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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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고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김영동 / 미술평론가
– 고향과 어린 시절 (1935~1948)
김윤수 선생은 경북 영일군 청하면 소동리 388번지에서 1935년 10월 23일(음 9월26일) 부친 김해김씨 응용 선생과 모친 의성 김씨 위현 여사 사이에서 3남 1녀 가운데 장자로 태어났다.
부친은 일제 강점기에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찍이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해서 해방 후에는 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던 분이다. 일인 교장이 있는 관립학교를 피하고 조선인이 설립한 사립학교를 원했던 선생의 부친은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 있는 문명학교로 부임하게 되었다.
김윤수 선생은 부친의 임지에 따라 초등학교를 이곳 문명학교서 시작했다. 그러나 부친은 도중에 일제의 탄압으로 잠시 학교를 떠났다가 해방이 되면서 다시 문명학교 교장으로 복직하게 되었는데 그때 흥해국민학교로 전학 갔던 김윤수 선생도 다시 문명학교로 돌아와 1948년 졸업했다.
– 대구중과 경북고등학교 시절 (1948~1955)
1948년 김윤수 선생은 대구시청에 재직 중인 작은삼촌이 계시는 대구로 나와 대구중학교로 진학했고 6.25 전쟁 중인 1951년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교시절 야구부 활동을 하던 중 타자석에서 투수가 던진 공을 맞고 허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 일로 1년간 휴학을 했으며 그 뒤로도 허리 통증이 남아 평소에도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선생은 아우와 함께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동생(김익수 영남대 명예교수, 조각가)의 도움으로 재활치료를 하며 가료 중일 때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부친의 서가에서 읽었던 감명 깊었던 책 가운데 막심 고리키의 『유년시절』이 있었는데 가난 속에서도 위대한 소설을 쓴 작가로부터 큰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 서울대학교 미학과 진학 (1956~1961), 대학원 (1961~1966)
경북고를 졸업하고 1956년 서울대 미학과로 진학했다. 당시 미학과는 문리대가 아닌 미술대학에 속해 있을 때였다. 선생이 미학과로 전공을 선택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고교시절 읽었던 고유섭 선생의 저서 『송도고적』과 『조선탑파의 연구』 그리고 일본인 미학자 오오니시 노보루의 『미학 및 예술학사』 등이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유홍준선생의 『창비』에 쓴 글) 1961년 문리대로 소속이 바뀐 미학과를 졸업하고 곧이어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 무렵 선생은 일과 학업을 병행하셨는데 1960년부터 5년간 동아출판사 편집부에 근무하면서 영한사전과 독한사전 편찬 일을 맡아했다.
– 서울대 문리대 시간강사 및 이화여대 전임강사 시절 (1966~1976)
1966년 대학원을 졸업하고 그해 봄부터 효성여대와 계명대학, 대구대학 등을 시작으로 시간강사로 강단에 섰다. 1968년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 강사가 되었고 이듬해부터 이화여대 미술대학에도 출강했다. 당시 젊은 강사의 미학강의는 최원식(문학평론가, 인하대 국문과 교수), 유홍준(전 문화재청장), 이애주(서울대 무용과 교수) 등 문리대 재학생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강사로 재직하는 동안 주요 학문 활동으로써는 1968년 한국미학회의 창립회원 이었고 1976년까지 학술간사 및 편집위원을 맡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미술평론가로 두각을 나타내 1971년 『창작과비평』 봄호에 「예술과 소외」 등을 발표했는데 지성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 민주화 운동 관련 해직교수 시절 (1975~1979)
선생은 1976년까지 서울대 강사직을 유지하면서 1973년 이화여대 전임강사로 발탁되었다. 당시 10월 유신 하에서 개헌청원서명운동본부가 결성되는데 이화여대 교수 신분으로 30인 서명자로 참가했다. 이듬해 1974년에는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에 참가했으며 1975년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1976년 수감 중에 당국에 의해 이화여대 교수직에서 강제 해직되었다. 1976년 8월 항소심에서 선고유예로 풀려난 이후로 선생은 미술사와 미술이론 서적의 번역 일에 몰두하면서 『창작과비평』과 『계간미술』등에 한국근대미술의 작가론과 미술비평을 기고하며 활발한 평론활동을 펼쳤다. 1977년부터 1980년 영남대 교수로 채용되기까지 해직교수협의회에 참가했다.
– 저술활동 및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위원 (1978~1980) 대표이사
김윤수 선생의 이력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업적들은 『창작과비평』에 쓴 평론에서 시작한다. 1971년 「현대에 있어서 미학의 의의」에 이어 1972년에 「좌절과 극복의 논리」 그리고 1973년에 「춘곡 고희동론」을 비롯해 1977년 「김환기론」까지 근대미술의 주요 인물들을 다루었다. 그중에서 이인성, 박수근, 이중섭 등 중요 근대미술가들에 관해 양식적 분석과 함께 비판적 비평을 가한 평론들은 선생이 투옥됐을 당시 미학과 제자였던 유홍준 선생의 원고 취합으로 한국일보 출판부서 『한국현대회화사』(1975) 한 권으로 묶여 나왔다. 그 때문인지 뒤에 이 책의 끈질긴 재판 요청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끝내 응하지 않으셨다.
