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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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 – 인터뷰
이기홍, 대구지역 오케스트라의 대부
손태룡 / 음악이론가
녹향음악감상실에서의 이기홍 선생(『대구문화』, 2005년 1월호)
바이올린 소리에 매료되다
이기홍 선생은 1926년 2월 5일 영천시 금호읍 냉천리 317번지에서 아버지 이정헌과 어머니 권갑래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1942년에 별세하여 20년이나 나이가 많은 첫 형님인 이진홍(1906∼1968, 금호양조장 경영)의 관리하에 경주중학교를 마쳤다. 바로 위 형님인 이경홍(본명 이달홍)은 일본 동양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였고, 안강 출신의 자형 홍재기(누님 이동란)는 바이올린을 전공한 음악가였다. 아울러 금호초등학교 1학년 담임이 아동문학가 윤석중(1911∼2003)이었다. 이러한 음악적 환경으로 13세 때 바이올린을 처음으로 접하고 전공하게 되었는데, 특히 자형의 바이올린 소리에 매력을 느껴 경주중학교 재학 때부터 바이올린을 다루기 시작하였다.
선생은 1947년에 서울대 음대 바이올린 전공으로 입학하여 동기생 양해엽과 함께 박민종(1918∼2006) 선생님을 사사하여 1951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직후 서울 및 부산에 위치한 해군정훈음악대(악장 박민종)에서 제1바이올린으로 2년간 활동하였다. 이후 선생은 대구로 와 미8군에서 2년간 군복무를 하고 대구여중을 시작으로 영남고, 능인고, 경북여고, 대구공고 등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였다. 아울러 바이올린으로 개인지도를 하면서 생활한 선생은 자신의 바이올린 제자들을 중심으로 현악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 단체의 시작으로 대구시립교향악단(이하 대구시향)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음악적 활동이 그의 삶 전체이며, 더욱이 대구지역 오케스트라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기홍 선생의 바이올린 독주_피아노 이경희(계성학교 강당, 1957년)
현악합주의 울림을 자아내다
1950년대 대구의 실내악은 한마디로 불모지였다. 1956년 4월에 바이올린의 이인희, 최상묵, 손진헌이 주축이 되어 경북대, 청구대, 효성여대 소속의 재학생 5명과 함께 8명으로 실내악 합주단을 구성한 바 있다. 그런데 비올라와 첼로의 연주자가 없어서 바이올린으로 그 선율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 모임을 칸타빌레현악합주단이라 명명하고 대구중앙교회 등에서 소품곡을 연주하였으나 정식적인 연주회를 갖지 못하고 해산되고 말았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이기홍 선생은 자신의 바이올린 문하생을 중심으로 현악단을 조직하였다. 그것은 1957년 3월 7일 바이올린 12명과 첼로의 전공자인 김응임과 조태석의 협조를 얻어 대구현악회를 창단한 것이다. 단원으로는 제1바이올린에 악장 안종배, 손진헌, 심상균, 이영애, 강건, 강훈 등 12명과 제2바이올린에 최영찬, 권상태, 천시권, 서성은 등 4명, 그리고 첼로에 조태석, 김응임 등 3명과 베이스에 김항기였다.
이들 20명으로 구성된 대구현악회는 그해 6월 2일 오후 3시(학생)와 8시(일반) 2회에 걸쳐 청구대학(현 중구 노보텔 자리) 강당에서 모차르트의 현악합주곡 ‘세레나데’, 포스터의 접속곡(안종배 편곡), ‘바이올린 독주와 2중 협주곡’ 등을 연주하였다. 아울러 찬조로 첼로의 김응임, 피아노의 김종환, 바리톤 이점희가 각각 출연하였다. 대구현악회의 성공적인 창단연주로 이후 이기홍 선생은 대구교향악단으로 확대하여 새롭게 조직하였다.
