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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 – 릴레이기고 #1
불충분한 재현
-을 벗어나 새로운 균형 만들기
이승희 / 예술가
– 이미지는 말할 수 있는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표면들은 모두 시각화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이미지로 지배되었다고 말하는 기 드보르의『스펙타클의 사회』(1967)는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이다. 수많은 이미지의 노출 속에서 우리의 일상이 보이고, 보여주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이미지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손쉬운 재현과 복제는 이미지 자체에 전례 없는 힘을 실어주고 있다. 우리는 이미지의 사회 속에서 수없이 많은 이미지에 소비되고 이는 결국 이미지가 경험을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등과 같은 한 방향 매체에서부터 컴퓨터와 같은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쌍방향 디지털매체까지 이미지의 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범위와 확장성일 뿐만이 아니라 예술의 많은 부분이 이미지에 기인하듯 시각 예술에는 이미지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의 담론 속에서 예술가들은 단순한 재현의 반복을 넘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 기고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는 아마 스스로에 대해 재고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 기고를 요청받았을 즈음 스스로에게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이는 어느 평론가와의 대화 말미에 받은 한 가지의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아직 길지 않은 작업 활동 기간이지만 그중에 작업의 방향성을 제시해 준 작업이 있을까요?”였다.

<Untitled (192/218) 중앙로역 앞 야외설치 2014>
삶은 죽어서까지도 이분법적이다. 사후에 개인의 존재는 남은 이들을 통해 대변된다. 그럼 만약 떠나간 그들을 대변해 줄 이가 없는 이의 이생의 삶은 어떠했을까? – 작가 노트 중
Untitled(192/218)은 나에게 나 자신과 사회의 관계 그리고 예술가로서 사회적 역할에 대해 큰 물음을 준 작업이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러하겠지만 보통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작품을 만들어 간다. 여기서 나라는 존재는 하나의 중간 가교 역할로, 경험에서 나로 그리고 작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다양한 삶의 경험을 통해 이 다리는 계속해서 길어지고 그곳을 거쳐 간 수많은 이야기들은 그 다리를 지나는 과정에서 작업이 되기도 하고 마지막 그 다리를 건너지 못하기도 한다.
내 생각은 아무런 힘이 없는데, 내 작업은 힘이 있다.
수잔 손탁은『타인의 고통』에서 ‘우리’, 즉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라고 표현했다. 이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거나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 사고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단순한 재현(묘사)은 희생자, 피해자에 대해서도 또한 유가족들에게도 또 다른 아픔을 상기시키는 일이 될 수 있기에 다양한 각도에서의 관철과 물음이 필요하다. 그 어떠한 연유에 의해서라도 표현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Untitled(192/218)의 작업을 시작하기 전 나의 이해는 감히 그들의 아픔의 깊이를 이해할 수 없기에, 단순히 과거의 아픔을 재현할 수도 그렇다고 행동하고 투쟁하는 유가족들의 현재를 나타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업은 사회가 가져야 하는 다양성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Untitled(192/218)의 작업은 CMCP-Collective Power Collective Memory의 대구지하철 참사 11주기를 추모하기 위한 전시에 참여한 작업으로 이는 192명의 희생자 중 6인의 무연고 자에 대한 이야기로 사후에 누구도 이들을 대변해주지 않았던, 아니 할 수 없었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Untitled(Ordinary Days) 2017> 수성아트피아 전시 광경 2018 사진 조영하
예기치 못한 사건 사고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가…
