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목차보기
대구예술의 힘
Print Friendly, PDF & Email
대구예술의 힘 – 인터뷰
소암 김영보 선생의 희곡집 『황야에서』와
연극 「나의 세계로」
권순종 / 연극평론가, 전 구미대학교 교수
8월 29일 오후 7시. 소암(蘇巖) 김영보(金泳俌) 선생의 창작희곡 「나의 세계로」 공연 사흘째. 공연 시작 30분 전부터 관객들이 삼삼오오 극장으로 모여들었다. 혼자 오는 관객은 거의 없고, 친한 사람들이 몇몇씩 무리를 지어 오는 듯했다. 조그만 극장의 객석은 금세 관객으로 가득 찼고, 극장 운영진들이 맨 앞줄 객석 앞에 긴 보조 의자를 부랴부랴 갖다 놓았다. 객석 양쪽 옆과 가운데 통로에도 간이 의자를 갖다 놓고 관객들을 앉게 했다. 늦게 온 관객 몇몇은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객석을 둘러보니, 남녀노소가 뒤섞여 있긴 했으나, 노년층이 꽤 많이 보였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노인들이 소극장을 찾다니, 그야말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 대구의 한 소극장에서 일어난 것이다.
연극 「나의 세계로」의 팸플릿. 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떠나고자 하는 주연 배우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2019 대구 근현대 문화예술 인물 희곡작가 김영보 현창 공연’인 「나의 세계로」가 공연되고 있는 한울림 소극장의 모습이다. 이 작품은 1922년에 창작되었으니 3년만 더 지나면 창작 백 주년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공연은 창작희곡 「나의 세계로」가 창작 백 년을 불과 몇 년 앞두고 초연된, 무척 뜻깊은 일이다. 우리나라 근현대 창작희곡 중에서 창작된 지 백 년이 된 작품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드물다.

노인 관객들이 극장을 많이 찾은 것은 작가의 아들(김동소, 전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이 연극 정보를 주변에 널리 알린 데 힘입은 바 크다. 또, 그의 친구이자 지역의 원로연극인 서영우(이 둘은 고등학교 동기이고, 올해 일흔일곱 살이다.)가 우정 출연하여, 젊은 시절의 김동소 역을 맡은 것도 관객 유치에 꽤 이바지한 것으로 보인다.

8월 29일 공연을 마친 뒤 출연 배우들이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는 장면. 왼쪽에서 세 번째가 원로배우 서영우.
연극이 시작되자, 백 년 전의 희곡집 속에 누워 있던 활자들이 살아서 성큼성큼 무대 위로 올라왔다. 책 속의 언어는 백 년 전의 말이지만, 무대에 오른 언어는 지금, 이곳의 말로 옷을 갈아입고 종횡무진으로 무대를 누볐다. 그래서 배우들의 언어가 관객들과 소통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고 지역의 희곡작가 안희철이 원작을 시대 상황에 얼추 맞게 다듬고, 앞뒤로 얼개를 엮어 원작의 사건을 마치 액자소설처럼 꾸몄다. 그리고 극단 한울림의 대표 정철원의 연출이 빛을 발했다.
8월 29일 공연을 마친 뒤 출연 배우들과 함께. 앞줄 가운데가 전 포항공대 김원중 교수, 왼쪽이 필자, 오른쪽이 최창길 박사.
1979년 가을이었다.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꼭 40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었고, 학위논문을 준비할 때였다. 나는 지도교수인 조동일 교수에게 1920년대의 대표적인 희곡작가 김우진을 연구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조 교수는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가망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당시 김우진에 대한 연구는 이미 여러 차례 이루어져 왔고, 서울대학교의 이두현 교수의 뒤를 이은, 희곡연구 1세대 격인 고려대학교의 서연호 교수와 단국대학교의 유민영 교수에 의해 대체적인 정리가 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교수들의 업적을 뛰어넘지 않으면 내 연구는 논문으로서의 가치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이 조 교수의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크게 두텁지 않은 복사본 한 권을 건네주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희곡집인데,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작가의 아들이 계명전문대학의 김동소 교수인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희곡작가 김영보 선생과 나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희곡집 『황야에서』는 원본을 복사한 것이므로 원래 책 표지의 색깔이나 모습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책의 제목 ‘황야(荒野)에서’는 선명한 자태로 나에게 다가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책의 표지에 신식 머리 모양을 한 여성의 벌거벗은 뒷모습이 그려져 있었다는 점이다. 에로틱한 느낌마저 주는 그림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초에 책의 표지에 자신이 직접 그린 여성의 나신(裸身) 그림을 넣다니, 작가의 당돌하기조차 한 의도가 궁금했다. 그리고 작가가 제시한 ‘황야’는 무엇이며, 어디인가 하는 점도 궁금증을 자아냈다.

