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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 – 문화키워드
뉴트로의 새로운 시절
최서연 / CAVA LIFE 디렉터
새로움을 뜻하는 ‘뉴(New)’와 복고를 뜻하는 ‘레트로(Retro)’를 합친 ‘뉴트로(Newtro)’, 직역하자면 ‘요즘 옛날’. 언뜻 상충되는 것 같은 이 새로운 조합의 용어는 복고를 재해석하고 새롭게 즐기는 경향을 뜻합니다. 디지털 시대 최전방을 살아가는 채로 (경험해본 적 없는) 아날로그를 (새롭게) 그리워하는 이 현상은 패션은 물론 음식, 공간을 넘어 우리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걸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메가 트렌드죠. 어글리 슈즈나 오버사이즈 셔츠, 작은 알 선글라스, 큼직한 로고 프린트 등 80-90년대 스타일의 아이템이 거리를 휩쓸기 시작하던 무렵, 그저 20년을 주기로 돌아온다는 유행의 물레방아 정도로 치부했던 저 자신을 반성할 정도로 말입니다.

트렌디한 소비의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는 밀레니얼 세대에게 개성과 희소성, 다양성은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특정 주기를 중심으로 반복되는 트렌드의 물레방아 속에는 ‘복기’를 바탕으로 하지만 단순히 ‘복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세대 차이로 인한 논리가 숨어있습니다. 현 라이프스타일에 맞추어 얼마나 유연하게 재해석이 가능한지, 이를 통해 파생시킬 수 있는 문화가 무엇인지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물론 복제품이 횡행하는 건 우리 시대의 현주소이기도 합니다만, 발 빠르고 스마트한 소비자로 손꼽히는 밀레니얼들에게 어필하는 이 트렌드만큼은 디지털 시대로 인해 상실하게 된,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경험들에 대한 욕망을 기반으로 하기에, 더욱 거부할 수 없는 영향으로 다가오게 된 ‘반작용’이 아닐까 합니다.

요즘 소비자 트렌드에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하는 식품 업계의 마케팅 전략을 살펴보면 그 영향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스쿱당’, ‘미묘당’, ‘만가옥’, ‘술또옥’ 등과 같이 음식점을 나타내는 접미사인 ‘당’, ‘옥’을 붙인 상표 출원이 최근 10년 사이 2.4배 늘었고, SNS에서 화제를 모으는 ‘힙 플레이스’의 생김새는 하나같이 뉴트로 감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50-60년대생 중장년층에는 젊은 날의 향수를 자극하고, 젊은 소비층은 이들 표장을 ‘낡은 것’이 아닌 ‘새로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고상표사례_출처 특허청
팔도에서 내놓은 한정판 비빔면 ‘네넴띤’이 좋은 예입니다. 트위터에서 시작된 말장난이 (예를 들어 ‘멍멍이’를 ‘댕댕이’라고 쓰고 읽는, 언어 표기 유희 유행) 뉴트로 감성과 결합되어 파생된 결과물이죠. 옛날 벽지나 포장지를 연상시키는 복고적인 그래픽이 모던하게 재해석된 디자인으로 마니아들을 열광케 했습니다. 할머니 입맛으로 치부되던 팥죽을 한정판으로 선보인 빙그레의 ‘비비빅 동지팥죽’ 역시 같은 맥락에서 화제를 모았습니다.
팔도에서 선보인 한정판 신제품 ‘네넴띤’_출처 팔도 홈페이지
빙그레에서 선보인 한정판 ‘비비빅 동지팥죽’_출처 빙그레 홈페이지
패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뉴트로 열풍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패션은 기대 이상으로 지속되고 있는 이 트렌드를 가장 자유롭고 흥미롭게 재해석하여 내놓는 업계입니다. 어글리 슈즈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필라(Fila)는 이제 뉴트로 패션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지지요. 덕분에 수많은 스니커즈 브랜드에서는 큼직하고 못생긴 신발들을 끝도 없이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뉴트로 패션을 더욱 매력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하이패션계입니다. 알레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가 이끄는 새로운 구찌(Gucci)와 리카르도 티시(Riccardo Tisci)의 새로운 버버리(Burberry)는 새로운 디렉터의 영입과 함께 마치 밀레니얼 세대의 타임라인을 보는듯한 전략을 구사하며 뉴트로 트렌드의 진화를 목도하게 하고 있죠.