아직 국내에 참고할만한 서양미술사나 미술이론 서적이 거의 없을 때 김윤수 선생에 의해 중요한 저작들의 번역이 다수 나왔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잰슨의 서양미술사 책일 것이다. H.W. 잰슨의 『미술의 역사』(공역, 1978)의 책임번역자로서 서문에서부터 이집트 미술 등 책의 중요부분을 번역하였다. 이 책은 전문 미술사가에 의한 서양미술사 책으로 국내에 최초로 번역 출간된 것이다. 내용도 깊이 있게 서술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양미술사 전체를 아우르는 통사로서 많은 대학에서 전공교재로 활용했다. 1976년 중판 발행한 태극출판사의 『예술의 창조』도 책임번역자로서 편집과 해설까지 맡았던 책이다.
단행본으로는 1981년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를 비롯해 존 버거의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1984)나 허버트리드의 여러 책들과 마이어 샤피로의 책, 그 밖에도 브루노 무나리의 『예술로서의 디자인』(1976), H.M. 빙글러의 『바우하우스』(1978) 등과 같이 서양미술사, 예술이론 전 분야에 걸쳐 수많은 명저들을 번역했는데 정확한 해석과 명쾌한 문장으로 평판이 높다. 선생의 번역서들은 대개 저작권법이 없던 시절에 출간된 책이어서 뒷날 새로 저작권을 맺은 다른 출판사에 의해 재 발행된 경우가 많다. 이 과정에 번역자가 바뀐 경우가 많았는데 그래도 일지사의 『근대회화소사』(1975)는 선생에게 재의뢰가 되었다. 원저자였던 게오르그 슈미트 바젤미술관장 뒤에 다시 그 따님이 바젤미술관 관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선대의 저작권을 흔쾌히 김윤수 선생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 영남대교수 시절 (1980, 1984~2001)
김윤수 선생은 이화여대에서 해직된 상태 하에 있었지만 영남대가 전국에서 우수한 인재를 불러 모아 대학을 크게 확장할 시기에 미술대학 부교수로 초빙 받았다. 당시 총장비서실장이던 고 이수인 교수(이수성 전 총리의 동생)가 미술대학의 설계를 맡길 적임자로 모셔왔다고 했다. 이화여대에서도 복직 요청이 있었지만 해직교수를 초빙해준 영남대의 의리를 대구에 남기로 결정했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곧 1980년 광주 5.18이 일어나고 또다시 신군부 하에 또 다시 해직될 수밖에 없었다. 1984년 두 번째로 복직 후 영남대학교에 1988년 미학미술사학과를 창립하고 미술대학장, 교무처장 영대신문 주간 등의 보직을 맡았다. 2001년 명예교수로 정년 퇴임하셨다.
– 민족미술인협의회 및 민족예술인총연합 관련 시절 (1985, 1989, 1995, 2000~2004)
1985년 민족미술협의회 창립을 주도하고 고문을 역임했으며 1987년 6월 항쟁 이후 출범한 민예총에 공동의장(1989~90)을 맡아 참여했다. 1995년 전국민족미술인연합이 재 창립하면서 초대의장을 2000년부터 2004년까지 민예총 이사장을 각각 맡았다.
– 서울미술관 관장 (1981) 및 국립현대미술관장 시절 (2003~2008.11)
김윤수 선생은 1980년 영남대에서 두 번째 해직을 당한 뒤 1981년부터 다시 복직할 때인 1984년 사이 구기동에 위치한 서울미술관의 설립에 관여하고 초대 관장을 맡았다. 거기서 중요한 전시들이 몇 차례 기획됐는데 특히 1982년 〈프랑스 신구상회화전〉은 1980년대 신형상 미술을 일으켜 한국현대미술의 지형을 변화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2001년 영남대에서 퇴임하신 후 2003년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취임했는데,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 최초로 관장에 연임 되었다. 2005년과 2006년 2회에 나누어 〈한국미술 100년〉 전을 개최하여 한국근대미술을 정리하는 성과를 냈다. 그리고 2005년에 마르셀 뒤샹의 유명한 ‘상자’ 작품 〈여행용 가방〉(1941)을 소장품으로 구입한 일과 관련해 2008년 11월 연임 임기 10개월을 남겨두고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2년 뒤 법원은 해임 무효 판결을 내렸지만 선생은 이 일로 건강에 크게 악영향을 입었다. 지금 그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소장품의 하나가 되었다. 해임된 이듬해 프랑스 정부는 선생에게 한불문화교류에 공헌한 점을 들어 문화훈장 ‘오피시에’ 장을 수여했다.
김윤수 선생은 북송 때 옛 학자가 한 말인 ‘백성의 근심은 앞서하고 그 낙은 뒤에 한다.’는 뜻의 “선천하지우이우(先天下之憂而憂) 후천하지락이락(後天下之樂而樂)”을 좌우명 삼아 평생 지식인의 본분을 다하려 하셨다.
서예 유성룡의 만대루 시에 깊이 감동하시며 여생을 그와 같이 보내고 싶어 하셨던 김윤수 선생은 2018년 11월 목동 자택에서 향년 83세를 일기로 영면하셨다. 장례식은 서울대학 병원에서 민족예술인 장으로 엄수됐고 창작과 비평사의 주관으로 안택은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 양지바른 언덕에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