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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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도, 원로의 메시지
김수정 / 오페라하우스 교육홍보팀장
“오랜만에 오래전 공연장에서의 분위기를 느꼈어요. 로비에서부터 커튼콜까지, 감동의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5월 말, 대구오페라하우스 기획공연에 함께한 어느 분의 관람후기를 다시 한 번 읽어보며 ‘오래전 공연장에서의 분위기’를 새겨본다. 요즘의 공연장 분위기와는 다른 점이 있다는 의미일 것 같다. 늘 공연장에서 근무해 온 입장이라 막연하지만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다. 지금처럼 문화예술을 애써 산업의 범주에 끼워 넣지 않던 시절, 공연의 수준만이 아니라 저마다의 다양한 이유로 감동을 안고 가던 늦은 밤 귀갓길의 뿌듯한 만족감 같은 것이 아닐까.
실로 오랜만에 그런 느낌을 가졌다면, 그건 원로 성악가 테너 K의 힘이라고 생각된다. 68학번. 우리 나이로 올해 71세이시니 원로라는 타이틀을 드려도 괜찮지 않을까.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는 원로예술인을 가리켜 만 70세 이상이면서 이전 예술 활동 경력이 20년 이상인 예술인을 의미한다고 정리한 바 있다. 이날 공연은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제목 아래 테너 K와 그 제자들 –물론 그 제자들 역시 또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마치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듯 어린이합창단의 무대에서 시작해서 테너 K의 무대로 마무리되었다. 그는 흐르는 강물의 어느 즈음에 와있을까. 커튼콜과 공연 뒤 로비에서의 박수와 함성은 근래 보기 드물었다 싶을 만큼 뜨거웠다. 공연이 끝나고도 한참 뒤까지 로비는 북적였다.
최근 우리 지역에는 원로 예술가를 중심에 둔 기획이 두드러졌다. 지난 3월, 수성아트피아는 대구원로음악가협회와 함께 음악회를 개최하였다. 두 번에 걸친 공연에서 피아노 솔로, 테너 독창, 클라리넷 독주를 담당했던 출연진 전원은 60세 이상이다. 수성아트피아 측에서는 원로예술인 음악회가 올해 처음이지만, 앞으로 지역특화브랜드공연으로 활성화한다는 계획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날 행사는 세대 간 교감, 그리고 지역 예술인 교류의 촉매제 역할을 기대해서라고 딱 집어 알려주었다. 같은 3월, 대구시향의 정기연주회에서는 대구시향 2대 상임지휘자를 역임하신 원로 작곡가 W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음악 ‘운율’에 연주되어 큰 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한편 대구미술관에서는 올해 97세이면서 80년째 작업 중이신 현역작가 J화백의 회고전이 지난달까지 열렸다. 여러 소묘와 수채화 등 작가의 초기 작품부터 1950년대 후반의 추상작업, 2000년대 이후 근작들까지 모두 130여 점이 선보였으니, 전시규모가 상당했다. 전시를 기획했던 큐레이터는 이 전시를 보고 돌아가는 관람객들이 따뜻한 마음을 갖고 가기를 원했다.
지난해로 시간을 돌려보면, 대구연극협회가 2017년부터 시작한 ‘청춘연극제’가 60대, 70대 원로배우들을 중심으로 펼쳐졌고, 때마침 작품도 ‘어떤 노배우의 마지막 연기’로 무명의 노배우가 겪는 삶의 황혼기를 이야기했다. 늙은 배우의 고단한 삶이 작은 무대에 펼쳐지자 나이 든 사람들,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쉬 감정을 나눌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같은 해 봄에는 또 81세를 맞이했던 서양화가 C화백의 개인전이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대규모로 진행돼 지역 미술계의 맥을 재조명하는 기획으로 역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C화백은 2000년대 중반부터 그려오고 있는 ‘꽃그림 시리즈’ 중 128점을 선보였다고 하니, 최근까지도 얼마나 활발하게 창작활동에 매진해 왔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전시를 기획했던 대구미술협회 측은 인간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연의 꽃들을 그린 작품들이 사람들에게 울림이 큰 감동을 느끼게 한다고 전했다. 몇 달 전 우연히 대구예술발전소에서 뵈었던 또 다른 서양화가 C화백도 한국 모노크롬회화의 거장이라는 멋진 배경설명과 함께 최근까지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신다. 1943년생이시니 76세가 되셨나보다. 1950년생 L화가도 빼놓을 수 없겠다. 그 작품이나 작가 본인이나 생기발랄하고 영롱한 느낌에 차마 원로예술인이라고 구분하기가 어색하기는 하지만.
누구에게나 시간은 파도처럼 밀려든다. 그리고 그 시간의 파도에는 폭력성이라는 속성이 있다. 바위가 부서져 모래가 되듯, 강철이 소금물에 부식돼 붉게 사라지듯 제아무리 강한 것도 이길 수 없는 힘이다. 물리적인 부분이라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정신적인 부분은 다른 영역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이테가 늘어나듯 경험이 두터워진다는 것이지, 반짝이던 창의성이 빛바랜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주변에 계시는 원로예술인들을 떠올려보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막상 관심 갖고 돌아보며 손가락을 꼽고 헤아려보면, 우리 지역 예술 전 분야에 연세 지긋하신 그분들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마치 그들이 전시장에서, 작업실에서, 무대 위에서, 무대 밖에서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계시는 듯하다. 그리고 그 느낌은 따뜻함이다. 교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