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는 원로예술가들이 현역으로 소환되는 여러 예술의 장에서 대개 회고조의 어법이 적용되는 것을 본다. 과거의 일은 추억 보정이 이루어지며 낭만적으로 미화되기 마련이다. 이런 점은 선배와 스승 세대에 대한 후속 세대의 예의다. 이번 여름호 특집 기사에 참여한 필진들의 태도에서도 그렇게 예를 갖춘 시각을 볼 수 있다. 특집만이 아니다. 예컨대「대구예술의 힘」과 같은 연재 기획이 전제하는 생각은 “척박한 환경에서 애쓴 과거 예술”과 “덕분에 풍요로운 지금 예술”이라는 구분이다. 대문의 편집 책임을 맡은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런 견해에 찬성하다. 하지만 나는 그러면서도 이른바 실버 세대로서의 예술가 집단에 대해 습관적으로 이루어지는 겉치레 대접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반복된 칭송은 종교 의례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일정한 주기로 돌아오는 여러 행사는 그 교단이나 종파의 도그마를 강화한다. 예술 체계도 일정 부분 종교 체계를 닮으려 한다. 예술이 종교에서 떨어져 나온 제도라는 것은 이제 당연해진 학설이다. 예술의 특정한 흐름이나 개인은 신화화되는 경향이 있다. 언론이나 비평, 심지어 정치는 그러한 예술의 신비화를 거든다. 그리 대단하지 않은 사회학자로서 나는 예술에서 작동되는 권위적 절차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잔칫집에 재를 뿌리는 일은 무례한 일이다. 그러나 예술을 가운데 놓고 생각할 때, 여러 기능으로 분화된 제도나 절차가 겉 다르고 속 다른 방식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점은 이따금 일종의 모순으로 드러난다.
현실 속에서, 그와 같은 딜레마는 마땅히 존경받고 주목받아야 할 실버 세대의 예술가들을 도리어 소외시키는 역설을 낳는다. 원로라는 낱말의 사전적 정의와 별도로, 사회 공동체는 그들을 뒷방 늙은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아는 한 대부분의 시니어 아티스트들은 자신이 그와 같은 취급을 받는 일에 무력감 내지 불쾌감을 가지며, 동시에 그런 부정적 의식을 드러낼 때 자칫 “꼰대”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는 점을 우려한다. 이런 정서는 현재 한국 사회의 사회 갈등, 예컨대 계급 갈등, 젠더 갈등, 지역 갈등 등과 함께 지적되는 세대 간 갈등의 한 가지 모습일 수 있다.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예술계 내 세대 간 갈등만큼 세대 내 갈등도 자주 벌어지는 현상이다. 원로예술가들의 행사장에서 그중 누군가의 이름이 불리지 않았거나, 어떤 이보다 늦게 불린 일 때문에 옥신각신하는 소동은 흔한 일이다. 세대 간 갈등은 너무나 명백한 한국의 주요 모순이며, 각 세대는 이 깊은 골을 웬만해선 건드리지 않는다. 대신에 그 보상심리는 같은 세대 내 동료 선후배 예술가들 사이에 위계와 평가 경쟁으로 우회해서 드러난다. 여기에 관해서는 공적 언론 혹은 전문적인 학계의 관심을 통하여 좀 더 본격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이 고령사회로 진입한 배경 아래 현재 60세에서 65세로 정년을 연장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대문」은 실버세대의 문화예술에 관하여 이와 같은 접근의 첫 발을 떼고자 한다. 특집 기고에서 김지영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정책기획팀장은 노년기 예술가들에 관한 지원 방안을 공공부조의 입장에서 다루고 있다. 눈여겨볼 부분은 원로예술가 복지 지원책에 관하여 현장 전문가가 가지는 일종의 딜레마다. 필자는 예술인 복지 또한 일반 사회보장 시스템에 포괄적으로 적용되는 방향을 가져야 된다고 주장한다. 글에는 지금까지 국가 차원에서 전부 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술인복지라는 수단을 어쩔 수 없이 갖추게 되었다는 배경이 소개되고 있으며, 예술이 가지는 특수성이 사회복지의 보편적 원칙과 맞부딪히는 모순을 지적한다.
