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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 – 아카이브
희곡 작가 소암 김영보(蘇岩 金泳俌)
김동소 / 대구가톨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1. 출생과 어린 시절
나의 아버님 소암 김영보(蘇岩 金泳俌)는 1900년(대한 광무 4년) 1월 28일 당시 경상남도 부산에서 아버지 김윤혁(金胤奕, 족보 이름 鍾岦)과 어머니 이씨(본관 전주)의 5남 3녀 중 3남으로 출생하였다. 우리 집안은 순천(順天) 김씨 절재공(節齋公, 김종서[金宗瑞]) 파 후손으로, 집안에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1453년 수양대군의 난(계유사화[癸酉士禍])으로 김종서 장군과 그 다섯 아들들, 손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할 때에, 절재공의 둘째 아들 승벽(承璧)의 장남인 중남(仲男)이 피신하여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고, 개성(開城)에서 피신 생활을 하며 일가를 이루어, 이후 속칭 순천 김씨 개성파(開城派)로 불리면서 19세기 말까지 세거(世居)해 왔다고 한다.
대대로 과거를 하다가 그 후손 정규(廷圭, 소암의 조부, 1818∼1897)에 이르러 인삼과 약용 작물을 재배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영서원 교사 및 졸업생들. 뒷줄 왼쪽 두 번째 서 있는 이가 김영보(1918.8)

일본 도쿄의 조선 여자 동포원(朝鮮女子同胞園)의 가족 사진(1926년 무렵).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구용업, 세 번째 서 있는 소녀가 장녀 김혜순. 맨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소암.
소암1)의 친아버지 윤혁(胤奕)은 소암을 낳기 전 가족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옮겨와 객주업(客主業)에 종사하였다고 하는데, 부산에서 소암을 낳고 얼마 후 이 아이를 개성에서 살고 있는 동생 종업(鍾嶪, 자(字)는 윤기[胤基])에게 양자로 보내게 되어, 결국 소암은 다시 조상들이 대대로 살던 개성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성장한다.

소암의 양아버지 종업은 고향에서 그 아버지의 생업인 인삼과 약용 식물 재배를 하고 있어서 경제적으로 그렇게 빈한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소암은 이 양부모 슬하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개성 최초의 신식 교육기관인 한영서원(韓英書院, Anglo-Korean School) 초등과ㆍ중등과ㆍ고등과를 다녀 9년의 전 과정을 수료한다. 이 학교에서 신식 학문과, 농업ㆍ재봉ㆍ상업ㆍ법률 등 실용적인 과목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소암은 이 무렵에 기독교에도 접하게 된 듯하다.

이렇게 관리 채용 시험에 합격했는데, 소암이 관계(官界)로 나가지 않은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초등과 재학 시절인 1911년(12세) 능성(綾城) 구씨(具氏) 용업(嫆業)과 결혼하고, 결혼한 지 7년 만인 1918년 11월에 장녀(구씨의 소생으로는 유일한 외동딸) 혜순(惠順)을 출산한다. 1940년 1월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창씨개명령에 따라 소암은 일본식 이름 다마미네 가즈오[玉峰和夫]로 개명하고 『매일신보』의 인사란 등에 소암의 이름은 이것으로 표기된다.

