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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 – 릴레이기고#2
지금의 나
서민기 / 대구예술발전소 9기 입주작가
피리를 불기 시작한 2008년부터 지금까지 올해로 11년째, 그때부터 모았다.

대학생 때 학교에서 했던 공연, 공부를 위해 보러 다녔던 공연, 또 졸업 이후 바쁘게 다녔던 크고 작은 공연들 100프로는 아니지만 70프로 이상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왜냐면 그만큼 악착같이 모았다.

작던 크던 다수의 시선이 머무는 무대에서의 연주를 나 스스로에게 남길 수 있는 건 악보와 리플렛 뿐이었던 것 같다. 의미 없는 단순 집착이라 여기던 이 행동에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본 결론이다.

시간2(2008~2018_archive), 2019
내 방 책상 옆 뒤죽박죽 쌓여가는 이 종이들이 보며 ‘정리해야지’라는 마음의 짐이 늘 있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을 흘려보냈다.

그런데 얼마 전, 지금 정리해야겠다! 라는 마음이 들어 넓은 책상을 몇 개나 붙여 모두 펼쳐 마주했다. 여러 장 있는 건 버리고 크기별로 정리도 했다가 순서별로 정리도 했다가~ 만지작하는 사이 하루가 뚝딱 지나갔다.
정리하기 위해 하나하나 펼쳐보니 그 순간순간들이 다 떠올랐다. 대부분이 기억나는 것으로 봐서 10년이란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은 아닌듯하다.

시간(2008~2018_archive), 2019
올해, 나는 대구예술발전소에 입주작가로 선정되면서 ‘스튜디오’라는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연습실이라는 공간이 늘 있었지만, 이곳은 연습하는 곳,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늘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공연장, 대기실, 합주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지내는 나에게 이곳은 오롯이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이곳에 입주한 지 한 달 남짓 지났을 때, 묵혀두듯 쌓아둔 이 종이 뭉텅이가 생각났다.

스튜디오9, 2019
대구예술발전소 안 스튜디오를 직접 본건 2017년이었다.

그때 나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실행하는 예술인파견지원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사업은 기업과 예술인이 6개월간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프로젝트를 만들고 실행하는 일이다. 대구 강정보에 있는 강문화관 ‘디아크’와 예술인 3명이 함께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함께한 분의 작업실이 이곳이었다.
함께 작업을 했던 예술인들은 회화, 설치, 그래픽 디자인으로 모두 시각분야였다. 이 사업에서 나는 기업과 예술인 사이를 연결해주는 퍼실리테이터 역할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 방식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 친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부분도 많다.

여러모로 그 해의 활동들은 나에게 새로운 시선을 가져다주었다.

어떤 과정 속에서 얻어지는 것들에 대한 큰 의미를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특히, 어떠한 문제를 만나는 것은 두렵게만 느껴졌지만, 이것 역시 과정 속에 포함된 일이라 생각된다.
나의 분야와는 상관없는 일들을 알아가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함께 만들어나가고, 실행하기까지! 물론 쉽진 않았지만 흥미로웠다.

사업이 끝난 후, 지금까지도 만나서 각자의 이야기 그리고 함께의 일들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가깝게는 6월부터 시작된 예술인파견지원사업으로 제주도에서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또 어떤 일들이 생길까 기대된다.

어쨌든 내가 대구예술발전소에 지원한 이유는 이러한 새로운 일들의 연장선이었다.

대구예술발전소 9기 입주작가 릴레이전, let me introduce my self, 가변설치, 2019
나는 국악기 중 관악기 ‘피리’를 전공하였다.
오랜 시간 피리로 활동해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대부분의 피리연주자들은 특수악기를 함께한다. 태평소는 기본이고 대피리, 저피리 등등 각자의 취향, 성향에 맞는 악기를 택하는 것 같다.
그중 나는 몇 년 전에 ‘생황’이란 악기를 접하게 되었고 최근 대학원을 다니며 공부 중이다.
생황은 국악기 중에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악기이다. 하지만 생황이 가지는 모습, 특유의 음색, 연주법은 누구나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 역시 그랬고 악기를 알아가는 중이다.
Black & White for Neo quartet and Saenghwang(composer_Kwon eunsil),2018, poland Gdansk
무대에서 연주할 때마다, 더 잘하지 못한 것에 늘 아쉽다.
연주자가 본인의 실력 향상을 위한 고민은 당연한 일이지만 늘 아쉬워하는 내가 가끔 밉기도 속상하기도 하다. 어떤 기준 속에서 나는 늘 아쉬운 것일까에 고민되는 요즘이다.

그러면서 이어진 고민은 ‘나’이다. 내가 생각하는 건 무엇일까, 또 그 생각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를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나의 이야기를 담은 작업을 해보려고 한다.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볼 수 있다. 꼭 악기를 연주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가 아니다. 표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 그리고 직접 해보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된다.

05.44.59, iphone X, Shure MOTIV MV88, 1290×720, 2018
작년 여름, 수창청춘맨숀 리플레이스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었다. 청년예술가와 함께 예술바캉스를 경험한다라는 의미의 전시였는데, 당초 공연을 계획했지만 여러 사정상 전시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생각해 공연을 촬영해서 재생하려 했지만 고민하다 보니 하고 싶은 것들이 떠올랐다. 바캉스라는 것에 의미를 두어 나무숲 속 누워서 바라본 하늘 그리고 그들이 가지는 소리를 담아보고 싶었다. 만들고 싶은 모습만을 생각하며 직접 움직였다.

영상을 찍는 것도 처음이었고 소리를 담는 것도 처음이었다.
내 마음에 드는 소리를 찾기 위해 여러 숲 속에도 가고 새벽에 인적이 드문 곳으로 등산도 갔다. 이 작업 역시 나에게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그간 활동과는 다른 방법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직접 떠올리고 실행해 본 것.
바로 지금의 고민을 할 수 있게 해 준 시작점이기도 하다.
울림의 기록,(2008~2018_archive), 2019
버리듯 쌓아온 종이 뭉텅이를 붙잡고 있던 내 마음은 그것들을 모두 꺼내 펼쳐보는 것만으로도 후련했다.
한 장의 종이일 수 있지만, 그 의미를 생각해보는 지금의 나, 그리고 이렇게 글로 써보는 나의 이야기.

원고 메일을 전송하는 지금 순간까지도 쉽지 않은 마음이지만 오늘을 시작으로 계속해볼 수 있을 것만 같아 기분이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