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리뷰

목차보기
문화리뷰
Print Friendly, PDF & Email
문화리뷰 #3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 Rigoletto> 공연 후기
알고 보면 더욱 멋진 오페라의 세계
김수정 / 대구오페라하우스 홍보마케팅팀장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명작(名作)이 갖는 힘을 하나만 꼽는다면 원작이 어떤 형태이건 간에 현재의 상황에 빗대어 그리 어색하지 않게 수용된다는 점에 있다. 희한하게 그렇다. 시공간적 배경이나 캐릭터, 스토리는 당연히 다르지만 ‘지금’을 살고 있는 ‘나’또는 ‘우리’의 입장이 제각각이라고 하더라도 그 각각에 와 닿는 임팩트는 늘 ‘현재진행형’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왕이면 손에 꼽을만한 명작을 찾게 되고, 특히 대부분의 공연예술이 갖는 한시성을 놓고 볼 때, 자칫 놓칠 새라 주의를 기울이기도 한다.

대구오페라하우스는 지난 1월 30일과 2월 1일, 2회에 걸쳐 베르디 걸작오페라 <리골레토>를 무대에 올려 성황을 이뤘다. 2020년 새해를 장식한 첫 공연으로 첫 공연은 전석매진을 기록하였고, 두 번째 날에도 천 명에 가까운 관객들이 객석을 메웠다.

오페라 <리골레토> 공연사진
그런데 이날 공연한 <리골레토>는 2017년 제15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 개막작으로 선보였던 바로 그 프로덕션이다. 당시 대구시향 상임지휘자인 줄리안 코바체프가 지휘를 맡았고, 대구오페라하우스와 인연이 깊은 독일 연출가 핸드릭 뮐러가 개성 있는 연출을 선보였다. 바리톤 한명원, 소프라노 강혜정과 이윤정 등이 돋보였던 무대로 기억에 선명하다.

이번에 그 작품을 주요 제작진과 출연진을 바꾸어 다시 선보인 것이다. 애초에 검증된 작품이었다. 2020년 판 <리골레토>는 연출가 엄숙정이 재연출을 담당했고, 조나단 브란다니가 지휘봉을 잡았다. 리골레토 역은 바리톤 마리코 카리아가, 리골레토의 딸 질다 역은 소프라노 마혜선이, 그리고 이 처절한 비극의 출발점인 악역 만토바공작 역은 테너 권재희가 맡아 열연했다. 3년 전 축제의 개막작으로 뜨거운 박수를 받았던 작품의 재공연이라는 점에서 저마다 의욕과 부담을 절반의 무게로 나눠 감당했던 무대였을 걸로 짐작된다. 축제 때 아쉽게 공연을 놓쳤던 관객들은 이번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결과는,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성공적이었다.

오페라 <리골레토> 공연사진
성공의 일차적 요인은 역시 ‘명작 중의 명작’이고, 오페라 중에서도 누구나 한번은 보고 싶은 작품이라는 데 있다. 오페라 <리골레토>는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와 함께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 중기의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 중 하나다. 베르디는 이 작품에서 ‘서정적인 멜로디와 현란한 성악적 테크닉이 중요했던 도니제티 및 벨리니의 벨칸토 오페라를 계승’했으며, 따라서 <리골레토>는 ‘벨칸토의 선율미가 넘치는 동시에, 벨칸토 오페라에서 흔히 부족하게 느껴지는 극의 드라마틱한 설득력을 함께 지닌 탁월한 작품’(음악평론가 이용숙)으로 소개된다.
오페라 <리골레토> 공연사진
설령 오페라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해도 여러 매체를 통해 종종 소개되고, 심지어 CM송으로도 인기를 얻었던 ‘여자의 마음 La donna è mobile ’이라는 유명한 곡이 오페라 <리골레토> 아리아라는 것을 알면 한결 친숙하게 느껴질 것 같다. 아이들도 금세 따라 부를 만큼 단순하고 흡입력 강한 멜로디이다. 실제로 베르디는 이 곡의 대성공을 예감하고 초연 직전까지 (초연 1851. 3. 11. 베니스 라 페니체 극장)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비밀에 부쳤다는 스토리가 있다. 3막에서 공작은 살인청부업자 스파라푸칠레의 여관을 찾아 술과 방을 요구하고는 바로 이 ‘여자의 마음’을 신나게 부른다. 눈독들여놨던 여자를 만날 참이었던 것.