2. 희곡 작가 시절
한영서원 고등과를 졸업함으로써 소암은 정규적인 학업을 마치고 1921년 2월 개성학당 상업학교(開城學堂商業學校)의 교유(敎諭, 중등학교 교사를 말함)로 첫 직장을 갖는다. 이 학교는 당시 일본어와 한국어, 한국과 동양의 역사, 그리고 상업 관계의 학문을 가르치는 중등 교육기관이었다고 하는데, 소암은 여기서 한국 역사, 한국어 등을 가르친 것으로 짐작된다.
개성학당 상업학교 교유로 부임하기 전인 1920년 9월과 10월에 소암 최초의 창작 희곡 작품인 <시인의 가정>과 <정치삼매(情痴三昧)>(모두 전1막)를 완성한다. 다시 개성의 연극인들과 함께 연극 운동을 시작하면서 극작에 힘쓰게 되어, 1921년에는 한국 최초로 빅토르 위고의 희곡 <Angelo, Tyran de Padoue (파도바의 독재자 안젤로)>를 번안한 <구리 십자가>(전5막)와, 창작 희곡 <연(戀)의 물결>(전3막), 그리고 1922년 1월에 창작 희곡 <나의 세계로>(전2막)를 완성한다.
이 무렵 소암은 또 「새 문화 창조의 이상과 종교」라는 장편 논설을 잡지 「낙원(樂園)」 창간호(1921.6.20.)에 발표한다. 이 소암의 최초의 논설인 「새 문화 창조의 이상과 종교」(1921.3.21 작성)는, 당시 스물을 갓 넘긴 청년으로서 놀랍게도 해박한 세계 사상사의 자취를 훑어 나가고 있다. 이 논설에서 소암은 현대의 사상이 점차 ‘물질적으로 경주(傾注)’하고, 이미 있어 온 동서양의 종교가 모두 세속화하고 타락한 것을 개탄하고, 새로운 문화 창조의 이상(理想)을 실현하기 위해서 정신의 개조(改造)가 필요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사람을 떠나서 신(神)을 구하려 하지 말고’, ‘신의 자유와 불(佛)의 평화를 지상에 건설코자 하는’ 태도를 지닌 ‘신종교(新宗敎) 사상에 신순(信順)’하여 나아갈 것을 역설하고 있다.

소암이 1920년에서 1922년 초까지 완성한 희곡 다섯 편은 모두 1922년 출판된 한국 최초의 창작 희곡집인 「황야에서」2)에 수록되어 있다. 「황야에서」의 발행소(출판사)는 서울 관훈동에 있던 조선 도서 주식회사(朝鮮圖書株式會社)이다. 이 책은 앞서 말한 대로 장정가의 이름이 기재된 한국 최초의 단행본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제본과 인쇄 방식 등에서 완전한 양장의 형태를 보여준다. 앞표지에 제자(題字) 없이 벗은 여인의 뒷모습만을 중앙에 그려 넣었다. 두꺼운 표지의 정장본(精裝本)으로 홈모등3)이며, 실로 옆매기를 했다. 책등은 1.6cm 가량의 섭4)을 내어 흰 광목으로 감싸고 이곳에 저자명을 압인해, 전체적으로 깔끔한 느낌을 준다. 이와 같은 고급스러운 제본 방식은 양장 도서 초기에 주로 나타난다. 본문은 갱지에 인쇄했고 면주와 면 번호가 양 바깥쪽에 위치해 있으며, 목차가 없다. 작가가 조부에게 바치는 헌사와 판권란이 같은 문양의 장식괘로 꾸며져 전체적인 통일성을 지닌다.”5)

