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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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 – 인터뷰
역동적인 실험가, 화가 장석수
인터뷰이 : 정은기 / 조각가
인터뷰어, 정리 : 이예슬 / 계명문화대 강사
“겉으로 보면 날씬한데 대단한 통뼈라 힘이 엄청났어. 젊은 사람이랑 팔씨름을 해도 다 이기고 그랬어. 나는 감히 하자고도 못했지. 그만큼 힘이 있던 사람이었어.”

1950~1970년대 대구·경북 화단에서 추상화의 기반을 다지고 이끌어갔다고 평가되는 故 장석수 선생(1921~1976)에 관하여, 그의 동료였던 정은기 선생이 말한 내용 중 일부이다. 정은기 선생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본인은 그 당시 예술계의 사정과 더불어 고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좀 더 면밀히 들을 수 있었다.

Q. 안녕하세요. 선생님은 어떻게 장석수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정은기 : 처음 그분을 만난 건 1965년도였다. 66년도에 그분이 대구미술협회 회장에 당선되고 내가 그분 밑에서 사무국장으로 2년 동안 일했다. 장석수 선생이 1962년도에 대구대학의 부설이었던 여자 초급대학에 미술과를 만들었는데 내가 67년도에 그곳의 교수로 있었다. 그 이후 1969년도에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이 합쳐지면서 영남대를 발족했고, 그때 함께 영남대 가정대학에 응용미술과가 생겼다. 그러면서 1965년부터 10년 동안 그분과 같이하는 일이 잦았기에 우리는 자연스레 친해졌다. 그분은 말수가 없어 무뚝뚝해 보였지만, 정이 있는지라 술을 마시면 삼덕동에 있는 자신의 집에 곧잘 데려가곤 했다. 그래서 사모님께 밥도 많이 얻어먹었다.
故장석수 선생과 정은기 선생 (제공: 정은기 선생)
Q. 1950~60년대 앵포르멜 운동이 일어나며, 대구 경북화단은 추상계열과 구상계열이 상호경쟁하며 지배했습니다. 장석수 선생님은 추상화 화단을 이끈 작가로 평가받는데, 그 당시 현장에서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정은기 : 지금이야 구상과 추상이 상호 경쟁했다고 말하지만, 그 당시엔 구상회화를 하는 사람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추상계열은 취급도 못 받았다. 심지어 장석수 선생을 포함해 정점식, 서석규, 이영륭, 유병수 등 인원도 많지 않았다. 그들 중 내가 생각했을 때 추상화를 제대로 한 사람은 계명대의 정점식 선생과 영남대의 장석수 선생이다. 장석수 선생은 앵포르멜 추상을 열정적으로 했다. 특히 1965~67년에 선생은 화폭을 크게 써서 대형작업을 했는데, 그 당시에는 그렇게 큰 작품을 하는 화가가 거의 없었다. 전쟁 이후라서 지금처럼 캔버스를 만들어주는 시스템도 없었고, 유화 물감을 살만한 형편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인은 큰 합판에 남대문시장에서 파는 미군 부대에서 나온 천막을 사다가 붙이거나 그냥 합판 위에 페인트를 사용해 무아지경으로 작업을 하곤 했다.
Q. 1972년에 창립한 신조회는 3월 1일에 대구에서 창립하였으며 당시 회원은 정점식, 서석규, 박광호, 정인화 작가들이 있고 여기에 고인도 참여했었습니다.1) 신조회의 활동과 그 안에서 장석수 선생님은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요?
정은기 : 나에게도 신조회에 들어오라고 했지만, 조각을 했기 때문에 들어가지 않았다. 장석수 선생도 신조회를 창립하고 몇 년 후 뇌종양으로 갑작스레 타계하셨기 때문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 대신 대구미술협회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1년에 두 번 전람회를 했고, 영남대 교수미전을 했다. 그 전람회들에서도 대부분은 구상회화였지만, 장석수 선생은 주로 추상화를 출품했다.
Q. 장석수 선생님의 작품 중 무엇이 가장 흥미를 일으켰는지, 작품 제작 에피소드가 있다면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정은기 : 그의 다양한 시도가 나에게 자극이 된 경우가 많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장석수 선생의 작업실에서 대형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을 지켜보았을 때다. 그분은 더운 여름날에는 팬티만 입고 벽에 기대어 놓거나 바닥에 펼쳐놓은 합판에 페인트 통을 들고 역동적으로 움직이거나, 주걱 같은 것으로 확확 긁는 에너지 넘치는 작업을 했다. 완전히 중노동이었다. 그만큼 작품에 적극적이었고 실험적인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장석수 선생의 앵포르멜 회화 대표작 「1965, 패널에 유채」(출처: 대구신문)
Q. 장석수 선생님은 1946년부터 대구여중을 시작으로 대륜중, 경북대 사대부고, 경상중 등을 거쳐 1960년 신명여고를 끝으로 교사직을 마칠 때까지 교단과 화단 활동을 병행하셨습니다.2) 교육자로서 장석수 선생님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정은기 : 고등학교의 교사로 있을 때는 예술이 다른 과목에 비해서 규범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할 수 있도록 격려했다. 그래서 인기가 참 많았다. 내가 알기로, 선생의 형제들도 다 교육자다. 정확하진 않지만, 큰 형이 포항 장기면 근처에서 초등학교 교장까지 하셨고, 둘째 형이 대구대학에서 영문과 교수로 있었다. 셋째가 장선생이고, 그 밑에 여동생들도 포항 등지에서 교사로 일했다고 들었다.
