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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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 – 작고 예술인
박록주
– 영남판소리의 출발점에 서 있는 거목
정정미 / 영남판소리보존회 이사장
<삼대 여류 명창대회.
금수강산이 낳은 삼대 여류 명창회.
가곡계의 우이(牛耳)를 잡는 박월정(朴月庭), 박록주(朴綠珠), 김초향(金楚香).

조선음률협회 후원회 주최와 본사 개성지국 후원 하에 24일 오후 7시부터 부내 서목정(西木町) 개성좌(開城座)에서 박월정, 박록주, 김초향 3인 공연을 개최하는데 당일 상연할 곡목은 조선재래유명가곡 20여 종이다. 이 조선여류명창대회는 개성 초유의 공연을 각 방면으로 인기를 집중하고 있으므로 성황을 예상한다.>

1931년 9월 24일 자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이다. 이 날 개성 공연장에서 세 여류명창은 분명 관객의 큰 박수갈채를 받았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국악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나라 잃은 설움에 우리 고유문화에 대한 애정이 더해졌을 테니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나.
이 무렵 명창들은 전국 각지를 다니며 판소리를 했는데 그 중 인기가 높았던 사람이 바로 박록주였다.
요즘 판소리 하면 호남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일제시대 때는 달랐다. 1920년대부터 20여년간 영남은 판소리의 고장이었다. 박녹주는 영남 출신의 선배 김추월(金秋月:1896∼1933), 김록주(金綠珠:1897∼1932), 이화중선(李花中仙:1898∼1943), 김초향(金楚香:1900∼1983), 권금주(權錦珠:1903∼1971) 그리고 후배였던 이소향(李素 香:1905∼1989), 신금홍(申錦紅:1906∼1942), 신숙(愼淑:1916∼1982), 오비취(吳 翡翠:1918∼1982), 임소향(林素香), 박귀희(朴貴嬉:1921∼1993), 박초향(朴楚香:1 923∼1964) 등과 함께 달구벌을 판소리의 중심지로 만든 주역이었다.
박록주는 1905년 1월 25일 경북 선산군 고아면 관심리 437에서 부친 박중근, 모친 권순이 슬하 3남 1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본명은 명이(命伊), 아호는 춘미(春眉), 예명은 녹주(錄珠)이다. 부친은 가장으로서 집안은 돌보지 않고 술과 노름을 즐기던 한량으로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때문에 박록주는 어린 시절부터 모친을 도와 농사일은 물론이고 허드렛일까지 하며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12살 때인 1916년 전국을 돌며 판소리, 춤 등을 공연하던 협률사라는 예술단체가 선산에 와서 공연을 했는데 부친이 다녀와서는 박록주에게 대뜸 판소리 공부를 권했다. 부친은 평소 딸의 목소리가 힘이 있고 우렁차서 소리를 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박록주는 부친의 손에 이끌려 당시 명창으로 소문난 박기홍한테 소리를 배우게 된다. 부친은 딸에게 명창이 되라는 뜻으로 녹주(錄珠)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었다.
소리공부는 뜻밖에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박록주까지 네 명의 제자들은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하주 종일 목청을 높여가며 소리를 배웠다. 박기홍은 소리 할 때의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사소한 부분도 매우 엄하게 가르쳤다. 더구나 소리의 내용인 사설은 대부분 한문 투로 되어 있어서 외우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끼니 때마다 소리공부에 좋다는 참기름을 몇 숟가락씩 따라 먹었지만 밤낮없는 연습으로 목에서는 피가 넘어오기 일쑤였다. 공부가 힘들고 벅찼지만 어린 마음에도 박록주는 차츰 판소리가 몸속으로 들어와 조금씩이나마나 자리를 잡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힘겨운 하루하루가 지나는 사이 하나씩 제자들이 떠나고 어느 날 박록주만 달랑 남게 되었다. 박기홍은 박록주만을 상대로 공부를 시킬 수가 없어 집으로 돌려보낸다.
의기소침해져 돌아온 박록주에게 소리를 시킨 부친은 반색을 하며 장차 명창이 될 거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는 마을사람들에게 무슨 경사스런 일이 생기면 박록주를 데리고 가서 소리를 하게 했다. ‘새끼 명창’이라는 별명까지 붙게 되면서 박록주는 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곳곳을 다녔다.
14살 되던 1918년 김창환에게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를 배우면서 박록주는 나름대로 판소리의 깊음과 높음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한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박록주제 제비노정기는 소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흥보가의 백미이다.
1921년 원산에서 열린 명창대회는 17살 박록주를 한 단계 상승시킨 전기였다. 소녀답지 않은 힘차고 맑은 성량은 차츰 박록주에게서 새끼명창이라는 별칭을 사라지게 한다. 1923년 송만갑에게서 춘향가, 적벽가, 3년 뒤 김창환에게서 흥보가, 적벽가를 배운 22살의 박록주는 마침내 처음으로 음반을 녹음했다. 1929년부터 2년 사이 콜럼비아 레코드, 오케이 레코드, 빅타 레코드 등 여러 음반회사에서 음반을 녹음했을 만큼 인기가 날로 치솟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듯 겉으로는 화려한 명성이 따라다녔지만 속으로는 말 못할 괴로움이 박록주를 옥죄고 있었다.
1929년 3월의 어느 날 송만갑의 수제자인 김정문에게 흥보가를 배우고 돌아온 뒤였다. 금전에만 골몰하며 자신을 난처하게 만드는 부친에 대한 원망 등 여러 가지 고민을 하다 박록주는 극단적인 생각으로 많은 양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한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이 사건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사랑만큼 불가해하고 예측불허의 테마도 없을 것이다. 사랑은 연관된 사람들을 황홀경에 빠지게 하거나 폭풍우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하며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박록주에게도 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돌풍이 몰아쳐 한동안 불안과 고통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했다.

