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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 – 캐리커처에세이
김영보, 한국최초의 창작 희곡집 저자
– 글로 세계를 쓰고 글로 세상을 담다
안희철 / 극작가, 초이스시어터 대표
김승윤 / 캐리커처
주목받지 못했던 역사
소암 김영보 선생은 1900년 1월 28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당시 선생의 할아버지를 포함해 집안사람들은 모두 개성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 때문에 부산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선생을 낳은 것이다. 선생의 아들인 김동소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는 『소암 김영보 전집』(소명출판, 2016)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기록에 아버지의 출생지가 개성으로 나오는 이유는 어려서 개성에 있던 작은아버지에게 양자로 가서 그곳에서 자랐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필자가 한국최초의 창작 희곡집 『황야에서』(조선도서주식회사, 1922)라는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 시절이다. 당시 수강했던 한국문학사라는 과목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책에 실려 있던 내용이라곤 한국최초의 창작 희곡집이라는 간단한 언급과 함께 그 희곡집에 다섯 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는 간단한 소개 정도였다. 한국최초의 창작 희곡집이 갖는 문학사적 의미에 집중하는 깊이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창작 희곡집 『황야에서』가 한국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이유는 앞서 밝힌 것처럼 그동안 작가의 고향이 개성이라고 알려졌던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선생의 작품을 재발견해줄 고향도 선생을 기록하고 알릴 후학도 없었다는 점이 한몫했을 것이 분명하다. 거기에 김영보 선생 또한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이 젊은 시절 냈던 창작 희곡집을 널리 알리지 않았으니 작가와 작품 모두 빛을 볼 방법이 없었던 셈이다.
한국최초의 기록을 쓰다
소암 김영보 선생은 일제강점기였던 1922년 한국최초의 창작 희곡집 『황야에서』를 출간했다. 이 희곡집은 한국문학사에 기록되어 있는 한국최초의 창작 희곡집이자 장정가가 알려진 최초의 단행본이다. 이는 문학사, 연극사, 출판사 등 모든 면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표지 그림을 직접 디자인했다는 점은 김영보 선생이 여러 방면의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는 점을 알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국최초의 창작 희곡집이라는 기록 이외에도 김영보 선생은 한국최초라는 기록을 더 보유하고 있다. 창작 희곡집 『황야에서』에 실린 다섯 편의 작품 중 「구리 십자가」는 한국최초로 빅토르 위고의 희곡을 번안한 작품이며, 1923년 시사 문예지 『시사 평론』에 5회에 걸쳐 연재됐던 번역 소설 「웰텔의 비탄」은 한국최초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번역하여 소개한 작품이기도 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1930년에는 전래 동요ㆍ동화집인 <(악보 붙은 동요ㆍ동화집) 꽃다운 선물>(삼광서림)을 편찬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희곡작가이자 아동문학가이며 번역가였던 셈이다. 이상의 기록만으로도 김영보는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인물임이 분명하다.
치열한 검증 끝에 드디어 만난 이름
소암 김영보 선생의 아들 김동소 교수는 아버지의 전기 또는 전집을 발간하겠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는 자신의 소망이자 꿈이라고 할 정도로 강력한 의지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책의 발간이 늦어진 이유는 아버지의 친일 문제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의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사실관계 확인을 통해 합리적으로 친일 문제를 검증하고 싶었던 김동소 교수의 성품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동소 교수가 아버지 김영보의 친일문제를 꼼꼼히 살펴본 이유는 선생이 일본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 1928년부터 1945년까지 근무한 이력 때문이다. 그 사실로 친일인사라는 지적을 받을까 싶어 사실관계를 확인하느라 김영보 전집의 출간이 늦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동소 교수는 어릴 적 보아온 평소 아버지의 모습이나 글 때문에 오히려 그런 민족주의적 성향의 사람이 어떻게 매일신보에서 근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던 중 출간된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은 김동소 교수의 어깨를 가볍게 만들었다. 김영보 선생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오르지 않은 까닭이다. 당연한 결과였다. 일제강점기에 매일신보에서 통신부장, 지방부장, 학예부장 등을 지낸 주요 인사들이 친일인사로 등재되었지만, 선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했던 학자들에 의해 인정된 것이었다. 이는 그동안 그가 수집한 행적과 글들을 통해 직접 확인한 것과 같았다. 하지만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셈이어서 무척 기뻤다고 김동소 교수는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일본 총독을 수행하고 동룡굴 관광,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우가키[宇垣] 총독. 그 왼쪽으로 뒤편이 김영보. 1932년 11월.