선생과 나는 대학에서 응용미술과와 회화과를 개설할 때, 좀 더 좋은 커리큘럼을 만들기 위해서 서울대와 홍익대, 그리고 일본과 미국같은 해외 대학 사례도 함께 조사했다.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잡으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서울대랑 홍익대보다 훨씬 자유로운 과목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조혜연 선생, 설기화 선생을 비롯한 훌륭한 제자들을 양성할 수 있었다.
Q. 화가로서, 교육자로서 모습 이외에 인간적인 면모에서 장석수 선생님은 어땠는지요?
정은기 : 내가 70년도에 결혼을 하려고 할 때 나에게 해준 조언이 감동적이었다. 장석수 선생은 다섯 자식의 태를 본인이 다 끊었다고 했다. 그때는 산부인과가 없어서 산파가 아이를 받아줬는데 첫째 아이를 낳을 당시에 산파가 오지 못했다. 당황스럽고 겁이 나는 상황이었지만 장석수 선생이 책에서 아이를 받는 법을 읽고, 직접 물 끓이고, 가위를 소독하고 해서 안 잘리는 탯줄을 억지로 잘랐다고 한다. 그 이후의 출산도 그분이 옆에서 도왔다. 두 분이 그만큼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장석수 선생이 갑작스레 타계하셨을 때 사모님이 굉장히 슬퍼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참 감동을 받았다. 내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 나는 그렇게까진 못했지만 꼭 산부인과에 같이 가고 그랬다. 장석수 선생은 아무나 못하는 독특한 일도 해내곤 했다.
Q. 삼덕동에 장석수 선생님이 사셨던 집이 아직 있습니다. 부인과 자녀 등 유가족분들의 대외 활동은 있는지요?
정은기 : 사모님은 살림을 하시는 분이었고, 둘째 아들 장상기가 영남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그가 장석수 선생의 작품과 주택을 관리하며 부친의 미술세계를 정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Q. 장석수 선생님의 주택에 가보셨다 하셨는데, 거긴 어떠했는지요?
정은기 : 그 집은 일본식 가옥이다.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집안 어른이 해준 것 같은데 옛날에 그 정도 살면 참 부잣집이다. 장석수 선생은 포항시 장기면의 전통 있는 인동 장 씨의 가문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삼덕동 주택 근처의 안 가본 골목을 다니는 취미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다니는 것을 참 즐기신 것 같다.
故장석수 선생의 주택 (출처: 대구일보)
Q. 장석수 선생님에 대한 조명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흡한 점이 있을까요?
정은기 : 평론가들은 그를 앵포르멜을 대표하는 화가로 규정짓곤 하지만 장석수 선생은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조각에도 관심이 있어 하기에 조각가인 내가 몇 가지 조각 도구를 드리기도 했다. 그때 두 점의 조각을 만들었고 개인전에서 쓰이기도 했다. 1968년도쯤에는 예쁜 소품도 완성했다. 동물들과 신화적인 요소가 나오는 섹슈얼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영남전문대 도서관 입구의 큰 벽화도 의뢰 받았었다. 선생은 거기에 그리스 철학에 나오는 아테네 학당처럼 자기 자신이 공부한 여러 가지 철학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원래 데생 실력이 좋은 분이었기 때문에 추상화뿐만 아니라 구상화도 참 잘하셨다. 앵포르멜 회화로 대대적인 개인전을 했기 때문에 모두에게 그 기억이 강하게 남은 듯하지만, 그 외의 작품들도 함께 연구된다면 좋겠다.
Q. 마지막으로 장석수 선생님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은 있으신가요?
정은기 : 장석수 선생이 좀 더 오래 사셨다면 점정식 선생과 함께 우리나라 추상미술에서 상당한 위치에 오르셨을 거다. 내가 경험해보니 교수직을 퇴임하고 작품 활동을 할 때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온다. 예를 들어 박서보 선생의 예가 그렇지 않나. 정년퇴임 후 교수로만 머무는 것보다 현역으로 작품 활동을 해야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그 좋은 기회를 가지지 못한 게 안타깝다. 만약 오래 사셨다면 더 대단한 작품을 탄생시켰을 분이다.
인터뷰 자리에서 정은기 선생
  • 1)이형옥, 「한국미술단체들」, 『모아진』, 2011. 07월호, 26쪽.
  • 2)대구일보, 「<29> 추상 회화의 선구자 장석수」, 2018. 2. 12, (접속일:2019. 12. 16)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