 폐렴으로 중환자실까지 옮겨져 치료를 받게 된 것이다. 평소 투약하던 부정맥 치료약의 부작용이 의심되었다고 한다. 치료를 위해 사용한 약이 독이 된 것이다. 배우로서의 삶도 그러했을 것이다. 배우생활은 안정적인 생계를 보장해주지도 못했고 건강한 신체를 보장하지도 못했다. 선생의 건강 이상 소식을 접한 대구연극협회는 이사회 자리에서 선생의 건강문제를 다룰 정도로 심각한 분위기였으며 후배 연극인들의 걱정도 컸다. 선생이 중환자실에 입원해있는 동안 몸무게는 크게 줄어 전에 입던 옷을 입을 수 없을 만큼 빠졌다. 근육 또한 함께 빠져버려 예전처럼은 걸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선생에게 찾아온 병마는 어려서부터 운동으로 다져진 데다 강한 의지로 무장한 선생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선생은 3주간의 투병을 끝내고 퇴원했다. 그때부터 입원 전의 몸 상태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위험했던 선생의 상황이 코로나 19 대유행으로 중환자실과 호흡기가 부족해졌던 바로 그 직전에 벌어졌던 일들이란 점이다. 돌이켜보면 선생의 발병 시기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선생의 증상은 코로나 19 대유행과 겹쳤을 것이다. 그랬다면 호흡기 치료가 가능한 중환자실을 제때 배정받지 못하는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생의 강한 의지와 대구의 대배우가 다시 무대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연극인들의 기도는 선생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퇴원한 선생은 다시 걸으며 무대에 설 수 있는 몸을 만들어 가고 있다.
–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역사
[ 수상경력 ]
1975년 전국소인국 경연대회 최우수 연기상
1979년 대구 문화의 달 대구시장 감사패
1988년 제5회 대구연극제 연기상
1989년 제6회 대구연극제 연기상
1991년 금복문화예술연극부문 개인상
1999년 한국방송대상 개인부문 성우상
1999년 대구문화방송 특별 공로상
2003년 대구문화방송 특별 공로상
2009년 대구광역시 문화상
2010년 홍해성연극상
2010년 대구문화재단 대구문화도시 운동 공로상
2011년 대구문화방송 시청자위원회상
2011년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키네마 보이즈> 남우조연상
2011년 대구예술상
2012년 자랑스런 연극인상
2019년 대구예술상 시장상
5월 11일, 홍문종의 「달구벌 만평」이 돌아왔다. 방송펑크 한 번 없이, 해외여행은 한 번밖에 못 갔을 정도로 책임감이 높았는데 이렇게 병으로 불명예스럽게 물러난다면 지난 36년의 시간이 무척 서글프겠다는 생각이 선생을 일으켜 세웠다. 퇴원 후 걷고 또 걸어서 방송을 진행할 수 있을 정도의 몸을 만들어 낸 것이다. 선생은 「달구벌 만평」을 잘 진행할 적임자를 찾아서 물려주는 해피엔딩을 꿈꾸고 있다. 그리고 지금보다 체력을 더 끌어올려 연극무대에도 다시 서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단 한해도 거르지 않았던 연극공연, 최근 10년을 돌아봐도 매년 2~3편 정도의 무대에 올랐다. 특히 2019년에 출연했던 변사극 「비 내리는 고모령」은 20대 위주의 출연진과 함께 무대에 올라 혼자서 수많은 배역을 연기했다. 실내공연장은 물론이요 야외공연장 그것도 한낮의 야외 공연일정은 젊은 출연진의 체력도 금방 바닥나게 할 정도로 힘들었다. 선생은 체력적으로 굉장히 힘들 수밖에 없던 공연이었지만 웃음과 눈물을 잘 버무려내는 연기력으로 관객의 박수를 받았다. 그 공연을 통해 원로 연극배우의 힘과 정신을 관객과 젊은 출연진 모두에게 잘 보여주었다.
2019년‘대구예술상 시장상’
선생의 연극정신은 지금까지 받은 상에서 잘 드러난다. 그냥 받은 게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선생이 2019년에 수상한 ‘대구예술상 시장상’은 대구연극계를 넘어 대구예술계 전체와 대구시에서 인정한 최고의 예우였다. 그리고 어릴 적 꿈이었던 가수의 소질을 발휘해 뮤지컬 무대에도 꽤 많이 섰다. 2011년, 제5회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에 창작지원작으로 선정되어 공연된 뮤지컬 「키네마 보이즈」에서 늙은 도식 역을 맡아 남우조연상을 받음으로써 연극, 방송, 뮤지컬 모두에서 수상한 보기 드문 경력을 완성하게 된다.
뮤지컬 「키네마 보이즈」
그러나 선생은 천생 연극인이다. 선생은 가장 기억에 남는 상으로 연극인의 이름이 담겨 그 상이 더욱 뜻깊을 수밖에 없는 ‘홍해성 연극상’을 꼽았다. 홍해성 연극상은 대구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연출가였던 고(故) 홍해성 선생의 연극정신을 알리고 기리는 의미에서 제정된 상이다. 현재는 이 연극상의 시상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원 등의 문제로 멈춰버린 홍해성 연극상은 오히려 선생의 수상경력을 더 빛나게 만들고 있다.
“항상 공부하자. 연기에는 끝이 없다.”
선생은 후배들에게 항상 공부하자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항상 공부하며 새로운 작품을 만날 준비를 하고, 새로운 작품을 만났을 때는 그 작품을 위해 다시 공부하고, 그래서 항상 공부해야 하며 연기에는 끝이 없다는 자신의 철학을 후배들 모두 마음속에 새기고 실천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또한 공연예술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일회성으로 버려지는 작품보다는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오래 가는 좋은 작품에 관심을 갖고 지원하는 정책을 펼쳐주길 바란다’는 뜻도 전했다.
– 무대 위에 서면 아직 가슴이 뜨거운 배우, 홍문종

「박제가 된 사람들」
배우고 배워도 끝이 없어 또 배우고 싶은 배우, 홍문종 선생은 어느새 대구연극의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대구연극, 아직 끝나지 않은 배우 홍문종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선생은 지금껏 누구도 가지 않은 길, 누구도 가지 못한 길을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 누구도 가기 힘든 길을 가고 있다. 이 길이 연극이 아니라 스포츠 분야였다면 젊은 시절의 재능에 비춰볼 때 이미 명예의 전당에 올랐을 것이다. 그 헌정의 길에 배우 홍문종이 있다. 선생은 아직도 무대 위에 서면 가슴이 뜨거운 배우이다.
천상의 목소리로 세상을 담아내는 천생 배우, 항상 성실한 자세로 솔선수범하는 선배, 항상 공부하는 배우, 이 모든 것들이 선생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만든다. 그는 우리가 모두 기억해야 할 대한민국 연극의 역사이자 대구연극의 역사이다. 연극인 홍문종은 오늘도 그 역사의 중심에서 배우고 또 배우며 새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