1928년 봄 서울에서 명창대회에 참가하는 등 몹시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박록주에게 한 젊은이가 행사장으로 찾아왔다. 소설을 쓰던 김유정이었다. 박록주를 만나자마자 사랑의 열병을 앓기 시작한 이 소설가는 요즘 말로 스토커가 되어 박록주를 괴롭혔다. 박록주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김유정이 귀찮고 나중에는 두렵기까지 했다. 그도그럴것이 행사를 앞두고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 바쁜 때인데도 불쑥 나타나 아예 앞을 가로막고 협박까지 한 것이다.

<김유정이 나를 부른 칭호도 금새 달라져 갔다. 처음에 ‘선생’이라고 하더니 ‘당신’이라고 변했고 나중에는 ‘너’라고 자기 부인을 칭하듯이 불렀다. 하루는 인력거를 타고 돌아오는데 검은 그림자가 인력거를 향해 돌진해 왔다. 직감적으로 김유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인력거꾼에게 정거하지 말고 빨리 앞으로 달려가라고 소리쳤다. 김유정은 번쩍이는 뭔가를 손에 들고 있었다. ‘칼이다’ 하는 생각이 들자 온몸이 오싹해졌다. 인력거꾼은 재빠르게 앞으로 달려갔으나 김유정이 더 빨랐다. 그는 인력거채를 움켜잡고 나에게 소리쳤다. “녹주, 오늘 밤은 너를 죽이지 않으마. 안심하고 내려라.” 그가 들고 있던 것은 하얀 몽둥이었다. 그는 자기 얼굴을 내 얼굴 가까이 들이대더니 불 뿜는 듯한 눈초리로 노려보면서 물었다. “너는 혹 내가 돈이 없는 학생이기 때문에 나를 피하는 거지?” 나로서는 너무나 의외의 질문이었다. 잘못 대답하면 내가 돈에 의해 좌우되는 천한 여자가 될 것만 같았다.>
박록주가 한국일보에 연재한 ‘나의 이력서’에서
2년 여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하던 김유정은 1930년 여름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내려간다. 그리고 폐결핵과 늑막염으로 숨진 1937년 봄까지 아이들을 가르치며 30여 편의 단편소설을 썼다. 이 가운데‘생의 반려’와 ‘두꺼비’는 박록주와의 일방적 관계를 소재삼은 것이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김유정의 짝사랑은 이렇듯 문학의 형태로 남아 있다.
김유정문학촌 박록주내용
송만갑, 이동백 등과 함께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를 결성, 창극공연을 기획한 박록주는 1935년부터 4년 간 동양극장에서 공연된 창극 ‘춘향가’에서 주인공 춘향 역을 맡아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
1948년에 여성국악동호회를 창립한 박록주는 6.25 전쟁 중 일선 군인들을 위문하러 다니다 오른쪽 눈을 다쳐 이후부터 색안경을 썼다.
박록주는 1965년 김여란, 김연수, 김소희, 정광수, 박초월과 함께 ‘춘향가’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된다. 또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대상이 판소리 다섯마당으로 늘어나면서 ‘흥보가’의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박녹주명창 판소리공연모습
제자들이 모여 1966년 연 발표회는 박록주를 몹시 기쁘게 했다. 1969년 10월 15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가진 은퇴공연 뒤에도 판소리보존연구회를 만들어 제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김소희, 한애순, 박귀희, 성우향, 조상현, 박초선, 성창순, 이옥천, 한농선, 박송희, 정성숙, 조순애, 정의진 등이 박록주의 제자로 이름을 올렸고,
박녹주에게 흥보가를 사사한 김소희가 대구의 이명희에게 흥보가를 사사하며 영남판소리의 맥을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다.
박록주 제자 김소희
좌) 박녹주 김소희로부터 사사받은 이명희 명창, 당시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명창부 장원 (경상도 출신 최초)
우) 생전 각별했던 사제지간 김소희와 이명희
<젊어 청춘 좋은 그때 엊그젠 줄 알았더니, 오늘 보니 늙었구나. 검던 머리 희어지고 곱던 형용 변하야 우주가관 들었으니, 웬수야, 웬수가 따로 없고 백발이 웬수로구나...>
1978년 병든 몸으로 고향 선산으로 내려온 박록주는 고별 무대에서 단가 백발가를 불렀다. 굴곡 심했던 자신의 삶을 그대로 노래하듯 하자 객석은 온통 울음바다였다.

이듬해 1979년 5월26일, 75세의 박록주는 서울 면목동 변두리의 한 단칸 셋방에서 격동과 영욕의 세월을 뒤로 하고 쓸쓸히 이승의 삶을 마감한다. 양아들로 맞아들인 조상현이 임종을 지켰다.
구미시 선산읍 노상리 마을회관 앞 놀이터에는 장구와 북을 깔고 앉은 박록주의 기념비가 있다. 1981년에 세워진 이 기념비 앞에서 제자들은 기일인 5월 26일이 돌아오면 판소리한마당을 펼친다.

박록주여사 기념비
또한 구미문화연구회 등이 주축이 된 추모 사업회는 대구 이명희 명창과 함께 2001년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명창 ‘박록주전국국악대전’을 개최해 오고 있다.

영남판소리의 출발점에 서 있는 명창 박록주, 그리고 그의 제자 국창 김소희,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이명희 명창 그들은 곁에 없지만 영남판소리보존회가 당대 명창들의 예술적 정신이 담겨있는 유지를 받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