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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 – 릴레이기고#3
주체적 삶을 위한-혼자 부르는 질문들
차현욱 / 회화 작가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질문들을 발견하며 지내고 있다. 질문은 ‘한다’ 이전에 ‘발견’ 돼야 하는, 시간에 속박된 인간이라는 존재가 시공간을 흘깃-넘겨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이것 또한 질문을 이루는데, 끊임없이 돌고 도는 이 굴레에서 헤매지 않을 방법은 질문을 이루고 있는 ‘의심과 믿음’이란 이 양가적 모순점을 충돌시키며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의 무한 충돌-생산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지평선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중력의 늪에 속박된 빛이 빠져나오지 못하며 사건의 관측이 불가능하게 되는 경계점이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라면,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 시간의 늪에 빠져버린 삶의 고정성으로 인해 그 너머를 인지할 수 없게 만드는 경계를 <시간의 지평선-time horizon>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알 수 없는 너머이기에 나는 이 절대적인 법칙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시켜줄 유일한 방법을 우리 존재가 할 수 있는 ‘질문’이라고 가정해보는 것이다. 그 근거로 이 질문을 이루는 것이 앞서 말한 ‘의심과 믿음’이라는 모순적 공존의 양자적 무한성이라는 혼자만의 가설을 제시해본다.
나는 작년에 있었던 개인전을 시작으로 그동안 알고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질문들의 극히 일부분을 미약하게나마 작업으로 나타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짧고 무규칙적인 글귀의 형태로 남겨두었다.
이 모든 것의 출발은 무한의 흑암 속에 유영하던 목성과 갈릴레오 위성들을 우연히 관측하면서 시작되었고 거기서 발견된 희미한 질문들을 자신이 살며 거쳐 온 시간 속의 공간들과 연결시키며 2차원 평면 위에 펼쳐내었다. -이 평면의 공간은 우리가 존재하는 3.5차원 너머로부터 전달된 질문들이 쌓여진, 이 불가사의한 질문의 현상과 아주 닮아있는 형태의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시간을(통제하지 못하기에) 기록하는 수단으로 글귀들을 동원한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바라’봄’의 행위를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의심하며 다른 시각을 찾기 위한 ‘주체적 삶’의 시작이며 동시에 끝인 양가적 존재이다.
이후부터는 내가 가졌던 질문들 중 몇몇을 옮기고 그것과 관련된 작업 이미지를 보이고자 한다. 누군가에게는 다소 허무맹랑한 질문들일 것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중요한 질문들이었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공개한다.
# *
아는 것보다 알아야 할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게 가득 차있는 세상
그것이 나의 시공간
우리의 시공간
우리의 질문들
<꿈 꾸는 숲, 2018, 한지에 먹, 140 × 195cm>
# **
별빛의 노래
별들은 알알이 가슴에 새겨진 기억 같아
별들이 그리워질 때마다 울컥 인다.
그렇게 그리움이 생길 때 마다 별빛을 그린다.
그리고 그려도 그리움은 가까워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리고 그린다.
그려진 그림은 노래가 되고 나는 노래하는 사람이 된다.
<소년의 시간, 2018, 한지에 먹, 200 × 145cm>
# ***
신천 둔치에서
적당히 숨 막히는 회백색을 적당히 도피, 나는 –형체가 없음- 으로 부터 도피하고 있었다. 적당한 한 끼를 위한 무난한 샌드위치 앞에서도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갈등하는 이상한 다양함의 앞에서 나는 붓을 들고 서있는 척을 하고 있었다.
오늘도 나는 걸어야 할지, 페달을 밟아야 할지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최선도, 최악도 아닌 선택을 하고는 늘 가던 길 위에서 페달을 밟고 있었다.

빛이 비칠 때는 빛을 가려주는 구름을 좋아했고, 되비침 때에는 존재하지 않는 맑음과 같은 하늘을 좋아했다.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며 별을 꿈꿔왔다. 그렇지만 별은 나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그 하늘에서 빛나고 있었고 나는 잃어버린 별빛을 되찾으려는 하루하루를 되풀이하고 있다.
나의 길은 별빛을 찾는 길이 되기를. 내 앞에 비춰진 보잘것없는 좁은 길들은 나아가 별빛이 되어주기를.
오늘도 신천 둔치에 비춰진 희미한 별빛에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본다.

# ****
30대의 일기
수많은 물음표에 대한 답은 공허하기만 하고 그나마 맴도는 생각은 무지에서 나오는 공허함일까. 아는 것이 쥐뿔도 없으니 공허함이 가득한 것일 테지.
그럼 아는 것이 쥐뿔만큼이 아니라면 살아가는 이유가 생기 있게 와 닿을 것인가?
안다는 것은 끝없는 물음표와 같은 것일까?

그렇다면 끊임없는 물음표에 대한 갈망은 하찮은 순간의 삶에 영속적인 빛이 되어 주는 것일까?

<그날이 오면, 2018, 한지에 먹, 200 × 290cm>
# *****
혁명? 깨움? 그 뒤에는?
욕망? 철학? 그것 또한 욕망?
고정된 것들의 파괴 뒤에는 그 다른 것이 있는 것일까?
다시 반복일까?
과연 그 뒤에는,
그 너머를 본다면,
또 다른 세계?
또 다른 삶이, 세상이, 가치가, 욕망이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들은 또 다른 윤회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과연 새로움의 새로운 윤회인가? 새로움은 윤회 인가?

나에겐 혁명도 파괴도 모두 그러한 것에 대한 선입견.
굳은살은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 굳어져 언제 생겨났는지도 모른 채 어느 날 문득 느껴져 뜯어내려는 손톱질과도 같은,

뜯어내기 시작하면 다시 굳어지는
불려서, 불려서 시간을 두고 부드럽게 밀어 없애야 함을
알면서도 망각하는가.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못하는 것인가, 모르는 것인가, 외면하는 것인가.

어느 날의 이 질문들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눈으로 봄vision을 실현하고 움직임이 일게 하는 ‘세상’과도 같을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그저 내가 지닌 몸, 눈으로 그 세상을, 질문을 발견하고 그려내는 몸의 운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화가는 자신의 몸을 세계에 빌려줌으로써 세계를 회화로 바꾸어낸다.”
“화가는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창들에 대한 신화를 받아들인다. 즉 장소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몸을 따라야 하고, 게다가 몸을 통해 다른 모든 몸과 자연의 비밀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중략) 즉 봄을 통해 우리가 태양을 만지고 별을 만진다는 것을……”
– 메를로 퐁티『Eye and Mind』, 1964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