대구현악회 창립연주회에서의 이기홍 선생(청구대학 강당, 1956년 6월 2일)
오케스트라를 조직하고 운영하다
이기홍 선생은 대구현악회를 중심으로 현악기 연주자와 2군군악대 관악기 연주자의 협조로 대구교향악단으로 창단하게 된다. 창단 이전에 대구의 중심적 음악인들로 구성된 대구교향악협회를 먼저 조직했는데, 그 발기인은 강영기, 김기우, 김종환, 김진균, 김흥교, 성기용, 이경희, 이기홍, 이상필, 이점희, 임성길, 장안라, 최병준, 하대응 등이었다.
대구교향악단은 1957년 12월 19일 문화극장(구 한일극장)에서 창립기념 연주회를 개최하였다. 합창지휘에 임성길, 작곡 및 편곡에 김진균, 피아노에 이경희・김종환・이재원이 맡았다. 연주곡은 슈벨트의 ‘미완성 교향곡’, 자이츠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5번'(협연 강효), 모차르트의 ‘야상곡’, 헨델의 ‘수상음악’, 베르디의 <춘희> 중 ‘운디 펠리체’와 ‘축배의 노래'(소프라노 장안라, 테너 백남영), 슈트라우스의 ‘푸른 도나우 왈츠’이었다.
연주자는 제1바이올린에 악장 문길용・손진헌・이영애・이인희・강건・김진문・박관돈・전성태, 제2바이올린에 안종배・송인식・강효・손진만・이근우・이상서・김수생・한갑선, 비올라에 천시권・구경자・정태호・서성은・김동식, 첼로에 조태석・김준덕・조현진・배종구, 더블베이스에 김항기・박영실・김종원이 맡았다. 또한 플루트에 허영운・한병성, 오보에 이상화・변상수, 클라리넷에 박은규・김선홍, 바순에 윤여정, 김인철, 트럼펫에 유준영・김동수, 호른에 이축성・천창욱・최성기, 트롬본에 이성국・송주상・박두용, 튜바에 정광덕, 드럼에 오재춘・사성기, 팀파니에 현천수가 담당하였다.
대구음악가협회의 발기인(낙동강다방, 1956년 1월 8일)_앞줄 왼쪽 1번이 이기홍 선생
1957년 12월 19일에 창단연주회를 가졌던 대구교향악단에서는 1년도 안되어 심한 재정난으로 말미암아 재정비의 고충을 겪는다. 그래서 이기홍 선생은 하영수(한일미유주식회사, 경일대 설립자) 사장을 단장으로 추대하고, 명칭을 대구관현악단으로 바꾸어 활동하면서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재탄생시켰다. 1958년 10월 6일 창단공연을 시작으로 5년간 하영수의 후원은 대구관현악단의 명맥을 잇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1960년 7월 19일 계성학교 강당에서 있은 제4회 정기공연 일환으로 4월혁명기념음악회를 공연하였다. 이 공연은 대구의 시인과 음악가들이 새롭게 혁명가요 6곡을 창작하여 전국 최초로 소개한 것이다. 또한 1962년 4월 20∼24일 경주에서 있은 제1회 신라문화제에 대구관현악단이 초청되어 불국사 계단에서 축하공연을 한 바 있다. 1962년 5월 29∼30일 이틀간에는 5・16혁명 1주년 기념을 겸하여 계성학교 강당에서 제6회 공연을 가진 바 있다.
대구관현악단은 정기연주 4회와 임시연주 6회를 가졌었다. 1958년 10월 6일 창단공연을 하였던 대구관현악단은 또다시 재정난으로 운영이 침체되자 이기홍 선생이 주축이 되어 대구방송관현악단으로의 창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위원장에 박경원 경북도지사, 부위원장에 강원채 대구시장, 유치환 한국예총 대구지부장, 단장에 한남석 대구방송국장이 맡았다. 이 모임에서 대구교향악단을 대구방송관현악단으로 개명함으로써 새로이 창단하게 되었다.
