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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 – 릴레이기고#2
쉼표와 마침표 사이
김민지 / 작가
– 우리의 삶은 ‘나는’으로 시작해 수많은 쉼표를 찍고, 결국은 마침표를 찍는다.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의 삶도, 묵묵히 전진하는 사람의 삶도, 짐승보다 못한 죄를 지은 사람의 삶도 언젠가는 끝이 난다. 내 삶이 일초 후에, 일분 후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 순간에도 그 믿음을 가진 누군가의 순간은 완결된다. 어쩌면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모두가 한 발을 관속에 넣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깊이는 중요치 않다. 그런 절대 진리를 깨닫는 건 나이의 비례하지 않고, 나는 운 좋게 일찍이 삶에 와닿았다.
그때부터였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한 것이. 단순하게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어린 날의 호기로움이었다. 그런데 이젠 이 일을 생각했던 것보다 좋아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이 시점에서 얼마 전에 본 드라마의 대사가 생각난다.
‘나는 택배 받는 것도 너무 좋아하고, 식당에서 메뉴판 보는 것도
너무너무 좋아하는데,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이 일을 좋아해요.’
일을 택배 받는 것보다 좋아한다니! 그런 사람이 이 도시에 몇 명이나 될까? 그중 한 명이 나라는 게, 그런 어른으로 자라고 있다는 게 으쓱해진다.
Acrylic on paper_ 210x140cm_2016
마침표를 향해 가는 시간은 떨어지는 물을 멈출 수 없듯, 같은 속도로 흐르고 있고 그 위에 놓인 우리와 만물은 매 순간 경계를 지난다. 나는 그 시간을 ‘다시 보기’할 수 없음을 알기에 관찰하고 기록한다. 그렇다면 매 순간이라고 불리는 것들 중에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것을 수집하려 하는 욕구는 어디에 근원을 두는 것일까?
나는 필립 블룸이 말하는 “추억과 영구성을 요새처럼” 쌓아 올리는 ‘수집가’가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순간은 덧없고 기록은 영원할 테니까.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지각하며 살아가고 그로 인해 자취를 남기고자 하는 욕구가 존재한다. 작가로서 이러한 욕구를 그림이라는 매체로 기록한다. 별다르게 특별한 것을 보는 것도 아니고 굴곡진 인생을 겪는 것도 아닌지라, 누구나 살아가며 마주하는 것들을 옮기는 것이 자칫 평범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그때’, ‘존재’하며 ‘바라본’시간과 시점인 것이다.
–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5년 동안 대구에서 작가로 활동했지만, 그 시간 중에 언제가 제일 기억에 남느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2년 전 봄이라 말할 수 있다. 대구문화재단의 <해외레지던시 파견사업>에 선정되어 중국 항주에서 3개월간 머물렀다. 돌이켜보자면 힘든 점도 있었지만, 하나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졸업 후 운이 좋게 바로 전시를 하고, 그 다음 해엔 <대구예술발전소>에서 일 년 동안 입주작가로 활동하며 쉼표 없이 시간에 떠밀려 살았었다. 불안감을 느낄 새도 없이 일을 했고, 내 작업에 대해 한 발짝 물러서 바라볼 여유조차 없었다. 내가 떠 있는 곳이 바다인지 강인지 욕조인지도 모르게 물 위를 표류하는 나날을 보냈다. 나는 그 시점에 쉼표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쉼표 다음의 단어는 긍정어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정원에서 보낸 시간 시리즈> Oil on paper_각 32x24cm_2017
그 확신은 사실이 되었다. 항주에서는 이유 모를 평화로움을 얻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걷고 구경하고 다녔는데도 남은 하루가 ‘자 이제 뭘 하실 건가요?’라며 재촉했다. 다른 날은 가만히 스튜디오 창가에 앉아 건물들 사이에 보이는 선명한 산들을 바라보며, 시계를 보지 않아도 노을이 지고 어둑해지는 풍경으로 저녁때가 됨을 알 수 있었던 날도 있었다. 남들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감각의 화살표가 밖으로 그려져 있던 나는, 보아야 할 전시들과 읽어야 할 책들이 없는 곳에서 화살표를 내 안으로 돌려두고 살았다. 그러자 주변의 사물들과 풍경들이 달리 보였다. 도시는 큰 정원처럼 보였고, 그 속의 사사로운 것들을 카메라로 찍기 시작했다. 산책을 하는 내내 이 도시에 머물 시간이 남아있음에도 애틋했다. 지나가지 않은 시간조차도. 생각이 그 끝에 닿은 후 그곳을 그림으로 옮겨갔다.