1) 「황야에서」 표지, 2) 「황야에서」 속표지, 3) 「황야에서 」비문(扉文), 4) 「황야에서」 판권란
1922년 11월에 김영보의 이름으로 소설 작품이 발표되었다. 「시사 평론(時事評論)」5) 제6호에 실린 ‘어떤 자의 선언’이라는 단편으로, 지금껏 그 작품이 전해지는 소암의 유일한 소설이다. 200자 원고지 90장 분량의 이 단편은, 어떤 목사가 다른 여자와의 사랑에 빠져 그의 정숙한 아내를 죽이기까지의 고뇌와 그 후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해 자살해 버리는 이야기를 그린 단순한 줄거리로, 당시 이런 제재의 소설이 많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상당히 파격적인 소설인 듯하다. 살인자인 남자 주인공이 왜 교회의 존경받는 목사로 설정되었는지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1923년 1월부터 9월까지 소암은 「시사평론」에 5회에 걸쳐 괴테의 소설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축약 번역본을 ‘웰텔의 비탄(悲歎)’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 이것도 한국 최초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대한 소개이다. 축약이라고는 하지만 전체의 분량은 200자 원고지 400장이 넘는, 비교적 방대한 양이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최초의 한국어 번역으로서 문예사적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1)『ᄭᅩᆺᄯᅡ운 선물』 표지, 2)『ᄭᅩᆺᄯᅡ운 선물』 뒤표지, 3) 『ᄭᅩᆺᄯᅡ운 선물』판권란
1924년 7월에 소암은 개성학당 상업학교로부터 경성(京城) 수송유치원(壽松幼稚園) 원감으로 직장을 옮긴다. 이 유치원에서의 소암의 생활에 관해서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다만 ‘丙寅晩春(병인 만춘)'(1926년 음력 3월)이라는 소암의 머리말 기록 날짜와, ‘前壽松幼稚園 園監 金泳俌 先生 編 (전 수송유치원 원감 김영보 선생 편)’이라는 편자 표시가 붙은 책 『作曲 附 童謠․童話集 (작곡 부 동요․동화집) ᄭᅩᆺᄯᅡ운 선물』이 1930년 4월 15일 삼광서림(三光書林)에서 출판된다.7)
이 책은 아마도 소암이 수송유치원에서 유치원 원아들에게 읽어 주거나 이야기하고 노래 불러주기 위해서 만든 책인 듯하다. 이 책이 한국 아동문학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직 전혀 연구되지 않았다.

수송유치원 원감 시절인 1925년 9월 14일 자 『동아일보』 2면에는 다음과 같이 극문회(劇文會) 창립 총회 기사가 실려 있다.8)

극문회 창립
연극문학과 무대예술을 연구코자
지난 팔일 오후 다섯 시에 시내에서 무대예술(舞臺藝術)을 연구하는 청년남녀 십여 인이 시내 수송동(壽松洞) 66번지 김영보(金泳俌) 씨 방에 모여서 극문회 창립총회(劇文會創立總會)를 열고 임시 좌장 심대섭(沈大燮)군 사회 하에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그 회의 목적은 연극계의 동지들이 결합하여 영리를 떠나서 순전히 연극문학(演劇文學)과 무대예술을 연구함에 있다 하며 1년에 4, 5차 공연(公演)도 하리라는데, 오는 10월 하순경에 제일회 시연(第一回試演)을 공개할 예정이라 하며, 동인(同人)과 간사의 성명은 아래와 같다더라.
고한승(高漢承), 김영보(金泳俌), 김영팔(金永八), 임남산(林南山), 이경손(李慶孫), 이승만(李承晩), 심대섭(沈大燮), 안석주(安碩柱), 최익선(崔善益), 최승일(崔承一). 간사:김영보, 심대섭.

소암이 수송유치원 재직 시절인 1925년에, 당시의 대표적인 문예 종합지인 『조선문단』(1925년 7월호)에 「失題錄(실제록)」이라는 수필을 발표한다. 6월 3일 자의 작성 날짜가 적힌 이 글은 ‘연애지상주의 선언’과 같은 성격으로, 연애의 아름다움과 아울러 연애의 숭고함을 주장하고 있다. “하늘의 별들이여, 힘껏 뛰어라. 땅 위의 꽃들이여, 힘껏 웃어라. 그리하여 붉은 피 뛰노는 젊은이의 사랑에 고조(高調)된 높고 굳센 노래를 축복하자.”라는 말로 끝내고 있는데, 이 글이 독자들에게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에 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이 수송유치원에는 불과 2년밖에 봉직하지 않고, 1926년 6월 소암은 일본 도쿄의 불교 조선협회(佛敎朝鮮協會) 주간 및 도쿄 조선 여자 동포원(朝鮮女子同胞園) 주간의 직책을 맡아 가족(부인 김용업과 딸 혜순)을 데리고 일본으로 간다. 조선 여자 동포원은 일본에 유학 온 조선 여학생 및 고학생(苦學生)의 기숙사였고, 이를 운영하는 기관이 불교 조선협회였다. 그 운영자들과 기숙 여학생들이 아마도 1926년 가을, 또는 겨울 어떤 때에 찍은 사진을 앞에 제시한 바 있다. 사진 속의 앞 줄 왼쪽에서 세 번, 네 번째 남녀가 이 동포원 원장 부부인 듯하고, 소암은 맨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 서 있다. 여자 동포원이라 했지만 남학생들도 8, 9명 있었던 듯하므로 사실은 남녀 학생들이 함께 기거하는 학숙(學塾)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듯하다. 이 기간 중에 소암은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치학과 전문부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9)

