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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리뷰 – 문학
시는 어디에서 인기척을 내는가
김수상 / 전)대구경북작가회의 사무국장
『시의 인기척』(좌),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우)
이규리 시인의 아포리즘(aphorism)이 두 권의 책으로 나왔다. 『시의 인기척』과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난다, 2019)가 그것이다. 대부분의 시인은 아포리즘을 시로 포섭하는데, 아포리즘을 따로 출간한다는 것은 그만큼 삶과 진리에 대해 오래도록 성찰하고 탐색했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아포리아(aporia)라는 말이 있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난제나 난관을 일컫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대화의 상대를 아포리아의 상태(막다른 골목)에 빠뜨려 무지를 자각하게 했다고 한다. 아포리즘은 아포리아의 다른 말이 아닐까. 모든 문제는 답으로 온다고 했다. 이규리 시인은 삶의 막막한 문제들을 시적 사유로 성찰한다. 이규리 시인은 199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앤디 워홀의 생각』, 『뒷모습』,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의 시집을 출간한 중견 시인이다. 아포리즘이 귀한 시절에 만난 책이어서 더욱 반갑다. 대상은 시인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시인은 대상이 하는 말을 통해 자신의 인식을 뒤집는다. 그렇게 대상과 시인은 주고받는 관계다. 시인은 쓰면서 통념과 상식을 뒤집는다. 인식을 뒤집지 않고 삶은 뒤집어질 수 없다. 시는 뒤집어지기 위하여 쓰는 것이다. 시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전복’하는 것이다. 인식의 전복을 통하여 삶을 갱신할 수 있다면, 우리는 두두물물(頭頭物物), 일체의 대상에 대하여 큰절을 올려야 할 것이다. 삶을 외면한 시들이 언어의 유희에 몰두하는 시절에 만난 아포리즘이어서 더욱 반갑다. 시의 수액을 머금은 잘 익은 포도송이 같은 문장들이 책의 곳곳에 알알이 박혀있다. 제한된 지면 때문에 첫째 권인 『시의 인기척』 위주로 소개하게 됨을 아쉽게 생각하며 이규리의 만만치 않은 시적 성찰의 여정들을 함께 따라가 본다.
떠오른 이미지를 잡으러 기꺼이 나비가 되는 사람. 자신이 잠시 경험한 것이 천국임을 스스로는 모른다. 천국은 그렇게 성립한다. 천국도 이미지에 다름 아니다. (시의 인기척, 002)
시인은 이미지를 쫓는 사람, 아니 사람으로는 모자라서 스스로 나비가 된 사람이다. 이미지를 통해 진리를 포획하는 순간, 천국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알고 보면 천국도 잠시 잠깐 시인 앞에 드러난 이미지에 불과하다. 이미지는 이미지를 통해 이미지로 나아간다. 나아가는 순간은 쓰는 순간이고 쓰는 순간이 시인에겐 천국이다. 시인은 ‘헛것’을 통해 ‘헛것’이 ‘헛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평소 순한 짐승이 난폭해지는 건 환경이 맞지 않다는 증거다. 그 난폭성을 내부로 돌리는 자학 또는 자해란 보통 선량한 사람이 선택하는 방법이다. (시의 인기척, 006)
관계가 이루어지면서 원하지 않는 먼지가 일어나지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먼지, 내 기침이 다른 사람을 방해하는 건 견딜 수 없어요. 내가 혼자가 되려는 이유는 나에게 있어요. (시의 인기척, 014)
그냥 당해주면 안 되나. 좀 당해주면 안 되나. 수고한 적 없이 꽃을 보았는데, 보낸 마음도 없이 빛을 받았는데, 좀 당해주면 안 되나. 좀 쓰러지면 안 되나. 난해하면 좀 안 되나. (시의 인기척, 030)
시에게도 자세가 있다면 타자를 원망하는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자세일 것이다. 회광반조(廻光返照)야말로 윤리의 자세다. 시의 칼끝이 윤리를 향해 서있지 않다면 시는 써서 무엇하겠는가.
매장에 옷을 단 몇 벌만 걸어둔다면 그 옷은 명품으로 보일 것이다. 미니멀리즘을 선호하는 것도 잡다함이 식상하기 때문이다. 희소성의 가치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결국 하고 싶은 말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견딜 수 없는 말의 홍수. 본질은 설명을 덧붙이기보다 설명을 줄일 때 드러날 것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시의 인기척, 024)
시가 선호하는 양식이 있다면 미니멀리즘에 가까울 것이다. 리얼리즘 모더니즘도 아닌, 미니멀리즘. 쓸모없는 말을 기꺼이 버릴 때 시의 자리는 생겨난다. 시인들은 말의 홍수를 견딜 수 없다. 설명하는 것은 시가 아니다. 구차한 것들은 내다버려야 한다. 줄여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시가 그 공간 사이로 떠오르고 있다.
책상 위에 커피를 쏟아버렸다. 젖은 책과 젖지 않은 책, 더 가까운 쪽이 늘 더 많이 젖었다. (시의 인기척, 029)
시인은 늘 젖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늘과 구석의 한숨, 비천한 곳에 버려진 존재들의 울음에 젖어야 한다. 시인은 한숨과 울음의 가까운 쪽에 살고 있다.