나는 희곡집 『황야에서』에 실려 있는 작품 네 편(「구리 십자가」는 빅토르 위고의 작품을 번안한 것이라 제외했다.)을 거듭거듭 읽으면서 작가와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계명전문대학 연구실로 김동소 교수를 찾아가 인사하고 선친에 관한 자료를 요청했다. 김 교수는 조동일 교수로부터 내가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이때부터 소암 김영보 선생, 그의 아들 김동소 교수와 나는 지금까지 40년 동안 오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김동소 교수가 필자에게 선친에 관한 자료와 출판을 맡겨서 1999년에 『김영보 희곡집 황야에서』를 출간했다.

창작희곡집 『황야에서』의 표지. 필자에겐 복사본밖에 없어 김동소 교수가 엮은 『소암 김영보』에서 가져왔다.
소암 김영보 선생은 1900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신학문에 눈을 뜬 부친의 교육열 덕분에 개성의 한영서원(韓英書阮) 초·중·고등과에서 수업하고 1918년에 졸업했다. 그는 이 서원에 다닐 때인 1916년에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보통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그 재주를 인정받기도 했다.
그 후, 1921년에 개성학당 상업학교 교유(敎諭), 1924년에 경성의 수송유치원 원감에 임명되어 교직에 종사했다. 선생이 연극에 관심을 가진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인데, 그는 당시 연극계의 핵심 인물이었던 윤백남, 이기세, 복혜숙 등과 함께 ‘예술협회’를 조직하고, 이 극단의 공연에 필요한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시인의 가정」(1920), 「연(戀)의 물결」(1921), 「정치 삼매(情痴三昧)」(1921), 「나의 세계로」(1922)를 창작하고, 번안 작품 「구리 십자가」(1921)를 보태 1922년에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희곡집이 탄생한 것이다. 네 편의 창작희곡 가운데 「시인의 가정」과「정치 삼매」는 각각 1921년 10월과 12월에 단성사에서 공연되었다.
조중환(趙重桓)이 한글 희곡 「병자 삼인」을 매일신보에 발표한 것이 1912년의 일이니, 한글 희곡이 처음 발표되고 난 뒤 10년 만에 희곡집이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이다. 더구나, 이 책은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장정가가 알려진 최초의 도서이기도 하다.
선생은 1928년에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기자, 통신부장, 지방부장, 오사카 지사장, 경북 지사장 등으로 일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그는 지역의 언론인들과 함께 영남일보사를 창설하여 초대 편집국장으로 일했고, 1946년 2월에는 제2대 사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1962년에 일생을 마쳤다(김동소 엮음, 『소암 김영보』, 소명출판, 2016, 689~690 연보 참조).
필자가 1999년에 엮어서 펴낸 『김영보 희곡집 황야에서』의 표지.
연구가 진행되면서 논문은 얼개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1920년대 희곡작가들이 세상을 향해 던진 메시지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 교수의 생각과는 달리 내가 애초에 연구 대상을 김우진으로 정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 교수가 희곡집 『황야에서』를 건네주며 나를 통해 작가 김영보 선생을 세상으로 내보내고자 한 선택은 더욱 잘한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희곡작가 김영팔을 주목했다.
결국, 김영보의 「나의 세계로」(1922), 김영팔의 「미쳐가는 처녀」(1924), 김우진의 「산돼지」(1926)를 텍스트로 삼아 1920년대 우리나라 희곡의 한 특징을 규명하고자 했다. 그것은 바로, 가정극이 1920년대 창작희곡의 주류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김영보 선생을 비롯한 당시의 가정극 작가들이 작품 속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가부장적인 봉건질서 개혁과 인간다운 삶이었다. 최초의 창작 희곡집 제목이 제시한 ‘황야’는 지금, 이곳의 삶이고, 작가가 지향하는 ‘나의 세계’는 인간다운 삶이 있는 곳이었다.
2016년에 김동소 교수가 엮어 펴낸 『소암 김영보』.의 표지. 김영보 선생이 발표한 글을 한데 모은 전집이다.
소암 김영보 선생이 연극에 종사하면서 네 편의 희곡을 창작한 때는 1920년대 초반이었다. 이 시기는 희곡이 문학 갈래의 하나로 정착되지 못했고, 전문 극작가들이 등장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이런 시기에 희곡을 창작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희곡집을 발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나라 희곡사에서 선구적인 작가로 평가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그가 작품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봉건질서의 개혁과 인간다운 삶이었고, 그 작업의 출발은 바로 가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