그런데 1926년 8월, 희곡 작가인 김우진(金祐鎭)과 가수 윤심덕(尹心悳)의 동반 자살 사건이 있었고, 1927년 5월에 이 조선 여자 동포원에 있던 여학생 3명이 동반 자살한 사건이 일어났다.10) 이 여학생들의 자살이 소암과 어떤 관계가 있었다는 말도 있는데,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해 소암은 경찰로부터 조사를 받았다고 전해진다.11)
김우진과 소암의 교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이들은 같은 시기의 극작가였고, 소암과 함께 만든 녹파회 및 극문회라는 연극 동인의 한 명이었던 고한승(高漢承)이 개성 출신이며, 또 그가 김우진과 사돈 관계임을 감안할 때, 소암과 김우진은 서로 잘 알고 있었다고 보아 틀림없을 것이다. 어쨌든 김우진의 자살 사건, 그리고 여자 동포원의 여학생들의 자살 사건은 소암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듯하고, 이후 소암은 연극계 및 문학계와 영원히 작별하고 귀국하여 신문 기자로 변신하게 된다.

3. 매일신보(每日申報) 시절
소암은 2년도 안 되는 일본 생활을 접고 귀국하여 1928년 3월부터 당시 총독부 기관지를 발행하는 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에 입사하여 『매일신보』 편집국에서 근무하게 된다.
매일신보 입사 후의 소암의 행적은 신문(『매일신보』)의 발령 및 인사 사항을 참고해 보면, 소암이 1928년 매일신보사에 입사한 후 기자를 거쳐 지방부장(1940.10), 오사카 지사장(1941.7), 『寫眞旬報(사진순보)』 주임(1942.11), 경북 지사장(1945.3) 등을 역임한 것을 알 수 있다.
매일신보사로 직장을 옮긴 이후 최초로 『매일신보』에 실린 소암의 글은 1929년 4월 13일 자의 ‘忙餘斷想(망여단상, 바쁜 중의 짧은 생각)’이란 짧은 수필이다.12) 이 글은 ‘名船長(명선장)’과 ‘到處淸風滿胸襟(도처 청풍 만흉금, 곳곳의 맑은 바람이 가슴에 가득하네)’라는 두 편의 글을 합해 놓은 것인데, 앞의 글은 위태한 상황에서 유능한 지도자가 꼭 필요함을 말하고 있고, 뒤의 글은 속되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가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말하고 있다. 이 수필에서 소암은 필자의 본명을 밝히지 않고 처음으로 ‘蘇巖(소암)’이란 호를 쓰고 있다. 소암이 정확히 언제부터, 그리고 왜 이 호를 썼는지 분명히 알 수 없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이것이 처음인 듯하다.13)

소암의 3가지 장서인
이후 1945년 8월 광복으로 인해 매일신보사가 폐쇄될 때까지 소암이 『매일신보』에 발표한 글은 전부 다섯 편인데, 이 다섯 편의 글은 모두 탐방기 또는 수행기 등과 같은 르포르타주로서, 길게는 7회, 짧게는 3회 연재된 것이다. 발표된 글의 제목과 발표 일자는 다음과 같다.

모범 농촌 순례 (1∼4) 1930.9.11∼14.
금강산 기행문-승원(僧院) 생활 보고 (1∼5) 1931.8.14∼18.
전국 누대(樓臺) 순례기-촉석루(矗石樓) 편 (1∼4) 1932.7.26∼29.
총독 수행기 (1∼7) 1932.11.6∼14.
연기(燕岐)의 공사장을 시찰하고 (1∼3) 1933.6.11∼17.