<리골레토>에는 이 곡 외에도 대단히 유명한 아리아들이 많다. 공작은 1막에서도 ‘이 여자나 저 여자나 Questa o quella’를 노래하며 바람기를 과시하고, 이런 공작의 거미줄에 걸린 순진한 여자 질다는 공작의 정체도 모른 채 1막2장에서 ‘사랑스런 그 이름 Caro nome’을 노래하며 사랑의 단꿈에 빠진다. 질다는 공작의 광대 리골레토가 숨겨둔 딸인데, 리골레토에게 악감정이 많은 공작의 가신들이 납치해서 궁정으로 데려간다. 2막은 다시 궁정이 배경이다. 공작에게 겁탈당한 질다를 찾아 나선 리골레토는 터질 듯한 분노를 간신히 누르며, 딸을 잃은 아비의 절절한 호소와 함께 ‘가신들, 이 천벌 받을 놈들아 Cortigiani, vil razza dannata’를 부른다. 다양한 감정을 소화하며 폭발적인 가창력을 보여주는 최고의 장면이라 할 만하다. 리골레토는 다시 3막에서 공작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며 질다와 함께 강렬한 이중창을 선보인다. ‘그래, 복수다 Si, vendetta’이다. 3막에는 ‘여자의 마음’ 외에 ‘언젠가 너를 만난 것 같다 Un di, se ben rammentomi’ 4중창도 유명하다.

<리골레토>가 처절한 비극인 것은 악인 만토바의 비참한 종말로 끝나는 스토리가 아닌 데 있다. 오히려 천사 같은 질다가 아버지 리골레토의 불타는 복수심에 희생됨으로써 리골레토에게 가슴이 뜯기는 고통을 안겨준다. 그 순간에도 공작은 ‘여자의 마음’을 소리 높여 부르며 즐거운 인생을 구가할 따름이다. 뻔한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스테레오타입으로 표현했다면 이 작품의 명성은 지금과 같을 리 없다. 이번 공연의 주요 출연진들은 막을 올리기 전, 각자의 배역에 대한 분석과 이해를 들려준 바 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만토바 공작을 담당한 테너 권재희다. 그는 공작을 단순한 악인으로 표현하고 싶지 않았던 것. 모든 부와 권력을 누려온 공작에게 자신의 행위들은 지탄받을 일들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는 권재희는 누가 가장 악역인지, 인간의 본성까지 꼼꼼히 짚어봤다며 새로운 해석을 들려주었다. 타이틀 롤인 리골레토 역의 바리톤 마르코 카리아는 공작의 그늘에 숨어 사악한 면을 보여주던 궁정광대 리골레토가 딸과 함께 있을 때면 한없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이중성을 표현하려했다고 얘기했다. 출연진들의 깊이 있는 해석은 프로그램 북에 인터뷰 형식으로 잘 실려져있다.

오페라 <리골레토> 공연사진
객석에서 공연을 함께했던 음악평론가 정춘식은 음악적인 부분에서 바리톤(리골레토)과 소프라노(질다)의 연주가 특히 돋보였다고 평가했다. 바리톤은 풍부한 성량을 아낌없이 보여주었고, 연극배우 못지않은 연기력까지 겸비했다고 하였으며, 소프라노는 강질의 뻗어나가는 소리를 갖고 관객에게 직선으로 감동을 전달했다고 호평했다. 여기에 하나 더해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관객의 수준이었으며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였다고 했다. 오페라를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훌륭한 관객의 태도에 감명 받았다는 그는, 오페라도시 대구의 이름에 걸맞은 공연이었다고 말을 맺었다. 공연의 성패를 가르는 다양한 요소 가운데는 분명 관객의 몫도 함께 있다.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우수한 작품들을 거듭 선보임으로써 관객의 수준도 함께 끌어올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알고 보면 더욱 멋진 오페라의 세계’로 들어온 관객들이다. 그리고 이번 공연을 통해 명작 <리골레토>가 주는 다양한 메시지를 양일 합쳐서 2천 수백 명에 이르는 관객들 역시 저마다의 해석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깊은 감동과 함께.

대구오페라하우스는 이렇게 성공적인 공연으로 2020년 새해를 열었다. 하지만 2월 들어 코로나바이러스19가 전국을 강타하고, 특히 우리 지역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침으로써 우리 극장도 3월과 4월 공연을 취소하거나 연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루빨리 사태가 수습되고, 극장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며 나아가 더 좋은 공연들을 무대에 올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