일본 총독을 수행하고 동룡굴 관광, 앞줄 왼쪽에서 아홉 번째가 우가키[宇垣] 총독. 여덟 번째가 김영보. 1932년 11월.
『소암 김영보 전집』으로 소환되다
지금껏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김영보 선생을 오늘 이 시대의 무대에 오르게 만든 것은 치열한 검증 후에 나온『소암 김영보 전집』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출간한 김동소 교수는 선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는 선생의 아들이면서 한국문학사적 가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국문학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비록 희곡전공은 아니지만, 선생의 전집으로 인해 드디어 본격적으로 김영보 희곡작품의 문학사적 가치와 연극사적 가치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실제 그 결과로 『황야에서』에 실린 「나의 세계로」가 2019년 8월, 대구의 극단 한울림에서 초연되는 성과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성과가 처음은 아니다. 2015년 11월, 역시 극단 한울림에서 「연의 물결」을 초연한 적이 있다. 이는 아버지의 희곡을 세상에 알리려는 아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김동소 교수는 공연 가능 여부를 타진하기 위해 낯선 연극계로 가서 먼저 극단의 문을 두드리는 등 후학들이 놓친 역할을 선생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사명감을 가지고 누구보다 충실히 그 역할을 수행했다. 그래서 김영보라는 희곡작가를 다시 문학계와 연극계에서 주목할 수 있게 되었다. 희곡작가이자 언론인 김영보는 아들이자 국문학자인 김동소 교수에게 소환되어 오늘날의 독자와 관객을 만났다. 아들에 의해 소환된 아버지, 이처럼 아름다운 소환이 또 있을까.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낸 의미 있는 소환이다.
작가이자 언론인
김영보 선생은 개성학당 상업학교 교사(1921년~1924년)와 서울 수송유치원 원감(1924년~1926년)으로 일하는 등 교육자의 길을 걷기도 했으나 이후 매일신보(1928~1945년)와 영남일보(1945년~1956년)에서 근무하는 등 평생 언론인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매일신보에 입사하기 전에는 예술협회, 녹파회, 극문회 등 극단에서 연극 활동을 하던 연극인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그의 삶은 다양한 행적을 그리고 있으나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의 삶은 작가이자 언론인으로 볼 수 있다.
희곡작가 김영보의 작품은 백 년 전에 쓴 희곡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내용이 파격적이다. 최근에 공연된 「나의 세계로」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주인공이 미혼모라는 점, 자유연애를 다루고 있는 것과 여성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점 등 소재만으로도 당시로는 파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 미혼모 주인공은 일제의 작위를 받은 남작의 딸이다. 그런 그가 엄청난 재산과 지위를 버리고 자기의 세계를 찾아 떠난다는 마지막 장면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의 명작 「인형의 집」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의 작품들도 당시로선 좀 낯설거나 파격적인 내용으로 희곡작가 김영보의 작가정신과 실험정신 등을 엿볼 수 있다.
매일신보 편집국 모습. 맨 오른쪽이 김영보. 1936년 무렵. (당시 통신부장?)