「모범 농촌 순례」는, 원래 강(姜)씨들의 양반촌으로 알려졌으나 후에 퇴락했다가 다시 중흥한, 함경남도 이원군 남면 수항리(利原郡南面壽巷里)를 방문해서 취재한 글이다. 당시 조선에서 가장 성공한 모범 시골 마을로 이렇게 발전된 이 수항리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1931년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5회에 걸쳐 게재되었던 「금강산 순례기-승원(僧院) 생활 보고」는, 신문사에서 기자를 금강산으로 파견하여 유람기를 쓰게 한 일종의 기행문이다. 이 역시 당시의 금강산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로 생각된다. 5회 연재될 때마다 다음과 같은 삽화가 들어있음이 특징적이다.
「전국 누대(樓臺) 순례기」는 신문사에서 저명한 문필가를 선정하여 전국의 유명한 누대를 찾아보고 기행문을 쓰게 한 것인데, 소암은 진주의 촉석루(矗石樓)를 맡아 4회 연재하였다. 촉석루와 진주에 얽힌 실화와 전설을 박진감 있게 서술한 풍물기로서 독자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리라 짐작된다.
1932년 11월 6일 자부터 14일 자까지 7회 연재한 「총독 수행기」는 당시 제6기 조선 총독이었던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931년 6월 17일부터 1936년 8월 5일까지 총독 재임)가 평안도 일대를 시찰할 때에,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파견 기자로 소암이 유일하게 동행하면서 취재한 것이다. 7일간 3천여 리를 함께 여행하면서, 관공서 방문기뿐 아니라 방문한 곳곳(신의주-의주-삭주-창성-벽동-초산-위원-강계-개천-안주-평양-강동-성천-양덕-곡산-신계-남천-평산)의 생활상과 지역 사정, 심지어는 그곳의 역사와 전설까지 모은 것으로 현재의 시각으로 볼 때 소중한 풍물기가 아닐 수 없다. 소암의 이러한 기록은 7회 전부 이 신문 제1면에 실려 있다. 동룡굴에서 총독 일행과 함께 찍은 사진 몇 장이 남아 있다. 소암은 총독 일행과 함께 7일간의 여행을 했으나, 총독의 동향에 관해 철저히 객관적인 서술만 할 뿐 조금도 총독이나 일본을 미화하거나 찬양하는 표현은 쓰지 않고 있다. 신문기사인 까닭도 있겠지만, 이런 귀중한 기회에 얼마든지 아부하는 말을 쓸 수도 있겠지만 그런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비록 몸은 총독부 기관지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일제에 대해 필요 이상의 접근을 하지 않으려는 소암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매일신보』에 실린 소암의 마지막 글은 1933년 6월 충남 연기군(燕岐郡) 남면(南面)의 사방공사(砂防工事) 현장을 시찰하고 3회에 걸쳐 쓴 「독산(禿山) 황야의 구주(救主), 사방공사(砂防工事)의 일모(一貌)-연기(燕岐)의 공사장을 시찰하고」(6월 11일 자에서 17일 자까지)이다. 전국의 사방공사가 시급한 시절이라, 이를 독려하기 위한 정책적인 글인 셈이다. 사방 사업이 시급히 필요한 전국 농토의 분포와 그 구체적 대책, 사방사업으로 인해 얻어지는 이익 등, 비교적 상세한 통계 수치를 제시해 가며 쓴, 아주 실제적인 문장이라 할 수 있다.

