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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 – 기고 #해외교류사업
우크라이나와 함께한 나의 빌둥스로망
정성태 / 사진가, 예술단체 꾸다쿠카 대표
빌둥스로망(Bildungsroman), 소설에서 주인공의 정신적·정서적 성장을 다룬 것으로 주인공이 사건을 겪은 다음, 세계관에 변화가 일어나는 이야기 구조. 보통은 결말에서 시야가 커지고 인내를 배우며 뜻을 세울 수 있게 되는 보다 성숙한 인격을 갖게 되는데 예를 들어 독일 낭만주의를 열었던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Wilhelm Meisters Lehrjahre)’를 통해 작가로서 자기형성 과정을 성장소설의 형태로 보여준다.
1. 우크라이나, 나를 만나다
나는 어릴 적부터 비 맞는 것을 좋아했다. 주변의 어른들과 선생님은 혹시 모를 우려와 염려 속에 비와 마주하는 나만의 방법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그 이후, 나는 더는 비를 직접 맞지 않았다. 1986년으로 기억된다. 이때가 체르노빌 사고 즈음인가 보다. 이렇게 우크라이나와 나의 첫 만남은 시작되었다.
시간이 지나 박사공부를 마친 후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면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의 시간이 쓰나미처럼 다가왔다. 그때 즈음, 나는 ‘나’를 떠나 인류가 떠안은 강제 이주와 정주의 상흔은 무얼까 – 캄보디아 킬링필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와 주민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등 – 살피게 되는데 우크라이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전까지 체르노빌 사고는 구소련의 어느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으로만 인식하였을 뿐, 체르노빌이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경계 부근에 있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어렸을 때 나에게 생경한 추억을 남겼던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나는 그 장소를 찾아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나는 우크라이나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이후 2013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우크라이나는 체르노빌 사진 작업을 위해 방문했고 촬영과 전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의식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게 우크라이나 문화예술계와 고려인 분들을 만나게 되고 교분이 쌓이면서 서서히 서로에 대한 우정과 관심은 한국과 우크라이나 양국 간의 문화예술 교류로 이어지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출입제한구역의 붉은 숲(Red Forest)
Chernobyl_F16_0304, archival pigment print, 80x120cm, 2015
2. 다름과 차이, 예술로 연결하다
1992년 즈음 한 편의 한국 영화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는 이 영화를 친구와 함께 마음 졸이며 봤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칠성시장에서 칠성교를 지나다 보면 좌측 언저리 두 편 동시 상영관으로 기억된다. 「명자 아끼꼬 쏘냐」…
세 가지 이름만큼 세 나라 국적을 가져야만 했던 한 기구한 여인의 운명을 다룬 이장호 감독의 작품인데 당시 내가 받은 반향은 컸다. 소외된 사할린 억류 동포(고려인)들의 애환뿐만 아니라 같은 듯 다른 세 나라 정치와 문화에 대해 그런 환경의 차이에 대해 더욱 인정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쿠카 2018_Exposure 개막식, 우크라이나 키예프 Art Platform AkT
한국과 우크라이나 현대예술전(이하 쿠카: KUCA)은 마치 우리에겐 당연한 성탄절을 두고 우크라이나는 1월 7일에 쇠고 일본에는 크리스마스 공휴일이 없는 것처럼 각 나라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름과 차이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첫 쿠카1)는 쿠카위원회를 중심으로 사진예술단체 꾸다쿠카(ggooda kuca)2)에 의해 2018년 6월 14일부터 7월 22일까지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Kyiv), 예술공간 AkT에서 열렸다. 115명의 한국과 우크라이나 예술가들의 작품 400점이 전시장을 메웠다.
앨리스(Alice Yakubovych)와 나는 이 전시의 주제를 노출(Exposure)로 결정했고 무언가와 접촉하기 위해 노출되는 상태, 그 순간 우리가 서로에게 가지는 심리적 영향과 반응에 초점을 맞추었다.
사실 본다는 것과 행한다는 것은 별개의 것인데 맥락은 동일하다. 한 몸에서 나왔지만, 지향점이 다른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다름이 아니다. 쿠카KUCA 2018에 참여한 한국 작가는 30명, 그 스펙트럼은 다양했다. 이제 막 작가의 길에 들어선 분이나 중견작가들도 함께 이 전시에 작품을 보탰다. 작품의 소재나 표현개념도 다르다. 그러나 이 모든 작업의 한결같은 지향점은 나를 드러내는 과정(Exposure)일 것은 분명했다. 나는 여기에 이 전시의 방점을 두고자 했다.
