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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 – 아카이브
장석수(1921~76)선생의 삶과 작품 활동
김영동 / 미술평론가
유년시절

그림 장석수, 자화상, 종이에 펜, 32.3×25.7cm, 1950년
장석수(張錫洙/石水)선생은 1921년 5월 24일 경북 영일군 지행면 양포동 471번지에서 부친 장병규씨와 모친 박노동 여사 사이 4남 5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양포는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는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속하는데 동해안 구룡포에서 감포 방향을 향해 내려가다 국도변 중간 즈음에 위치하고 있다. 비교적 곧게 내려오던 해안선이 양포에 이르러 안으로 만곡하면서 내해를 형성해 백사장이 유난히 아름다운 조용한 바닷가 마을이다. 어업과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이 마을에서 장석수 선생의 부친은 천석꾼 소리를 들었다. 지주 집안의 막내아들로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장석수 선생은 형들과 함께 장기초등학교를 다녔으며 상급학교 진학을 포함한 일본유학의 교육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어릴 때 어느 날 동무와 둘이서 마을 앞 바닷가에 있는 빈 배에 올라가 놀다가 잠시 잠든 사이 배가 해안에서 멀리 바다 가운데로 떠밀려 나온 것을 알고 공포에 질려 혼났던 경험을 수필로 쓴 적이 있다. 양포 바닷가 고향의 풍광에 대한 아름답고 환상적인 기억을 성인이 된 후에도 여러 차례 글이나 작품을 통해서 추억하곤 했다.
학창시절
“1935년에 장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교남학교(현 대륜중학교)로 진학했으나 2년 만에 자퇴하고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東山中학교로 편입하여 1940년 3월 17일에 졸업하였다. 그가 교토에 있는 동산중학교를 택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둘째 형(와세다 대학에서 영문학 전공한 장기동 전 영남대 교수)과 맏형(주오대 법학부)이 모두 일본 유학을 했다. 그의 동산중 동창회 명부(1975년 작성)를 보면 32명이 기록되어 있어 대구 경북에서 그 학교로 유학 간 학생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1) 중학교를 졸업한 후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쿄 우에노에 있던 태평양미술학교의 유화과에 1940년 4월 1일 입학한다.
1942년 6월 유화과 3학년 재학 중에 「자화상」(30호, 유화)을 제21회 조선미전2)에 출품해서 입선을 했다. 1943년 9월 4학년 재학 중에 「두건」(30호, 유화)이 전국결전미술전람회에서 특선했다.3) 그리고 같은 해 10월 제32회 태평양화회에서 특선했다. 장석수 선생은 자신의 또 다른 이력서에서는 “1943년 10월 31일 일본 도쿄(東京) 우에노 太平洋미술학교 유화과 제3학년을 졸업”했다고 적고 있는데 4학년 졸업이 아닌지 기록에 혼선이 있어 보인다. 귀국 후 고향에서 그림을 그리며 지내는 한편 1944년 5월부터 1945년 8월 20일까지 1여 년간 지행면 서기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아 그만 두었다.
좌) 장석수의 중학생시절 부친과 두 형들과 함께. 바로 옆 둘째 형 장기동(양정고를 거쳐 와세다대에서 영문학 전공, 뒤에 영남대 교수), 그 다음 맏형 장도수(주오대 법학부를 나와 10여 년간 경북도청에 근무하다 해방 전인 1944년에 귀향), 사진의 배경과 정확한 시점은 미확인.
우) 교토의 동산중학교 전경. (장석수 선생이 소장하던 사진)
태평양미술학교 시절
해방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