매일신보사 편집국 모습. 맨 오른쪽이 김영보. 1936년 무렵(당시 통신부장?)
1931년 3월 양아버지가 개성에서 별세하고, 1937년 9월에 부인 구용업이 별세하자, 이제 개성과의 연고가 아주 없어졌기 때문에 본적 및 주거지를 서울 체부정(體府町) 61번지로 이전한다. 외동딸인 혜순은 그 직전인 1937년 8월에 출가해서 서울에서 살고 있었고, 소암은 1938년 4월 한만천(韓萬千, 청주 한씨)과 재혼하여 숭인정(崇仁町) 72번지에서 생활하며 이곳에서 장남 동수(東秀, 1970년 사망)를 얻는다. 1940년 1월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창씨개명령에 따라 소암은 일본식 이름 다마미네 가즈오[玉峰和夫]로 개명하고 『매일신보』의 인사란 등에 소암의 이름은 이것으로 표기된다.
그러나 이후 광복까지 5년여 동안 이 일본식 이름으로 소암이 글을 발표한 일은 없고, 또 소암이 일본어로 발표한 글도 아직 발견된 것이 없다.
4. 영남일보 시절
광복 후 소암은 고향인 서울로 가지 않고 대구에 그대로 머물렀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지방지의 중요성을 느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그런 이유만으로 상경하지 않은 것은 좀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대구에서 일제 시기의 신문인들과 함께 동인지 형식의 『영남일보』를 창간하게 되는데, 그 창간사에서 소암은 일제시대에 언론인들이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 아부한 것을 사죄하며 조국의 새 언론 창달을 말하고 있다.
이 영남일보사가 처음은 동인제로 출발하였으나, 곧 자금 조달의 필요에 따라 주식회사로 체재를 바꾸어 현재에까지 이르렀다. 이 영남일보사에서 소암은 1956년 7월까지 11년간 봉직하게 되는데, 이 기간 중의 소암의 직책을 『영남일보』 사고란(社告欄)과 『영남일보 50년사』에서 뽑아 보면 다음과 같다.
1945년 11월 13일 초대 편집국장
1945년 12월 13일 출판국장 겸무
1946년 2월 1일 제2대 사장
1946년 5월 22일 취체역(取締役) 사장14)
1955년 9월 15일 상임고문
1956년 7월 26일 상임고문 사퇴
영남일보사 시절 10여 년간 소암은 많은 글을 쓰지 않았다. 특히 짧은 수필 몇 편을 제외하고는 문학적인 글은 거의 쓴 일이 없다. 이 시기에 발표한 비교적 긴 글로 ‘사색당쟁(四色黨爭)의 전말(顚末)'(『영남일보』, 1947.1.14∼2.3, 13회 연재)과 ‘영광록(靈光錄)'(『영남일보』, 1954.2.6∼11.7, 41회 연재)이 있다. 앞의 글은 역사적인 논설이고, 뒤의 글 ‘영광록’은 소암의 말년에 그가 심취하였던 일본인 종교사상가 다니구치 마사하루(谷口雅春, 1893∼1985)의 영향을 크게 받은 종교철학적 논술이다.
소암은 한국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 한영서원(韓英書院)에서 받은 교육의 영향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 무렵 소암은 『한국 역사 인명 대사전』을 편찬할 계획을 가지고 많은 한국 역사 관계 문헌을 수집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소암의 장서로 현재 남아 있는 한문 전적에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통감』, 『해동역사』, 『조선 고금 명현전』, 『동국역사』, 『국조 인물지』, 『해동 명장전』, 『해동 고승전』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사전 편찬은 계획으로만 끝나고 그 원고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1945년 12월 13일에 영남일보사는 『영남교육』, 『영남부녀』, 『영남춘추』 등의 잡지를 발간하기 위해 출판국을 신설하면서, 편집국장이었던 소암이 출판국 국장을 겸하였고, 1946년 2월 사장에 취임하고부터 이 신문이 정상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또 무엇보다 대구 시민들의 관심을 끈 것이 영남일보사 주최로 대구의 공설 운동장에서 해마다 개최되었던 시민 대운동회였는데, 1946년 5월 5일 일요일 제1회 운동회를 가졌고, 이때 소암의 명연설은 오래도록 시민들의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영남일보』는 6․25전쟁을 계기로 크게 발전하였다. 