이기홍 선생은 1962년 3월 12일 오후 7시 40분부터 대구방송국에서의 제1회 방송을 시작으로 월 2회 정기연주회를 구상하였다. 본 단체의 임원으로는 한기욱, 하대응, 이삼근, 김기우이며, 단장에 문길용과 연주부장에 안종배가 각각 맡았다. 대구방송관현악단에서는 1963년 4월 16일부터 4개 도시 순회공연을 하였는데, 소프라노독창에 윤춘자, 피아노독주에 류옥희와 권정희, 테너독창에 백남영이 각각 맡았다.
2군사령관 관사에서 함께한 분들(1969년)_오른쪽부터 이기홍 선생, 채명신 사령관, 김만복 지휘자, 김준성 대구은행장.
대구시립교향악단을 출범시키다
1963년 2월 20일에 창단공연을 하였던 대구방송관현악단은 이듬해인 1964년 11월 25일 이기홍 선생에 의해 대구시립교향악단으로 창설된다. 창설 이전 그해 6월에는 추진위원을 결성하였다. 대표에는 백기만이 맡았으며, 위원에는 여상원, 김계수, 하대응, 이점희, 김진균, 김종환, 강영기였다. 대구시는 조례에 의해 정식으로 대구시청 회의실에서 대구시향의 발단식을 갖고 초대 상임지휘자로 이기홍을 선임하였다.
이렇게 창단된 대구시향은 그해 12월 17∼18일 이틀 동안 KG홀(현 대구콘서트하우스 자리)에서 40명의 단원으로 창립기념공연을 가졌으며, 당시 악기를 기증한 하영수 사장에게 감사장을 수여하였다. 창립공연에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1번 다장조’, 바리톤 이점희의 독창으로 현제명의 ‘그 집 앞’과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더 날지 않으리’, 최명자의 피아노협연으로 리스트의 ‘헝가리안 환상곡’, 관현악 연주로 김희조 편곡의 ‘천안삼거리’・’베틀가’・’방아타령’, 롯시니의 서곡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글린카의 ‘루스란과 루드밀라’ 등이 연주되었다.
대구의 원로음악가(1996년)_둘째 줄 오른쪽 2번이 이기홍.
이렇듯, 이기홍 선생은 대구지역의 1세대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오케스트라의 창시자이다. 1956년 6월 자신의 바이올린 문하생들을 중심으로 대구현악회를 조직하여 청구대 강당에서 공연함으로써 대구지역 현악의 울림이 시작되었다. 이 단체는 1957년에 대구교향악단으로 확대됐으며, 1958년에는 대구관현악단으로, 1963년에는 대구방송교향악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마침내 1964년에는 대구시향으로 창단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모두 지휘자였던 이기홍 선생이 일구어낸 업적이다.
1950년대 대구의 실내악은 불모지였기 때문에 선생의 활동이 더욱 빛난다. 당시 선생이 교향악 활동을 하는 데는 전적으로 대구음악가협회의 동료들을 비롯하여, 한일미유주식회사 사장 하영수, 경북대 체육학과 교수 최용호, 국회의장 이효상, 대구은행장 김준성, 대구방송국장 한남석, 한국예총 대구지부장 유치환, 경북도지사 박경원, 강원채 대구시장 등의 지지 및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사실이다. 이러한 분들을 선생이 직접 만나 설득하고 도움을 요청하여 이루어낸 결과이다.
아울러 선생의 개인지도를 받은 대표적 바이올린 연주가는 손진헌(대구관현악단 단원), 심상균(전 영남대 교수), 이영애(경북여고), 구경자, 강건, 강효(세종솔로이스츠 예술감독), 정덕성(미국 거주), 임석영(전 대구시향 단원), 이영화, 윤경호 등이다. 2018년 12월 28일에 노환으로 작고한 이기홍 선생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는 과제로 남아있다. 앞으로 대구시, 대구음악협회, 대구시향, 대구원로음악가협회 등에서의 추모음악회 및 그의 업적을 기리는 주기적인 행사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