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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리뷰_신간소개
슬픔을 거느린 개성적인 상상력과 감각의 언어들
김문주 / 문학평론가, 영남대 교수
류인서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놀이터』가 발간되었다. 2001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하여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2005), 『여우』(2009), 『신호대기』(2013) 등의 시집을 상자한 그녀는 잘 짜여진 서정의 세계와는 다른, 개성적인 감각과 다채로운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 왔다. 사물 대상에 대한 남다른 시선과 감수성, 그리고 무엇보다 언어에 대한 독보적인 감각 위에 기초한 그녀의 시들은 일상 세계를 새롭게 경험하게 하는 즐거움을 준다.
나의 손에 손목 잡힌 얄따랗고 단단한 슬픔입니다./손거울 보듯 들여다봅니다./누군가요? 유령처럼 눈 코 입이 없는 이 얼굴은./얼굴이 아니면/손가락 없는 손바닥, 발가락 없는 발바닥,/손가락 대신 발가락 대신 몇 개의 현을 빌려준다면 그의 몸 비파족族의 악기라도 될까요./울림통이 없으니 들리지 않는 노래 될까요./듣지 못하는 귀 될까요.//젖은 그의 손목을 놓친 적이 있습니다.
– 「주걱」 전문
이번 시집에서 가장 정연한 전개를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인, 소품에 속하는 이 시에서 시인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주걱을 새롭게 읽어낸다. “유령처럼 눈 코 입이 없는 얼굴”, “손가락 없는 손바닥, 발가락 없는 발바닥” “비파족의 악기” “들리지 않는 노래”로 이어지는 시상(詩想)은 무심한 주걱의 형상을 의미 있는 사물로 감수하게 한다. 물론 주걱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들을 가로지르는 것은 여성적 슬픔이며, 그 배후에는 여성의 삶에 대한 시인의 생각이 드리워져 있다. ‘주걱’에는 마치 “손거울 보듯” 비쳐지는 여성적 삶이 어른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처음과 끝에 배치된 “얄따랗고 단단한” ‘손목’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밥을 준비하는 자의 생을, 생생한 감각으로서 되살게 한다.

별로 어렵지 않게 펼쳐나갔을 법한 이 시의 시상 전개 양상은 류인서 시의 작법의 일단을 보게 한다. 시의 소재가 환기한 이미지들과 이미지에서 연상된 사물들을 서로 엮여서 한 편의 작품을 꾸리는 이러한 방법은 사물에 대한 감각적 연상과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물론 이러한 작업은 언어의 질감에 대한 각별한 감수성 위에 기초하고 있다.
핏덩이 진 마음을 손에 들고 떠듬거리다 미로 같은 혓바닥 위에 마음을 내다 버리고 온 날이다/젖배 곯은 마음이 마음마음마……꿈틀거리며 음마 쪽으로 기어간다/……그러니까 음마 여기 살고 있었던 거네, 마음의 냄새 지문이 엄마였던 거네/음마음마 이것은 내 붉은 손 잡아준 배냇적의 말, 모음 삼각도 탯자리를 짚고 걸음마 떼던 소리/울음 그친 내 맘에게 엄마라 불러보는 날. 안겨오는 늙은 모음들, 알처럼 먹먹해서
– 「방언」 전문
제목은 ‘방언’이고, 시의 내용은 마음에 관한 것을 적고 있되, 시상은 언어적 연상에서 비롯되었다. “마음마음마……”에서 “음마음마”로 하여 엄마로, 그리고 모어(母語)인 방언으로 옮겨가는 방식은 류인서의 시작(詩作)이 언어에 대한 유희적 감각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임을 시사해준다. 실제로 적잖은 시편들과 구절들이 언어 놀이, 혹은 이와 결합한 발랄한 상상력에서 발아한 것으로써 그녀의 시적 자양이 시의 매재(媒材)인 언어에 대한 각별한 감각에서 연유한 것임을 잘 보여준다. 물론 그러한 감각들의 배후에는 시인의 정념이 가로놓여 있으며, 특히 이번 시집에는 슬픔의 감정이 보다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어떤 아침은, 아침임을 속죄하고 싶어 한다./그런 날은 마음 울에 가둬 기르던 양 한 마리 거친 들판으로 내몬다./닦을수록 커지는 얼룩들의 창에는/산문적으로 두꺼워지는 안개와 안개가 만드는 묽은 풍경,/시든 예언처럼 쉽게 풀어져 창문마다 입술을 주는 배고픈 고백들,/불탄 나무 우듬지에서 새소리가 태어날 때/쫓겨난 숫양이 빈 들을 위로할까./뾰족 파도를 닮은 초록 뿔이 그 양을 키워낼까./종소리를 찾아 종탑으로 올라간 마을 아이들/돌아오지 않는데
– 「희생」 전문
류인서의 시에서 사상(事象)이나 현실이 시로 고스란히 이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시인은 대상 사물을 자신의 감각과 내면으로 받아낸 형상으로서 세계를 드러낸다. 이번 시집에 곳곳에 배어져 있는 슬픔은 개인의 생과 일상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적잖은 시편들은 우리 사회가 경험한 비극적인 사건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 시의 착상(着想)은 ‘어떤 아침에는 속죄하고 싶어진다’는 감정일 것이다. 이 속죄하고 싶은 감정이 “양 한 마리”를 상기시켜서 “마음 울에 가둬 기르던 양 한 마리를 거친 들판으로 내몬다”는 구절이 나왔을 것이고, 다시 속죄의 감정은 슬픔의 형상적 이미지인 안개로 발전하여 슬픔의 장벽과 눈물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었다. 오랫동안 눈물의 이미지로 그려져왔던 안개를 시인은 “시든 예언처럼 쉽게 풀어져 창문마다 입술을 주는 배고픈 고백들”로 새롭게 그려낸다. 이 구절에는 비극적 사건에 대한 시인의 마음의 고통과 기원이 배어 있는 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가 슬픔의 감정으로 침강(沈降), 혹은 침잠(沈潛)하지 않은 것은 형상적 감각이 그녀의 시에 지속적인 탄성을 유지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시의 소재가 된 사건과 희생자들을 “뾰족 파도를 닮은 초록 뿔”과 “종소리를 찾아 종탑으로 올라간” “돌아오지 않는” “마을 아이들”로 표현함으로써 시를 감정의 수렁에서 건져내고 있다. 이러한 시적 구성은 시인의 개성의 발현으로 어찌 보면 류인서 시의 생래적인 진원이자, 그의 시세계의 현재를 규정하는 핵심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시집의 서시격에 해당하는 다음의 시편에서 우리는 류인서의 시적 작업의 성격을 생각하게 된다.