이들은 각자의 문화권에 존재하던 레트로 아이템을 너머, 한 세대가 다양한 지역에서 따로 또 같이 공유해온 뉴트로를 수집하여 새롭게 재배열합니다. 어린 시절 노란 장판 위 아랫목에 깔려있던 일명 ‘할머니 누빔 담요’를 럭셔리한 구찌의 데코(decor) 컬렉션에서 보게 될 날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버버리에서는 영국의 기차표를 키링으로 만들었습니다. 한국식으로 치면 80-90년대 학생들이 사용하던 ‘버스 회수권’ 정도가 되려나요? 디지털 세상에서 살아가는 밀레니얼들에게 더없이 생소한 물건이자 부모님 세대의 추억 소환용으로 치자면 말이지요.

구찌의 ‘Toile de Jouy linen and satin quilt’ 담요_출처 구찌 홈페이지
버버리의 기차 티켓 모양 키링_출처 버버리 홈페이지
넷플릭스(Netflix)의 드라마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Stranger things)>는 뉴트로 트렌드의 본격적인 열풍에 가세한 컨텐츠로 손꼽힙니다. 80년대 미국 작은 마을에서 십대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기묘한 사건을 다룬 이 SF 드라마는 외계인 ET와 유년기를 함께 했던 중년층부터 카세트 테이프, 나이키 조던에 새롭게 열광하는 지금의 밀레니얼들까지 단번에 사로잡기에 이르렀죠. 늘 화제의 협업 프로젝트를 선보이기로 유명한 SPA 브랜드 H&M은 아예 이 드라마의 이름을 딴 콜라보 라인을 출시하며, 이 작품에서 흐르는 무드와 스토리를 연상시키는 패션 아이템들을 적극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H&M이 선보인 <기묘한 이야기> 라인 광고 캠페인_출처 H&M 홈페이지
하지만 이 메가트렌드는 우리나라 카페와 바 공간에도 침투하며 특이한 자가증식의 경향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서울 서브컬처 씬의 창작자들이 모여 만든 을지로의 바 겸 공연장인 ‘신도시’는 트렌드와는 무관하게, 낮은 임대료와 장소의 특수성을 이유로 시작된 곳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뉴트로 열풍의 주역이 되어 주변 수많은 카피캣 공간들을 마주하게 되었다고 하죠. 오래된 간판, 시골 한약방에서나 볼 법한 테이블과 서랍장, 사은품 컵 같은 요소들에 열광하는 밀레니얼 소비자들에 빠르게 대응하고자 한 업체들이 우후죽순 늘어났기 때문인데요. 비슷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메뉴나 컨텐츠를 따라 하는 바(bar)들이 생겨난 것으로 모자라, 그릇 대신 청소용 쓰레받기를 내놓고 수저대신 빨래집게를 주는 다소 괴이한 컨셉 포차 같은 업체들마저 생기고 있다는 후문이 들려옵니다. 노출 콘크리트가 마감이 덜된 천장과 벽면으로, 빈티지 식기가 비(非)식기로 선택되는 이 잘못된 농담과도 같은 흐름은 안전과 위생의 이슈를 건너뛴 레트로의 잘못된 재해석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자가 증식하는 트렌드가 확장을 거듭하다 못해 그 요소의 품귀 현상마저 일어나고 있다는 건 꽤나 흥미로운 일이죠. 이 현상이 과연 어디까지 얼마나 지속될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