예기치 못하게 마주하게 되는 이별 속에서 어쩌면 희생자 가족들의 아픔과 슬픔이 희생자들과 함께 했던 그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지극히도 평범했던 보통의 날들을 잃어버리게 된 게 아닐까  – 작가 노트 중
시간이 지나면 국화꽃은 시든다. 그러나 기억은 시들지 않는다. 타인에게는 국화꽃이 시드는 시간만큼의 지나가는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당사자에게는 흐려지고 짙어지고를 반복하는 기억이자 아픔인 것이다. 천칭의 형태로 구성된 이 작업은 한쪽에 있는 국화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들어가고 그로 인하여 영상을 비추고 있는 쪽이 점점 더 가벼워짐으로써 초점이 흐려져 더 이상 선명한 영상을 마주할 수 없게 된다. 이는 특정한 사고에서 영감을 받았으나 그러한 이미지의 차용이 아닌 약 5년간 찍은 한 개인의 홈 비디오를 통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상의 모습을 통해 말하고자 했다. 재현의 모습은 국화꽃에게 일임하고서…
소외된 것들에 대한 관심은
결국 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내 작업에 근간이 되어온 것들은 항상 일상에 편재해 있었다. 비극적인 사건, 사고들은 끊임없는 이미지의 반복을 통해 당사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공동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게 되는 경우가 있다. 미디어를 통한 끊임없는 반복적 재현은 나에게도 이러한 것을 표현하고자 할 때 많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 긴 시간의 물음을 통해 나는 죽음 이후에도 대변 받지 못하는 소외된 자들에 대한 목소리가 필요하다 생각했고, 또한 인간의 힘이 무력한 사건 사고 앞에서 우리가 어떠한 마음으로 남은 이들과 함께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고자 했다. 재현(Representation)을 위한 재현(Reappearance)은 남겨 두기로 하고 말이다.
베고니아 1993년 4월 29일 엄마의 다이어리(L), 내가 기억하는 베고니아의 추억(R) 2013
대부분의 것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졌다.
<Untitled(Handmade Paper) 일회용 커피컵으로 만든 종이에 흑연 2015-2019>
생각해보면 이러한 시선은 종종 가치의 문제에도 다다랐는데, 왜라는 의문에서 출발한 이러한 문제들을 예술이라는 시각적 형상으로 표현하게 될 때, 이를테면 종이컵과 같은 일상의 오브제는 액체를 담는 용기로써 하나의 컵 속에 주체가 담겨 있을 때의 그 가치와 그 가치가 다하였을 때 온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즉 무언가를 위한 용도로서의 가치 의미를 가졌다가 그 효용성을 다하고 나서는 의미를 쉽게 상실하게 되어버리게 되는 것과 같이 상대적으로 그 가치가 낮거나 용도의 의미를 상실했을 때 그 가치가 쉽게 다시 부여되지 않는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들에 집중했다. 한때는 중심에 있었으나 더 이상 그렇지 않은 것들, 이는 비단 종이컵과 같은 물질만은 아니다. 너무 익숙해져서 그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게 된 것들이나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힌 것들과 같이 사회 속에 존재하는 것들은 단일한 의미로 읽어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내 시선이 머문 것들은 항상 재현(Representation)을 위한 재현(Reappearance)이 아닌 그것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필요로 했다. 예술이 무엇인가는 시대마다, 예술가나 비평가, 철학자 그리고 관람객들마다 조금씩 다르게 정의 되어왔다. 동시대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예술이 곧 우리의 삶이라는 사실, 내가 사는 현실에서 주제를 찾고, 내가 사용하는 미디엄(매체)으로 그것을 구현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했을 때 예술은 적어도 다양성이 존재해야 한다. 사회는 어쩌면 내가 기운 노력에 비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되돌려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내가 가진 희망은 예술이라는 것에 빗대어 끊임없이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 내고자 함이다. 내일도 내가 가진 생각보다 내가 만들어 낼 작업들이 더 힘 있는 날들이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파랑새는 있다 / 그의 빨간 가방 2019
누구에게나 가슴속에 파랑새 한 마리쯤은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 그가 꿈꾼 세상이 오긴 한 걸까?
-작가 노트 중-
자신의 삶과 예술을 통해 깨어 있는 시민을 염원했고 실천했던 이를 기리는 작업(누구에게나 파랑새는 있다)으로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