대륙의 모서리에 부딪치면서 방향을 바꿔 흐르는 해류, 죽은 쌓인 초록 해안선을 따라 두 발의 변온동물군群이 이동하고 있다. 물살 센 작은 섬의 어부들은 밤새 바다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그물의 긴 끝을 바닷가 큰 바위에 단단히 묶어두고 있었다. 바위 위에 앉은 해녀들이 긴 호흡 느린 곡조의 노래를 부르는구나. 너도 잠수부처럼 배를 버리고 물결치는 물의 어둠 안으로 들어간다.
– 「감정선」 전문
감정이 흘러넘쳤던 조선의 시에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켰던 90여 년 전 정지용의 <바다 연작>을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다. 이 시는 파도치는 해안선의 형상을 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방향을 바꿔 흐르는 해류”, 이동하는 “변온동물군”의 형상은 우리에게 해안가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 시가 그려내고 있는 해안가의 풍경은 시인의 시작(詩作)에 자양이 되는 보이지 않는 감정과 감정의 변화, 그리고 이를 포착해내는 시인의 시적 작업에 관한 비유일 것이다. “밤새 바다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그물의 긴 끝을 바닷가 큰 바위에 단단히 묶어두고 있는” 섬의 어부들의 작업은 감정을 감각으로 길어올리는 시작의 비유적 형상일 것이며, 시의 결미에 그려진 “잠수부처럼 물의 어둠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이번 시집이 그려내고자 하는, (감정의) 심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의 어둠 안”, 아마도 그곳은 시인이 탐색하고자 한 어떤 미지의 지점, 혹은 낯설지만 갈망하는 새로운 어떤 진경, 나아가 자기 세계에 대한 갱신의 염원에 속한 형상이리라.
이곳의 약속은/’오직 고요할 것’//블라인드 틈으로 스며든 그늘이/탁자를 삼키고/꽃병뿐인 액자를 삼킨다//침대 위에는/읽다 펼쳐둔 책처럼/그의 벗은 엉덩이가 있다//모서리 희미한 창문에다/세들이 흉강의 남은 빛을 베껴 넣는다/소리의 그늘까지가 빛의 유희인가//숨소리는 내가 읽은 드물게 에로틱한 페이지/간빙기의 따뜻함이 조금/세속적인 저녁 기도에 녹아든다//우리가 모래의 책이라면/그의 엉덩이를 펄럭이는 사구라 해도/이상하지 않다//석고 가루와 물을 굳혀 만드는 입체 조형물처럼/그의 엉덩이는/내가 안경 없이 읽고 싶은/뜨겁고 서늘한 페이지들//동요하는 세계에 대한 고백처, 이곳은/우리가 방문한 언덕 마을의 태연한 하루//사막에는 안전 기지가 없다네/나는 내 사랑을 복제한다
– 「묵독 파티」 전문
시인이 부리는 언어의 ‘놀이터’를 방문한 이들이 경험하는 재미 중의 하나는 시의 제목과 내용이 갖는 적당한 긴장이다. 류인서의 시편의 제목은 대체로 단순하고 간명하면서도 시의 내용과 묘하게 엇걸쳐 있어 서로를 생산적으로 견인하는 역할을 한다. 시의 제목은 ‘묵독’과 ‘파티’라는 상반된 의미의 어휘가 나란히 결합되어 있는데, 내용 역시 고요함과 관능이 함께 자리하고 있어 “블라인드 틈으로 스며든 그늘이” 탁자와 액자를 삼킨 시의 공간을 숨소리 들리는 에로틱한 관능의 세계로 숨 쉬게 만든다. “그의 엉덩이는 내가 안경 없이 읽고 싶은 뜨겁고 서늘한 페이지들”, 그늘과 빛이 묘하게 갈라놓은 공간에서 “펼쳐둔 책처럼” 놓여 있는 “그의 벗은 엉덩이”의 형상은 시인이 향유하고자 하는 감각의 순수한 이미지의 영토를 상징하며, 그 세계는 관능 속에 내장된 생생한 생명력이 보존되어 있는 감각의 제국이자 고요한 빛이 가득한 환희의 영도(零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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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시를 뒤적거리게 만드는 기묘한 매력이 있는 이 시집에서 우리는 개성적인 감각이 펼쳐 보이는 삶에 대한 새로운 성찰과 감수성을 만나게 된다. 그녀의 시가 가닿은 “물의 어둠 안”, 앞으로 류인서의 시 세계가 새롭게 펼쳐낼 “물의 어둠 안”의 진경(珍景)들이 다시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