Art Platform AkT의 전시 방문객과 전시장, KUCA 2018_EXPOSURE
3. 맹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두 번째 쿠카는 2019년 8월 2일부터 25일까지 우크라이나 오데사(Odessa), 오데사동서양미술관(Odessa Museum of Western and Eastern Art)에서 맹점(Blind Spot)이란 주제로 열었다.
맹점(Blind Spot)은 자동차의 옆 거울처럼 가까이 두고도 알아보지 못할 때가 있고 생각이 못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점이나 틈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눈으로 보이는 게 전부라는 착각에서 깨어날 때 맹점은 드러나는데 보거나 볼 수 없거나 하는 행위나 논쟁보다는 사진이 담고 있는 내용이나 교감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KUCA 2019_Blind Spot이 열렸던 오데사동서양미술관 전경과 스탭들
전시는 한국과 우크라이나 작가 19명의 작품 58점이 미술관의 한 부분을 채웠는데 함께 기획한 카트리나(Kateryna Radchenko)는 오데사포토데이스페스티벌(Odesa Photo Days Festival)의 디렉터로 이미 유럽 사진계에 알려진 이름이었다. 카트리나와 나는 2017년 키예프 세르벤코아트센터(Shcherbenko Art Centre)에서 가진 「우크라이나 고려사람」 전시에서 만났고 그녀는 나의 사진 작업에 대해 평문을 기고했다. 그런 연으로 우리는 우크라이나 항구도시 오데사에서 「KUCA 2019_Blind Spot」으로 함께 움직였다.
오데사동서양미술관과 꾸다쿠카의 양해각서 체결식 / 한국외대 우크라이나 학과 10주년 기념 사진전
4. 쿠카 2020, 유라시아를 꿈꾸다
전시는 이미 도시와 대륙을 하나로 묶어 소통을 위한 플랫폼을 만드는 보편적인 미디어 이벤트임이 틀림없다. 모든 종류의 이야기, 주제와 부제는 시각 매체를 통해 표현되고 다른 국가와 문화, 전통에 대해 더 많이 배울 기회에 노출된다.
예술단체 꾸다쿠카는 2015년부터 신진작가들과 함께 다양한 전시를 만들어 왔고 지난 2018년부터 매년 한국과 우크라이나 공공외교 및 문화예술계와 협력하여 사진, 회화, 미디어 등의 동시대 예술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꾸다쿠카는 양국 예술단체 간의 잘 꿰어진 협업으로 2020년 5월 우크라이나 드네프로, 드네프로미술관(Dnipropetrovsk Art Museum)에서 ‘한국-우크라이나 현대예술전 KUCA 2020’을 개최할 예정이다. 장차 우크라이나와 함께 다양한 전시회, 레지던시 및 교류 프로그램을 단초로 유라시아(Eurasia) 문화예술과 교류하는 당찬 꿈을 꿔 본다.3)
동성시장예술프로젝트 예술단체 꾸다쿠카 스튜디오와 쿠카 2019_Blind Spot 아카이브
한국과 우크라이나 현대예술전(KUCA 2018 –EXPOSURE)
  • 1) 쿠카(KUCA)는 한국과 우크라이나 현대예술전(Korea and Ukraine Contemporary Art Exhibition)의 약자이다. 2018년 6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 위치한 Art Platform AkT에서 열린 한국과 우크라이나 현대예술전(KUCA 2018 – Expouse)을 시작으로 2019년 우크라이나 오데사동서양미술관(KUCA 2019 – Blind Spot) 등 국내외 다자간 전시 및 문화예술 교류와 이를 통한 신진작가 발굴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쿠카는 우크라이나 전시와 연계하여 대구 순회 전시도 함께 이어가고 있다.
  • 2) 꾸다쿠카(GGOODA KUCA)는 (꿈)꾸다 + 쿠카(KUCA)의 합성어로 쿠카를 비롯한 국내외 전시기획과 출판, 신진예술가 발굴 등을 목적으로 2018년부터 대구광역시 수성구 동성예술프로젝트 입주단체로 활동 중인 비영리 문화예술단체이다.
  • 3) 이를테면, 이 글은 매우 주관적인 관점에서 다루었다. 아직 쿠카(KUCA)는 진화 중이며 앞으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 기회를 통해 좀 더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과 우크라이나 간의 문화예술 교류가 일어나길 기대한다. 유라시아에 포함되는 우크라이나와 같은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많은 나라(CIS)에는 까레이츠(корейцы)라 불리는 고려사람, 우리 한민족의 거친 숨과 외침이 서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