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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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힘 – 인터뷰
현실의 지평을 넘어 선 소신의 삶
인터뷰이 : 김익수(영남대 명예교수/조각가)
인터뷰어, 정리 : 최재우(금수문화예술마을 대표)
최재우 : 안녕하십니까? 교수님께서는 김윤수 선생님의 동생이시면서 영남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오랫동안 함께 근무하셨는데, 동료 교수 이전에 형님으로서의 김윤수 선생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김윤수 선생 추모식에서 유족 대표로 인사를 하고 있는 김익수 영남대 명예교수
김익수 : 형님은 1936년 경북 청하에서 태어나 아버님이 교장으로 계시던 청도 문명국민학교를 1948년도에 졸업했어요. 아버님은 일제 강점기에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초등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하셨는데, 민족주의 사상이 철저해서 가시는 학교마다 일본인 교장들과 충돌했어요. 형님의 강직함과 민족주의 사상은 아버님의 영향이 컷을 것이라 생각해요.
초등 졸업 후 중학교는 대구로 진학했고, 한국 전쟁 중인 1951년 경북고등학교로 진학해서 당시 중학생이던 나와 함께 자취생활을 했지요.
고교 시절엔 야구부로도 활동했는데, 운동 중 투수의 공을 맞아 허리가 골절되는 심각한 부상을 입는 바람에 1년을 휴학했지요. 형님은 학창시절 독서광이라 할 만큼 책을 많이 읽었는데 병상에 누워서도 책을 많이 읽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195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여 당시 미학과의 소속 대학인 미술대학을 다녔어요. 졸업 후 잠시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미학 전공으로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서울대에서 시간강사를 하다가 학과 내 문제에 관계되어 전임이 못되던 중 우여곡절 끝에 1973년 37살의 나이로 이화여대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지요. 그 즈음 <한국현대회화사>를 출판했는데 당시의 젊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지요.

최재우 : 김윤수 선생님이 이화여대를 거쳐 영남대로 오시기까지 많은 사정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
김익수 : 네. 이화여대에 재직할 때는 서슬이 시퍼렇던 유신체제였는데, 1973년 장준하 백기완 선생 등과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하며 ‘개헌 청원 30인 선언’에 참여, 1974년 백낙청 교수와 홍성우 변호사 등과 ‘민주회복 국민회의’에 참가하였으며,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와중에 여러 차례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다가 정보부에 구속되어 감옥살이를 하면서 고문, 탄압 등 고초를 겪었어요. 그 사이에 당국의 강압으로 대학에서 해직되었지요. 이 사건은 최근 검찰직권으로 재심청구 되어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인 2018년 11월 21일 무죄 판결이 내려졌지요.
대구로 내려와서 영남대 재직 시에도 ‘이 시대의 깨어있는 지식인이 취해야 할 행동이라는 양심의 명령에 따라’ 사회 정의를 위해서 몸을 사리지 않는 바람에 해직과 복직, 다시 해직 그리고 재복직의 과정을 거쳤지요. 현실적으로 닥치는 어떠한 불이익도 감수하면서 신념을 굽히지 않고 소신껏 살았는데 이런 모습은 평생에 걸쳐 일관되었다고 생각해요.

영남대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재직시 학생들과 함께한 답사.
서있는 사람들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유홍준 교수, 민주식 교수, 김윤수 교수.
최재우 : 네. 저도 선생님께서 젊은 시절 감옥살이까지 하는 힘든 기간 동안 건강을 많이 해치셨다는 얘기를 직접 들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평소 그런 점을 전혀 내색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항상 좋은 모습을 보여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김익수 : 세상에는 훌륭한 선생들이 적지 않지만 형님 주위를 살펴보면 유독 따르는 제자들이나 후배들이 많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울대 강사 시절부터 미학과 학생들뿐 아니라 외교학과, 사회학과 등 타과의 학생들도 소문을 듣고 알음알음으로 찾아와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지요.