나는 아닐 불(不)자를 좋아한다. 불안, 불편, 불리, 부족, 불가능 등. 그 단어들을 오래 함께 의복인 양 입을 것이다. 불안은 이미 일상이 되어 있고 불편은 또 다른 편안이라 안다. 불리는 그것이 타인을 이롭게 하는 일이며, 부족은 넘치지 않는 가벼움이라 좋다. (시의 인기척, 031)
추상적인 개념 가운데 가장 맑은 바탕은 슬픔 아닐까. 슬픔이 의식을 통해 감각을 깨우는 일은 퍽 고급스럽다. 조금이라도 기름기가 돌면 슬픔은 저 먼저 떠나고 만다. 정신줄 놓고 있다 보면 아득히 멀어 있기 일쑤다. 불러도 가는 슬픔, 돌아보지 않는 슬픔 있다면 먼저 제자리를 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의 허위를 도려내야 한다. 가차 없이 전신을 바로 세우고 머리를 조아려야 하리라. 허락한다면 다시 차고 맑은 슬픔에 마음 에이고 싶어라. 머리 빗고 시작하고 싶어라. (시의 인기척, 081)
이 문장을 나는 시인의 시론(詩論)으로 읽었다. 시인은 불안과 동거하며 불편과 불리를 시의 자리로 삼아 부족과 불가능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니 시인의 바탕은 슬픔이 마땅하다. 시인은 기름기가 돌면 떠나고 마는 슬픔을 경배하며 자신의 허위와 싸워야 한다. 시인은 슬픔의 바닥에서 아닐 불(不)자를 잘 섬겨야 한다.
길들이면서 살아가야 하는 게 관계의 삶이라면 영원히 길들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예술의 삶이다. 길들기 전에 떠나는 일이란 애써 데워놓은 잠자리에서 나와야 하는 것과 같다. 그 속절없음. 약해지면 죽는다. 익숙해지면 다시 죽는다. (시의 인기척, 036)
어렵겠지만, 관계는 관계에서 나와보면 잘 보인다. 바깥은 관계를 벗어나는 곳이 아니라 더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무거운 탁자를 들어내고 난 자리, 환한 통로가 났다. (시의 인기척, 079)
우리는 타자를 자신의 삶 안으로 끌어들여 길들이려고 한다. 길들여지지 않으면 성내고 불화한다. 타자는 길들여지지 않으므로 타자다. 예술의 길은 관계의 삶을 떠나 영원히 길들이지 않는 길을 향해 나있다. 익숙한 것만큼 진부한 것은 없다. 철들기 전의 시간으로 이행하기, 늘 같은 자리에 있던 무거운 탁자 들어내기, 예술가의 의무이자 숙명이다.
카프카는 책을 빌리러 온 사람에게 책을 건네면서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말한다. 두세 단계의 배려를 건너뛰어 상대의 부담을 헤아리는 말에서 향기가 난다. (시의 인기척, 098)
시도 이런 자세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두세 단계의 배려를 건너뛰어 상대의 마음을 단박에 헤아리는 자세. 그런 자세 하나를 익히기 위해 시인은 평생토록 시를 놓지 않는다.
거짓 교성, 그것만큼 자괴감이 이는 것도 없다. 내 시가 그와 닮았으니 이불을 뒤집어써야 하리라. (시의 인기척, 164)
이규리 시인은 자신을 돌이켜보는 시인이기에 오히려 거짓에서 멀리 떠나 있다. 시의 감별사는 누구인가. 시인 자신이 자기 시의 감별사가 되어야 한다. 자기도 못 먹는 밥을 남에게 먹으라고 버젓이 내어놓은 저 시들은 무엇인가. 거짓으로 내는 교성처럼 거짓 시는 자괴감 때문에 스스로 멸망하리라. 자괴감은 스스로를 반성하는 힘이기에 그나마 다행이다. 언어의 유희를 하느라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는 시들이 창궐하고 있다.
어릴 때 종이인형을 만들어 옷을 입히고 이불속에 재우기도 했다. 축소한 세상과의 대화였던 셈이다. 그 안에서 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으나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종이인형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슬픈 성인의 위치에 온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은 그토록 많았으나 되는 일은 없었다. (시의 인기척, 165)
시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부터 ‘오는 것’이다. ‘쓰는 것’이 아니라 ‘써지는 것’이다. 시인이 할 일은 시가 오기를 기다리고 대상이 하는 말을 잘 받아쓰는 일이다. 시는 잘난 척하는 자에게 강림하지 않는다. 하도 낮아서 더 이상 낮아질 것도 없는, 하도 어두워서 더 이상 캄캄해질 것도 없는 자리로 시는 온다. 내가 하려고 하니 힘이 드는 것이다. 시는 시인의 몸을 통과하며 자신을 현현(顯顯)한다. 시는 ‘억지로’ 만날 수 없으며 ‘저절로’ 이루어진다. 시의 집에 이르는 도로명주소는 ‘저절로’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토록 많았으나 되는 일이 없었던 까닭은 나를 앞세우며 너무 힘주며 살았기 때문이다. 힘을 빼고, 대상을 나의 앞자리에 모시는 일, 그것이 시에게서 배운 삶의 자세다. 비로소 시가 인기척을 한다.
김수상 시인
시집으로 『사랑의 뼈들』과 『편향의 곧은 나무』가 있다. 제4회 박영근작품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