좌) 1946년 1월 신부 權晩連과의 혼례식장 기념촬영,
우) 1945년 3월 신명여고를 졸업한 權晩連 여사의 재학시절 모습.
해방 이듬해 1946년 1월1일부로 대구여중 미술교사로 부임하면서 신명여고를 졸업(1945년 3월)한 權晩連과 혼례를 올렸다. 1949년 9월부터는 대륜중학교에서 1950년 8월 말까지 근무했다.
대륜중학교에 재직 중이던 1949년 10월에 개최된 제1회 국전에 작품 「신생」(50호, 유화)을 출품 입선했다. 이후 사대부고 강사를 거쳐 1952년부터 대구 제3중학교에서 1954년 4월까지 근무했다
제3중(경상중학교)에는 전선택 선생이 후임으로 오고 장석수 선생은 같은 해 6월부터 신명여고로 옮겨 이듬해 1955년에 첫 개인전을 4월 4일부터 9일까지 대구 미국문화관(USIS) 화랑에서 개최했다.
작품 「남매」 외 27점의 유화를 전시했는데 팸플릿 출품 목록에는 제목과 캔버스 호수가 기록되어 있고 최해룡의 서문을 실었다.
서문에서 최해룡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며 오직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려고 묵묵히 계속하여 오든 성실의 화우”로 작가를 소개하고 있다. 장석수 선생은 이 전시가 끝나자 연이어 서울 이동전을 가졌다. 4월 24일에서 30일까지 제2회 개인전으로 서울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최된 이 전시에는 대구 전시에 출품한 작품을 위주로 신작을 몇 점 더 포함해서 「가족」 외 30점을 출품했는데 팸플릿에 화가 도상봉이 전시서문을 썼다. “일찍이 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태평양화회에 「老農夫」 출품을 위시하여 선전입선을 거쳐 제1회 국전에 작품 「新生」을 출품했던 작가”라고 소개하고 있다.
대구매일신문에서는 두 전시를 준비 중에 있는 작가를 작업실 겸인 신명학교 미술실로 찾아가 인터뷰한 기사를 1955년 4월 3일자 4면에 싣고 있다. 기자는 작가의 풍모를 세잔을 연상시킨다고 비유하면서 “제작태도는 한결같이 물체에 파고들어가려는 진격성을 잊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작품에는 리얼리티에의 추구가 충만한 가운데무언지 새로운 방향으로빠져나가려는 몸부림이 그의 독특한 색조 속에 담겨 있는듯하다”고 썼다.
같은 해 6월 대한미술협회 창립 10주년 기념 제7회 전람회에 「산야의 목동」과 「학살」 두 점을 초대 출품했고 또한 10월에는 제4회 국전에서 「예술가의 가족들」(100호, 유화)로 입선했다.
좌) 제1회 개인전, 1955.4,4-9, 미국문화원(USIS), 우) 제1회 개인전 팸플릿 내지, 4288.4.4. 최해룡 서문.
좌) 제2회 개인전. 1955.4, 동화백화점, 서울, 우) 1955.4. 제2회 개인전 팸플릿(내지), 동화백화점, 서울. 1955.4.24.-30. 도상봉 서문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
1956년 2월 장석수 선생은 대구현대미술가협회 창립에 참여하면서 「풍경」과 「蓮」을 출품했다. 동회는 11월에 다시 두 번째 전시회를 열었는데 「에츄드」A, B, C 3점을 출품했다. 1957년 제3회 대구미협전에는 소품들 「雙」,「島」,「천」,「刻」 등을 출품했다.

좌) 장석수, 射程, 1958년 제2회 현대작가미술전(조선일보사 주최) 출품., 우) 제2회 현대작가미술전, 조선일보사 주최.
장석수 선생은 1958년 5월까지 재직하던 신명여고를 마지막으로 10여 년간의 중등학교 미술교사직을 끝내고 대학 강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1958년 4월 1일부로 대구대학(영남대 전신) 강사가 된 뒤 조선일보사 주최 제2회 현대작가미술전에 「射程」(40호), 「凍軀」(30호)를 초대 출품했는데 이전 작품에서 급격하게 양식적 전환이 일어났다. 이들 비구상, 비정형 추상회화들은 화면에서 예술가의 정신성이나 내면의 무의식을 이끌어 내는 수단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이 사용한 자동기술법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캔버스를 전면적으로 사용하면서 물감을 뿌리는 방법을 채택한 것에서나 두터운 질료를 느끼게 하는 점에서는 잭슨 폴록의 드리핑 기법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이후로도 계속 조선일보현대미술전에 초대됐는데 1959년 제3회전에 「異質」(30호), 「斷絶」(40호)을 출품했고 1960년 제4회에 「작품5」(100호) 출품까지 이어갔다.
장석수 선생은 1960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했다. 1962년 문교부 교육대학 교수 자격고시에 합격해 대구교대 강사를 역임하고 1963년 대구대(현 영남대)병설여자초급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1966년 7월에 거의 10년 만에 경북공보관 화랑에서 제3회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에 100호 이상의 유화를 모두 18점을 출품했다.

