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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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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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 – 캐리커처 에세이
화가 장석수의 삶과 예술
서영옥 / 미술학 박사
김승윤 / 캐리커처
‘딩동!’ 하고 초인종이 울린다. 심부름 온 조교가 누른 벨소리다. 교수의 집을 찾아온 조교는 그의 급우와 동행했다. 교수는 동행한 급우를 보고도 조교만 집안으로 들인 뒤 매몰차게 대문을 닫아버린다. 함께 온 제자는 문전박대를 당한 것이다. 교수가 평소에 작업이나 학업에 불성실한 학생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제자가 50년 전의 기억 속에서 건져 올린 일화가 스승의 성품을 짐작하게 한다. 제자는 스승을 직설적인 사람으로 기억했다.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도 한다. 주인공은 바로 故장석수(張石水, 1921~1976) 선생(이하 장석수)이다.

장석수는 대구에서 추상미술의 기반을 다지고 이끌어온 화가로 자리매김한다. 1946년 대구여중 미술교사로 부임한 이래 몇몇 중·고등학교를 거처 1963년 대구대학 초대 응용미술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작고하기 전까지 영남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한 교육자이기도 하다.

제자는 스승인 장석수를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겸비한 리더라기보다는 예술적 성향이 짙은 화가’라고 추억했다. 80대의 또 다른 제자는 장석수를 ‘사회적 메카니즘에 발맞추어 묘를 부리지 않았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미술계의 여러 후배들이 장석수를 그리며 풀어 놓은 여담에도 그는 비슷한 부류의 사람으로 묘사된다. 언변은 뛰어나지 않았으며 우직했다. 세상과 타협할 줄 몰랐고 시류에 편승하지 않았다. 과묵했고 올곧았다. 자기주장이 강했으며 외골수였다는 것이 공통된 시각이다. 인간 장석수는 권모술수를 모르는 순수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추가된다.

한편의 에피소드가 그 사람의 일대기를 모두 비추어 줄 수는 없다. 그가 추구한 예술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선명한 단초도 아니다. 그러나 희미하게나마 성품은 가늠할 수 있다. 화가에게 체화된 성품은 그의 예술세계를 추측할만한 단서로써 용이하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동시대를 함께 호흡했던 후배·제자들에게 장석수의 삶에 대한 담소나 다름없는 인터뷰를 요청한 이유이다.

장석수의 연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35년 장기국민학교를 졸업한 장석수는 같은 해에 대구 교남학교(嶠南學校)를 자퇴(현 대륜중)한 뒤 일본으로 건너간다. 교토(京都) 동산중(東山中)을 졸업(1940년)한다. 이러한 이력은 장석수가 일찍이 일본에서 서구에서 유입된 미술교육을 받은 작가라는 단서를 제공한다. 1943년에 일본 태평양미술학교 유화과를 졸업한 그는 귀국 후 3년 뒤(1946년, 25세) 대구여중 교사로 부임한다. 이어 대륜중학교와 사대부고, 경상중을 거쳐 신명여중고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1958년부터 대구대학에서 출강을 시작하였고 1963년부터 영남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생을 마감한 시기는 1976년에 뇌종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지 3개월 만이다.

1921년 경북 영일군 장기면에서 출생한 장석수의 유년기는 유복했다. 형제자매가 모두 고학력자인 것을 보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교육열 또한 높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장석수가 생업과 직결되지 않는 미술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도 윤택한 가정형편과 부모님의 후원이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장성한 후 가정을 꾸린 장석수의 가족은 단란했다. 부부 금술 또한 좋았다는 후문이다. 28세가 되던 해(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작품 <신생>으로 입선을 하고 1960년(39세)에 경북문화상 수상과 1965년 예총 경북지부 미술협회장을 역임한 이력 외에도 미술계가 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대구에서 추상미술의 기틀을 마련하고 성장에 일조했을 뿐 아니라 후학양성의 요람인 학교에 재직했다는 점일 것이다.

당시 장석수가 재직했던 영남대학교에서 4년 간 조교 직을 수행한 제자는 장석수가 학교 연구실에서도 1000호가 넘는 대작을 제작하곤 했다고 증언한다. 70년대 초 당시 천장이 무척 높았던 연구실에서 작업한 <천지창조>라는 제목의 그림은 구상계열의 작품이다. 조교가 집을 방문했을 땐 학교에서는 볼 수 없던 다수의 비구상계열의 작품이 즐비했다고 한다. 장석수는 두 가지 유형의 그림을 동시에 진행했던 것이다. 짐작하건대 새로운 미술에 눈을 뜬 화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적인 시도는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더불어 언술로 가르친 스승이라기보다 실천으로 보여준 교육자였다.