정부가 대구와 부산으로 천도(遷都)한 시기에 『영남일보』는 전국 최대의 신문으로 인기를 모았다. 많은 문인들이 대구로 피난 와서 『매일신보』 시절에 인연을 가졌던 소암을 찾아 왔고, 소암도 이들 문인들을 크게 후대하였는데, 어렵던 피난 시절을 영남일보사에서 보낸 많은 이들의 증언이 있다. 대표적인 기록으로 편집국장 구상(具常), 장덕조(張德祚) 등의 것이 있다.
전쟁이 끝나자 피난 왔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상경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소암은 이때 상경 문제를 두고 또 많은 고민을 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소암이 광복 직후 지방지의 중요성을 열심히 주장했고, 자신도 연고지인 서울로 가지 않고 대구에서 지방지를 발간하며 지냈지만, 6ㆍ25전쟁이 끝나고 정부가 환도(還都)한 이후 주위 인사들에게 “국가가 지방지를 위해서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 않는 한, 앞으로 중앙지 때문에 지방지는 고사(枯死)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란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 예언은 그대로 적중하여 현재의 지방지 상황이 되어 버린 셈이다.
『영남일보』 사장 재임 시의 공직 활동으로, 대구 국제 로터리 클럽 부회장, 문총(文總) 경북 연합회 부회장, 적십자사 경북지사 상임위원, 경상북도 선거위원회 위원, 동방 신문학원(東邦新聞學院) 원장, 경대사대부중 사친회 회장, 경북대학교 기성회장, 경북 문화사업협회 최고위원,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후원회장, 대한소년단 경북지구연맹 실행위원, 경대사대부고 사친회 회장 등의 직책이 자필 이력서에 기재되어 있다.
5. 은퇴 생활과 별세
1956년 7월 소암이 영남일보사 상임고문직을 사퇴하고 나자 가계가 상당히 어려워졌다. 노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소암은 1957년 8월부터 거주지인 대구시 남산동에서 작은 문방구점을 차려 3년간 이를 운영하며 생활한다. 그러다가 1960년 5월에, 광복 직전부터 15년간 살던 남산동 한옥을 처분한 후 대구시 동구 범어동(泛魚洞)에 농지 300여 평(약 1,000㎡)을 구입하여 이곳으로 이사하고. 여기에서 양계업과 채소 농사를 하게 된다. 이 양계업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규모가 큰 것이었고, 채소 농사는 무ㆍ배추 등 가족들의 부식에 쓰고 남을 만한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약 4개월 간 병석에서 지내다가, 간질환과 패혈증으로 1962년 9월 28일 이곳 범어동 자택에서 갑자기 사망한다.
별세 당시 유가족은 부인 한만천(韓萬千) 여사 외 2남 3녀였다.15)소암의 묘소는 현재 대구시 수성구 범물동 천주교 신자 묘원에 있다. 자녀들이 소암의 창작 희곡집 『황야에서』의 비문(扉文)을 넣은 문학비를 묘소 앞에 세웠다.
소암의 친아버지가 고향인 개성을 떠나 부산으로 온 후에 소암의 형제들과 그 가족 모두가 천주교를 믿게 되었는데 (그래서 소암의 조카와 조카딸 중에 천주교 신부와 수녀들도 여럿 나왔다.) 소암은 경기도에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를 믿지 않다가 광복 후에 천주교에 입문하여 ‘아오스딩'(Augustinus의 포르투갈어 식 이름)이라는 세례명을 갖게 된다. 소암의 영결(永訣) 미사는 1962년 10월 1일 오전 9시 천주교 범어동 교회에서 엄수(嚴修)되었다.