이름만 대도 알만한 유홍준, 채희완, 김민기, 이애주 등 미술뿐만 아니라 연극 영화 음악 무용 등 예술 각 방면에서 특히 문화운동권 전반에 걸쳐 여러 제자들이 있었죠. 이들은 나중에 민족예술 진영의 중심에서 활동하며 한국예술의 지평을 넓히는데 앞장선 인물들이죠.
한편, 영남대에서도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었는데 미숙한 제자들의 글을 꼼꼼히 읽어보고 나서 잘 된 점과 잘못된 점을 하나하나 짚어주면서 이해시키곤 했지요. 그야말로 제자들에게 깊은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 참된 스승의 길을 걷는 모습을 보여 동료 교수들 사이에서도 형님을 따르는 이가 많았어요.
그래서 1989년 영남대학에서 교수들이 총장을 직접 뽑은 초대 민선 총장 체제로 출범했을 때 형님이 교무처장으로 발탁되어 학교를 획기적으로 개혁하게 됩니다. 많은 일들 중 교과과정 개편을 예로 들면, ‘문학과 사회’ ‘민중문화론’ ‘민족연희’ ‘제국주의의 이해’ ‘북한의 정치와 사회’ 등 당시의 다른 대학에서는 볼 수 없었던 매우 앞선 내용의 자유교양과목들이 개설되었는데 이것은 평소의 소신에 의한 것이었지요.

최재우 : 김윤수 선생님께서는 대학이라는 상아탑에 갇히지 않고 현장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셨는데요.

대구지역의 미술가들. 뒷줄 오른쪽부터 반상호, 김영동, 유홍준, 정하수, 최재우, 앞줄 왼쪽부터 최수환, 김윤수 선생.
김익수 : 7,80년대의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 왔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는데, 한창 사회가 어두운 시절에는 ‘창작과 비평’ 발행인 겸 ‘창작과 비평사’ 대표를 하였으며,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의 초대 의장을 맡는 등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독재 권력과 맞섰지요. 미술계에서는 해방 후 전후 추상미술이 주류였던 한국 미술에 시대정신에 부응하고자 하는 새로운 흐름인 사회적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성향의 미술이 태동하는데 그러한 움직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죠.
영남대 정년퇴임 후 가진 자리에서 제자들이 평소 선생님이 좋아하는 노래 ‘스텐카 라친’을 불러드렸다.
러시아 혁명가의 삶을 노래한 이 노래를 상기된 표정으로 제자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최재우 : 대학을 정년퇴임하신 후 김윤수 선생님께서 관장으로 재직하시던 국립현대미술관이 현대미술의 선구자 마르셀 뒤샹의 <여행용 가방>이라는 작품을 소장하게 되었는데, 그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김익수 : 참여정부 시절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취임한 형님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지난 정부의 정치색을 지닌 기관장’으로 찍혀 지속적으로 사퇴 압력을 받았죠. 임기를 10개월 남겨둔 2008년 11월 결국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서 2010년 4월 13일 해임이라는 국가 처분이 부당하다는 법원 판결을 받아서 승소하였습니다. 그 당시 문화부가 밝힌 해임 사유는 미술품 구입 과정에서의 규정 위반인데, 마르셸 뒤샹의 <여행용 가방>을 구입하면서 거래사에 미리 가부를 약속했고 충분한 가격조사도 없었다는 것이죠. 우편거래로 작품을 들여오면서 세관에 신고하지 않은 것도 문제가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작가인 마르셀 뒤샹 서거 40주년을 기념해 작품전을 열 예정이었지만, 해임 이틀 뒤 전시를 전격적으로 취소했죠.
다행히 10년이 지난 지난해 2018년 12월 22일부터 올해 4월 7일까지 뒤샹 사후 50년을 기념하는 “마르셀 뒤샹”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데, 연일 많은 관람객들이 전시회를 찾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사실 미술관은 소장품이 어떠냐에 따라서 위상이 달라집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이 뒤샹의 작품을 중심으로 마르셀 뒤샹 사후 50년 전을 개최함으로써 미술관의 위상을 높였다는 점에서 형님의 명예는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최재우 : 부당한 권력에 의해 선생님이 겪었을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생각하면서,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마다 보여주신 당당한 모습처럼 신념을 굽히지 않고 소신을 지키는 삶이 얼마나 고귀한가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