교육자 장석수는 한국의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시기에 화업의 발자취를 남긴 화가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근대화가 싹트기 시작한 시기는 일제강점기와 맞물린다. 1900년대 초에 시작된 일제강점기는 한국의 근대문화형성에 영향을 끼친다. 엄밀히 말하면 한국의 근대는 일제의 억압과 말살 속에서 진행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자력에 의한 성취가 어려웠던 이 시기에 애국심과 국권회복에 대한 염원으로 뭉친 단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1907년 서상돈과 김광제가 앞장선 ‘국채보상운동’과 이상정, 이여성, 김용준 등에 의한 서양화단의 구성을 비롯한 1930년에 결성된 향토회(鄕土會)가 같은 맥락의 단체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국 내에 일본문화의 유입이 강제로 허락된 시기였던 만큼 미술계에서도 일련의 불안감이 조성됐다. 전통미의식에 대한 위축이 그것이다. 1921년 장석수가 태어날 무렵에 결성된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조선미전, 1922~1944, 총 23회 개최)는 당시 위기감에 봉착한 미술인들에게 하나의 자극이 되었다. 장석수는 조선미술전람회가 결성 된지 20년 되던 해인 1942년(21세)에 입선을 한다. 조선미술전람회가 해체되기 2년 전이며 그가 일본 태평양미술학교 유화과를 졸업(1943년)하기 1년 전이다. 시기적으로 볼 때 장석수는 일제강점기를 고스란히 거치며 성장을 한 셈이다. 1921년에 태어났고 1935년에 국민학교를 졸업한 그가 본격적으로 미술 활동을 하기 시작한 때는 1943년 일본 태평양미술학교 유화과를 졸업한 이후부터로 상정된다. 당시 그는 25세였고 곧바로 중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기에 왕성하게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고 보긴 어렵다.

해방이후 50년대 한국에는 텔레비전처럼 빠른 시각적 정보전달 매체가 없었다. 1970년대만 해도 서울에서 대구까지 새로운 정보가 전달되는 데는 2~3년이 소요됐다. 분단의 아픔을 떠안은 동시대인들은 격변의 시대에 고스란히 노출됐고 수순처럼 그림에도 양식의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 서양화라는 새로운 장르가 자리 잡은 지는 이미 오래전이다. 1921년 이상정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926년 박명조에 이어 1927년과 1928년 서동진의 개인전이 열린 대구에서 ‘서양화’라는 새로운 장르가 본격적으로 대두한 시기는 1925년이기 때문이다.

초창기 서양화에서는 전통수묵화의 잔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기법에 약간의 원근법과 명암법을 덧댄 것 같은 이여성의 <격구도>나 <사계산수도> 같은 그림이 그렇다. 이러한 토양에서 성장한 2세대 서양화가들은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격변하는 시대와 마주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화가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장석수이다. 장석수가 시도한 일련의 실험 작들도 이러한 시대적인 토양에서 발아된 것이다. 그는 이전 시대의 업적들을 능가하는 비전을 의욕적으로 제시했다. 당시 추상의 시도는 맹물에 색을 부어 다른 색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변혁에 비견된다. 당시 추상과 구상은 뚜렷한 경계선을 긋기보다 서로 맞물려 함께 흘러왔다고 할 수 있다.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위해 노력한 장석수의 추상은 세계를 보는 시선이 한 차원 높은 데 있다. “이런 선배들이 있었기에 후배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장석수의 제자 정종해의 말이다.

인생에서 55세는 정신적 성숙기에 해당된다. 작가에게는 작업양이 늘어나고 작업의 질은 더욱 숙성되며 작품 활동 또한 왕성할 시기이다. 장석수는 향년 55세를 일기로 별세를 했다. 더욱 무르익었을 노년기의 작품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을 남기는 대목이다. 개인전이 총 6회에 그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장석수는 격변의 한국근대기를 거치며 치열하게 예술을 고민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인 작가이다. 그의 투박한 언행과 그림이 일치하는 지점이다. 특히 화업 말년에 자유자재한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했던 그는 표현의 자유를 획득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작가다. 격변하던 시대가 토해낸 삶의 질곡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그것을 걸러내어 새로운 미술을 추구하려했던 작가 장석수. 미술계가 그를 주목하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