그 해 봄은 주변에 널린 녹색에서 위안을 받았고, 낯설지만 익숙한 풍경 속 시간들은 해소될 수 없는 그리움으로 오래 남아있다. 그 시간은 ‘작가’로서의 ‘나’를 크게 성장시켜주었고, 대상을 바라보는 눈의 시각이 아닌 마음을, 태도를 어렴풋이나마 경험한 귀한 계절이었다.
– 숨을 참고
의도치 않게 작업을 시작한 후 주기적으로 작업환경이 변했다. 대명동 작업실에서 <대구예술발전소>로 그다음은 중국 그리고 2018년엔 <가창창작스튜디오>. 405번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달리다 보면 버스 정류장 이름이 마을 이름인 곳이 나오기 시작한다. ㅇㅇ역,ㅇㅇ학교건너 같은 것이 아닌, ‘송정마을’, ‘샛터마을 입구’같은 단어가 들린다. 그리고 ‘삼산리’종점에 내려 조금 걷다 보면 약간은 빛바랜 주황색 건물이 보인다. 창문에 ‘컴퓨터실’이라고 적힌 2층 교실이 내 스튜디오였다.
가창에 입주하기 몇 달 전 개인적인 일들로 인해 마음이 지쳐있었다. 그와 더불어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을 기록하고자 하는 욕구는 더 커졌고, 그것은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애착으로 변했다.
작은 새는 찰나의 비행에 쓰러지고, 재가 되어 올라가지 못한 것들은 얼룩으로 남았다.
거대한 자연도 한 손에 담기는 작은 새도 마지막 순간이 지나고 나면 온도가 달라진다.
사라지는 순간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슬픔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작업노트 2018. 05. 17
<소멸-점>전시전경 in 가창창작스튜디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마침표를 찍는다는 절대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보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소멸되는 순간의 이미지를 신문에서 수집하고 때로는 변형하기도 하며 화면 속 조형적인 것들에 집중하는 작업을 했다. 길가에 죽은 새의 흔적부터 먼 나라의 산불과 내전까지, 이런 물질적 소멸을 수집하고 시각적 유사성으로 묶어낸 후 <소멸-점>이라 명명한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로 쉼표를 찍고 나니 작업을 통해 남기고 싶은 것, 붓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2018 오픈스튜디오
– 셔터를 누르고
지금 이 글을 타이핑하고 있는 손가락엔 세 개의 반지가 있고, 가방엔 6장을 더 찍을 수 있는 필름 카메라가 있다. 어디선가 반지와 사진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반지와 사진은 시간 속에 모든 것이 변하고 결국 소멸한다는 것을 알면서
그것을 인정할 수 없는 인간의 안간힘이다.
반지는 변하지 않는 물체를 통해 사진은 고정된 그림자를 통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놓치고 싶지 않은 한순간을 건져올린다.”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안규철, 워크룸프레스
<착지하는 반지를 위한 습작2>부분 Colored pencil on paper_2019
안간힘을 쓰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인 것 같다. 새로운 약속을 하며 반지를 끼고, 흘러가는 것을 붙잡고자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일생이라는 산책길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를 가치 있는 것을 대면하고, 결정을 내리고 피사체를 프레임에 고립시킨다. 찰나의 순간에 고립된 이미지를 오랜 시간 마주하고 어떤 규칙과 언어로 번역할지 판단이 내려지면 작업을 시작한다. 같은 규칙을 적용하더라도 놀이의 결과는 매번 다르다. 표면적으로 도출되는 화면을 더 나은 화면으로 만들기 위해 붓을 움직인다. 모든 붓질에 정답을 담을 순 없어도 고민을 담으려 애썼다. 이번 여름은 그런 고민과 씨름을 하다 보니 어느새 끝자락에 도착했다.
– 마침표
이 글의 마침표를 찍는 요즘 날씨는, 여름을 왼손에 잡고 가을을 오른손에 잡고 양쪽에서 쭉 늘어뜨린 그 사이의 계절 같다. 여름 같기도 가을 같기도, 애매한 이 계절도 곧 지날 것이다. 그 후엔 은행잎이 떨어지고 야단법석하게 자기 색의 목소리를 내는 단풍도 고요해지면 어김없이 눈이 내릴 것이다. 나는 다가올 계절 속에 서서 올해도 무사히 가을에, 겨울에 도달했다는 안도를 느끼며 그 순간들을 옮길 것이다.
이번 계절에도, 다가올 계절에도 함께해 줄 귀한 이들에게 감사함을 전하며.
<여름 언저리> 20x20cm_Colored pencil on paper_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