언론인 김영보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발행된 한국어신문인 매일신보에 입사해 해방까지 기자, 통신부장, 지방부장, 오사카 지사장 등을 지냈다. 그는 해방 후 중앙보다 지방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동인들과 함께 대구·경북 최초의 종합일간지인 영남일보를 창간해 초대 편집국장이 된다. 그리고 한 달 만에 제2대 사장에 추대되어 1956년까지 사장으로 재직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그는 대구·경북 언론사에서도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특히 영남일보 사장 재직 당시 구상, 장덕조, 최태응, 마해송, 박두진 등 한국전쟁 당시 대구로 피난 온 수많은 문인을 신문사에 받아들여 글을 쓸 수 있게 하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또한 한국전쟁 중에도 신문을 휴간하지 않고 매회 발간하였으며 부산으로 피난을 가거나 폐간하지도 않으며 민족정론지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영남일보사 주최 제1회 대구 시민 대운동회에서 대회사를 하는 김영보. 1946년 5월 5일.
영원히 대구에 남다
1956년 7월 영남일보를 그만두고 나서 김영보 선생의 집안 경제가 상당히 어려워지자, 해방 전부터 살았던 대구 남산동 한옥을 팔고 대구 범어동으로 이사해 양계업을 시작한다. 이때 양계업을 하며 쓴 양계일기가 『소암 김영보 전집』에 실려 있다. 평생 글을 쓰며 살았던 선생의 모습을 짧은 양계일기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김동소 교수는 당시 생계를 위해 양계업을 한 것이어서 가족들이 그 일을 좀 부끄럽게 생각하는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신문사에서만 10년을 넘게 일했던 사람이 경제적으로 힘들었다는 것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그만큼 청렴결백했다는 방증이 아닐까.
한 가정의 가장으로 소탈하게 살아가던 김영보 선생은 간질환과 패혈증으로 1962년 9월 28일 운명한다. 묘소는 현재 대구 수성구 범물동에 있다. 해방 전에 대구에 자리를 잡은 선생은 이 세상을 떠났지만 대구를 떠나지는 않았다. 자신도 후손도 모두 대구사람이 된 셈이다. 선생의 묘소 앞에는 한국최초의 창작 희곡집 『황야에서』의 책머리 글이 비문으로 세워져 있다.
스스로 숨겨진 작가
김영보 선생은 문학인과 언론인으로 한국 역사에서 한 획을 그었다. 특히 한국최초의 창작 희곡집을 낸 20대 청년의 삶은 오늘날 다시 생각해보아도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당대의 유명한 작가들을 제치고 최초의 기록을 쓴 희곡작가 김영보는 왜 문단과 연극계에서 자취를 감췄던 것일까. 물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몇 가지 추측들이 있을 뿐이다. 김동소 교수는 김우진과 윤심덕의 동반자살 그리고 도쿄 조선여자동포원에서의 여학생 자살 사건으로 인한 심적 고통이 문학을 그만두는 계기가 됐을 수 있다고 추정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선생은 왜 자신의 작가이력을 밝히지 않았을까. 언론인으로 살면서 얼마든지 작가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도 있었다. 최초라는 기록을 내세워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며 수많은 연구논문의 소재가 될 수도 있었다. 심지어 여러 극단에서 자신의 희곡이 공연되도록 유도할 수도 있었으나 그 어느 것 하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작가이력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처럼 보인다. 김동소 교수는 학창시절 연극반이었는데도 아버지가 희곡작가였다는 사실을 몰랐을 정도로 김영보라는 희곡작가는 숨겨진 작가였다.
글로 쓰는 세계, 글로 담는 세상
연극인이자 문학인에서 언론인으로 완벽하게 변신한 김영보 선생이 사람들과 만나는 소통의 도구는 언제나 글이었다. 선생의 글은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도구였다. 그리고 그 세계와 글의 가치는 백 년의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물음을 던지고 있다.
연극인, 문학인, 언론인 그 무엇이라고 불리어도 상관없을 선생의 글쓰기는 글의 형식은 달라도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사유를 확인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도 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와 문제의식을 담고 있어 의미가 있다.
희곡작가의 글로 세계를 쓰고, 언론인의 글로 세상을 담아낸 김영보 선생의 글을 환영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선생의 글은 백 년의 세월을 무색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