소암 김영보 문학비
위에서 언급한, 각종 신문 및 잡지 등에 발표한 글들 수십 편(희곡 5편, 소설 1편, 시 1편, 기타 논설 및 수필․기행문․보고문 등)이 전해지고, 미발표 유고로 다음 3편의 글이 있다.
1. 심령학(心靈學) 상으로 본 생전(生前)과 사후(死後)-부록; 광명 철학(光明哲學)의 주장 [200자 원고지 502장]
2. 양계 일기(養鷄日記) [대학노트 1권]
3. 성도(聖道)를 찾아 [중형 노트 1권]
또 1954년부터 1957년까지 소암이 결혼 주례를 맡은 남녀 250여 쌍의 꼼꼼한 신원 명세 기록(결혼 날짜, 예식장 이름, 신랑 신부 이름, 나이, 학력, 직업, 출생지, 부모 이름 등)과, 1954년도 수첩에 기록된 개인의 비망록이 남아 있다. 1965년 삼성 그룹의 이병철 회장이 『중앙일보』를 창간하려 할 때, 대구와 인연이 있던 그가 이 신문을 맡아 줄 사람으로 소암을 지목하고 찾았으나 이미 소암은 별세한 후였다.
  • 1)여기서부터는 나의 아버님을 그분의 호(號)를 따라 ‘소암(蘇岩)’으로 일컫고, 객관적으로 기술한다.
  • 2)이 희곡집은 또한 장정가(裝幀家)의 이름이 알려진 한국 최초의 단행본이라는 점에서 출판 미술사적인 의미가 있다. 박대헌, 「우리 책의 장정과 장정가들, 韓國 近代 圖書 裝幀 小史」, 열화당, 1999, 33쪽.
  • 3)책등이 둥글지 않고 모가 나있으며, 책등과 책표지 연결 부분에 홈을 만들어 둔 제본 방식.
  • 4)책표지와 책등을 연결하는 헝겊.
  • 5)박대헌, 「우리 책의 장정과 장정가들, 韓國 近代 圖書 裝幀 小史」, 열화당, 1999, 33쪽.
  • 6) 「시사평론」은 친일주의자 민원식(閔元植)이 1920년 4월 1일 창간한 신문인 「시사일보(時事日報)」가 노골적인 친일 논조로 독자들의 호응을 받지 못하던 중에 이듬해인 1921년 2월 16일 민원식이 도쿄에서 피살되자 폐간되었고, 1922년 4월에 잡지 「시사평론」으로 개제하여 월간, 또는 격월간으로 1928년 1월까지 통권 57호를 발간하였다.
  • 7)이 「ᄭᅩᆺᄯᅡ운 선물」에 관해서는 김동소, 「김영보의 『ᄭᅩᆺᄯᅡ운 선물』에 대하여」, 『근대서지』 제2집, 2010, 282∼291쪽 참조.
  • 8)현대어로 번역하여 싣는다.
  • 9)『경북대관(慶北大觀)』(해방 13주년 기념 출판), 신생문화사, 1958, 603쪽 참조.
  • 10)당시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들이 실려 있다. “조선인 여학생 마에바시[前橋]에서 3명 동반 자살/병든 친구를 동정해서/도쿄의 여자 동포원 학생.” 『오사카 아사히[大阪朝日]신문』, 1927.5.6; “조선 여학생 3명 투신/2개월이나 찾지 못한 시신이 떠오르다(女子同胞園 横井誠雄方에서 기숙하는 여자대학 부속 桜楓会夜間学校), 『고베신문[神戸新聞]』, 1927.7.20.
  • 11)아마도 이 여학생들이 소암을 짝사랑한 끝에 비관 자살한 것이라고 소암의 장녀인 김혜순이 말한 바 있다. 그러나 1927년 7월 20일 자의 『요미우리신문』 기사는 신병(身病)과 입시 지옥의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말한다.
  • 12)200자 원고지 12장 정도의 분량이다.
  • 13)당시 『매일신보』지면에는 ‘蘇巖’으로 되어 있으나, 소암이 사용하던 장서인(藏書印)에는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蘇岩’으로 되어 있다.
  • 14)동인제에서 주식회사로 체제를 바꿈에서 오는 인사 발령이다. 취체역은 주식회사의 이사(理事)라는 말의 일본식 용어이다.
  • 15)이미 출가한 장녀 혜순(惠順)은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