대구 북성로에서 독립서점 공동체를 꾸려가고 있는 김인혜 더 폴락 공동대표는 문화 생산자인 원로예술가 아닌 문화 소비자 입장에 있는 다수의 노인들이 문화를 수용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이 글은 적지 않은 노령 집단이 찾는 도심 언저리의 소비 지구가 하나의 서브컬처로 형성된 경관을 묘사하고 있다. 글에서 언급된 북성로와 향촌동 일대는 지자체에 의해 실버스트리트 특화지구로 추진되는 곳이다. 여느 대도시의 사정과 비슷하게, 이곳 또한 보존과 철거, 공적 도심재생과 부동산 매매 사이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속사정을 가진다. 기고문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낭만적으로 소개한다.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실버영화관과 같은 장소는 실버세대의 문화수용에서 매우 독특한 의미를 가지는 사례로 꼽을만하다. 하지만 이 관찰기는 예컨대 노인들의 성 문화와 정치적 견해, 소득 격차와 같이 민감한 문제까지 건드리고 있지는 않다. 이 기획이 좀 더 면밀한 분석을 이루려면 인류학적 참여관찰법 같은 중장기 현지 조사가 필요했으며, 여기에 실증적인 연구가 보완되었어야 한다. 가령 그 일대를 찾는 실버세대를 학력별 성별 소득별 연령별로 집계하여 세부적인 장소의 분화 및 점유를 요인 분석하는 절차는 논문 형식으로 기술하는 학계의 과제로 제안하고 싶다.
대구오페라하우스 김수정 교육팀장은 원로예술가들의 활동사례를 여러 장르에 할애해서 소개하고 있다. 본문에서 필자는 원로 예술가들의 실명 대신 영문 첫 글자를 소개하며 예술활동을 하는 당사자보다 현재 지역의 사례와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 기고문은 성공한 노년 예술가들의 사례를 주로 다루었으므로, 보충하는 형식의 또 다른 글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노년층 예술가의 활동 사례를 1. 국제/전국적 명성을 획득한 그룹, 2. 지역 혹은 서브장르 수준 내에서 성취를 이룬 그룹, 3. 생애에 걸쳐 눈에 띄는 경제적 보상 내지 평단의 주목을 받지 못한 그룹, 4. 취미 또는 동경심에서 뒤늦게 예술 창작에 뛰어든 일반인 그룹으로 나누어서 각 그룹의 범주와 위계 차이에 따라 분석하는 시도다.
실버세대의 문화예술을 다룬 우리의 특집은 손태룡, 최영애, 임언미의 필진으로 짜여진 「대구예술의 힘」에서 이기홍 대구시향 상임지휘자를 기린 글과도 직접 맥을 같이 했다. 여전히 현직에서 활동 중이지만 이제 대가로서 사회적 승인을 얻은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공연 리뷰를 다룬 봉산문화회관 이정희 선생의 리뷰도 관점을 공유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젊은 세대의 예술가들에 관한 글들과 대비를 이룬다. 예컨대 대구미술관 이동민 학예연구사가 쓴 청년미술 단체전에 관한 비평에서도 조금씩 다른 연령대 그룹의 출품작을 청년미술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다룰 수 있는지에 관한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문화향유에 있어서 새로운 시각의 효용성을 다룬 서울문화재단 이승주 선생의 텍스트는 이번 호를 통틀어 가장 흥미로운 글이다.
지금은 문화계 여러 곳에서 이른바 실버세대가 일으킨 바람이 불고 있다. 카바(CAVA) 라이프를 맡고 있는 최서연 디렉터의 뉴트로 현상에 대한 분석에서도 드러나듯이 신구세대의 문화접변은 단순히 문화예술계의 엘리트들만 감지하는 유행이 아니다. SNS와 대중매체에는 우리 통념의 선을 뛰어넘은 나이의 패션모델이나 작가들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 모두 우리가 박수를 보낼 일이다. 물론 그들 실버세대 유명인들과 원로예술가라는 개념 사이에는 조금 차이가 있다. 원로예술가는 훨씬 이전부터 일정한 분야의 예술 활동을 끊어짐 없이 해 온 이들이다. 생물학적 연령대의 높고 낮음, 활동 경력의 길고 짧음에서 원로예술가와 실버세대 문화인, 그리고 청년예술인들은 서로 분절된 진영이 아니다. 예술계는 이 모두를 포용하는 길로 나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