장석수, 1966년 7월 제3회 개인전 팸플릿
앵포르멜 미술 이후 1970년대
장석수 선생은 1968년 2월 예총 경북지부 부지부장을 맡았다. 1969년부터는 영남대 문리대 회화과 교수로 신분이 바뀌면서 1970년 1월 학교를 상징하는 벽화제작에 착수 3개월여 만에 완성한다. 구 대구대학 중앙도서관 회랑(로비)에 게시되는 이 벽화는 3m×4m의 크기로 창학이념을 담아 화랑정신을 젊음 속에 부각시킨다는 내용으로 구상적인 양식이었다.

장석수, 파이프 集, 캔버스에 유화, 1971.
이 벽화에서 그동안 1960년대 중반까지 열정적으로 제작하던 앵포르멜 미술과 추상표현주의 계열의 작품에서 형상적 요소가 회복된 새로운 화풍으로의 전환을 보여주었다.
1966년 제3회 개인전 이래 4년 동안의 오랜 모색기간을 거친 이후 새로운 구상적인 요소의 실험적인 작품을 전개하면서 1972년 24점의 유화를 가지고 제5회 개인전을 대구백화점 전시장에서 열었다. 그리고 한 해 건너서 1974년 제6회 개인전을 서울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개최하면서 새로운 방향의 모색과 함께 의욕적으로 몰두해오던 비대상회화 대신 신구상 혹은 신표현 계통의 작풍으로 완전히 전환했다. 그리고 1974년 9월에 개최된 제1회 경북도전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1976년 2월 신입생 입학사정을 막 끝내고 평소 앓던 두통을 치료차 내원하여 검진한 결과 뇌종양 진단을 받고 곧 바로 입원해서 수술을 받았으나 3개월여 투병에도 불구하고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셨다. 새로운 방향을 추구하며 다음 전시준비에 의욕에 차있던 중 56세를 일기로 타계하신 것이다. 선생은 슬하에 육남매를 두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엄수되었고 유택은 대구현대공원에 모셔졌다.
作故 이후의 기록들

장석수의 1965년작 앵포르멜 작품들, 2009년 대구근대미술전에 출품됐었다.
장석수 선생의 삶의 궤적과 유작들에 대한 연구는 1985년 권영호(전 경남대 교수)의 영남대 대학원 석사논문이 있다. 그리고 2002년 대구 아트 엑스포 행사의 특별전에서 선생의 작품세계가 처음 기획 전시로 조명되었다. 작고 후 첫 전시에서 100호 이상의 앵포르멜 작품들이 대거 출품돼 깊은 인상을 주었다. 바로 이듬해 2003년에 대구문화예술회관의 지역작가 발굴 기획전으로 다시 장석수 선생의 회고전을 개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9년에 큰 규모로 열린 대구근대미술전에서도 그의 선구적인 작품들과 진취적인 조형의식이 미술사적으로 높게 평가된 바 있다.

장석수, 1966년 7월 제3회 개인전 팸플릿
장석수선생의 작업실이기도 했던 삼덕동 가정집은 선생이 해방 이듬해 대구로 이주 정착할 때부터 살았던 주택인데, 일제강점기인 1942년 대구서 관리로 지냈던 일본인 건축주가 지은 집으로서 현재까지 그대로 보존돼 있다. 해방이 되고 선생의 집안에서 구입해준 이곳에서 4남 2녀를 기르고 1976년까지 일생을 보냈다. 지금은 둘째 아들 장상기, 강은숙 내외가 관리하고 있다.
330㎡(100여 평) 규모의 집이 현재는 많이 낡아서 일부 헤진 부분도 있으나 전체 구조나 창호 및 문살, 마루 등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일본 전통 가옥과 신양식이 혼합된 1940년대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선생이 사용했던 책과 서가 및 물품들 특히 화가가 즐겨 사용하던 파이프, 붓 등이 생전 작가의 체취를 간직한 채 진열장에 보관되고 있어 역사 속에 잠든 한 시대 작가의 예술혼을 느끼게 한다.
장석수 선생 삼덕동 고택 외관
  • 1)교토 동산중학교 동창회-경북 동문회 회원 명단, 1975.3.25., 유족소장.
  • 2)본인이 작성한 어떤 ‘화력’에는 제23회로 오기한 기록도 보임.
  • 3)1966년 12월 14일자로 작성된 ‘연구실적요지서’에 본인이 기록한 사실. 전국결전미술전람회는 1943년 총독부 주관으로 개최되었다. 제22회 조선미전과 동일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