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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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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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아트 선구자 박현기’
한국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박현기
글_박민영 대구문화예술회관 학예연구사
박현기(1942~2000)는 국내 비디오아트 1세대 작가이다. 그는 건축가이면서 작가로 활동하였고, 설치, 퍼포먼스, 사진, 드로잉 등 여러 장르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비디오 작품을 만들기 시작하여 여느 비디오 작품과는 차별적인 오브제와 영상이 결합한 작품들로 동양적인 정신을 구현한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의 비디오 작품을 단순한 영상 작품이 아닌 ‘비디오 설치’라 불렀고, 이런 작품의 제작 방식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과 더불어 현실과 가상이라는 이원적인 세계를 연결하여 지각과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그의 작품은 미디어와 사물, 상반되는 것들의 병치로 단순한 구조를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테크놀로지를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미디어 아트로 불리는 그의 작업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하는 것은 그의 초기 작업에까지 거슬러가고, 그의 아시아적인 철학과 세계관에 닿아 있었다.
박현기
박현기는 1970년대에 건축사무실을 운영하면서 ‘대구현대미술제’에 참여하였고, 대구에서 전위적 활동을 펼친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미술에 눈떴다. 1974년부터 1979년 사이 개최된 대구현대미술제는 당대 권위적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미술을 찾아 나선 이강소를 비롯한 젊은 작가들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미술 제전(festival)이었다. 전국적인 현대미술운동으로 번졌던 이 전시에는 각지의 작가들이 모여 새롭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였고, 대구의 젊은 작가들은 자신의 예술적 상상을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했다. 그들은 평면 회화에서 벗어나 행위예술과 오브제를 연구했고, 신기술 매체인 비디오까지 다루게 된다.

미술제 초기에 제작된 박현기의 오브제 설치 작품인 <몰(沒)>시리즈(1974~1976)는 물에 젖어 들어가며 형태가 변화하는 휴지를 보여준 작품이었다. 당시 그는 주로 사물의 변화나 사물의 그림자를 쫓는 작업에 관심을 가졌고, 사물의 흔적이나 사물의 물리적 환경 등의 외적인 자극을 통해 변화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작업을 다수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물의 변화에 관한 관심은 강정 포플러나무의 그림자를 그리는 퍼포먼스(1977)로 나타나기도 했고, 사물과 유사한 물건을 만드는 작업으로도 나타난다. 그러면서 그는 물질과 시간과 공간이 빚어내는 현상을 통해 그는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차츰 접근한다.

박현기 <몰> 1975, 휴지 물감
그에게 또 하나의 자극은 1974년경 대구 미문화원에서 접한 백남준의 작품이었다. 그는 작품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고, 이때부터 비디오 매체에 관한 관심과 기대를 하게 된다. 하지만 백남준 작품을 처음 접했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백남준의 새로운 테크놀로지(백-아베 신디사이저)가 이미 기성품화 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테크놀로지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

그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따라가기보다는 오랫동안 품어온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비디오를 통해 작품으로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 <무제(비디오 돌탑)>(1979)는 실제 돌탑 사이에 가상의 돌 영상을 보여주는 TV 모니터를 끼워놓은 작품이다.

이즈음부터 돌과 수지로 제작한 돌 모형을 함께 배치하는 등 오브제 설치와 비디오 작품에서 실재와 가상의 구조가 그의 작품 전반에 등장하게 된다. 1979년 낙동강 물에 거울을 꽂아 물결을 반영하는 작품 <무제>(1979) 나, (1979), (1979)와 같은 TV 안의 상황을 실제 상황인 것처럼 제시한 작품들에서 실재와 가상의 구조를 계속해서 실험하였다.

박현기 <무제(비디오돌탑)> 1979, 돌, 영상모니터
이러한 연출은 단순히 사물을 보는 대비적 관점이 아니라, 이 둘의 관계를 보는 우리의 지각을 실험한다. 그는 이러한 작품에서 실재도 단지 사물의 현존에 대한 관자의 인식의 순간일 뿐 온전한 사물의 실체에 접근하였다고 할 수 없음을 보여주려 한 듯하다.
그의 비디오 작업은 단순히 새로운 매체 표현의 장을 연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존의 비디오 아트와는 전혀 다른 표현과 해석을 내어놓았다. 그에게 비디오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도 아니고,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도구도 아니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비디오 영상은 사물을 비추는 거울, 사물의 그림자, 또는 의사(擬似) 사물과도 같다. 그는 우리가 아는 ‘그것’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박현기 <무제> 1978, 돌,수지
그의 작품이 나타나는 방식은 대상과 의사 대상, 그리고 그 가운데 우리를 놓아두고, 이 모든 것들이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현존을 함께 하게 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 구조는 대응과 대조가 아닌 병치의 관계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돌과 돌 영상의 모니터, 그리고 다시 돌, 혹은 물에 비친 모습을 보는 영상과 그 영상을 다시 비추는 물과 같이 함께 결합하지 못하고, 자꾸만 미끄러지는 모습으로 보인다. 1981년부터 1985년 사이에 그는 이러한 철학과 시각을 설치와 퍼포먼스가 결합한 대규모의 프로젝트로도 실행하였다. 퍼포먼스 ≪Pass through the city(도심을 지나며)≫(1981, 대구 도심)는 트레일러에 거울을 부착한 돌을 싣고 대구시 중심가를 지나가는 것이었고, ≪Media as translators(전달자로서의 미디어)≫(1982, 강정 낙동강변)는 총 6개의 퍼포먼스로 1박 2일 동안 낙동강변의 광활한 자연을 무대로 전개되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자연과 어우러진 미디어 속의 허상의 세계는 자연과 문명의 확연한 대비를 보이지만, 이러한 허상과 실상의 인식 차이는 내적으로 발생할 뿐 결국 그 경계와 차이는 없다는 것을 역설한다. 프로젝트 중 하나인 에서는 깜깜한 밤에 둥근 원형으로 피워진 불 속에 서 있던 사람은 불이 사그라지면서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다. 여기서 그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는 불완전한 우리의 지각과 인식의 차이일 뿐임을 확인해 준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1983년의 수화랑에서 비디오와 오디오 설치작업과 행위미술, 그리고 1985년 일본 가마쿠라(鎌倉) 갤러리에서의 행위와 설치 작품에서 또 다른 형식으로 범위를 넓혀 언어와 대상과의 관계, 비디오 속의 비디오라는 구조를 통해 인식의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작품들 역시 같은 맥락을 유지하면서 이어졌다. 침목을 잘라 사이에 돌을 끼운다든지 돌, 유리, 나무, 그리고 모니터를 설치, 비디오 설치 등 외관상 통일감 없는 다양한 시도들이 계속되었지만, 대상의 실체와 그것의 인식이란 문제에 대한 그의 접근은 후기의 작품에서도 계속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 작품 형식의 큰 변화는 프로젝션 방식이 사용된 <우울한 식탁>(1995)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정적인 데서 빠르게 전환하는 영상미로의 변화를 보여주었고, 작품에서는 현실의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영상기술의 백미는 <만다라> 시리즈(1997~1999)에서 완성되었다. 작품은 성(聖)적인 불교 도상과 속(俗)을 상징하는 포르노 장면이 관람자가 인지할 틈 없이 빠르게 교차한다. 박현기의 <만다라>는 종교적 제의의 상징적 성격을 빌어 왔으나 현실과 접목한 탁월할 해석을 보여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작품의 기술적 완성도와 독창성에서 많은 평론가의 시선을 끌었다. 1997년의 뉴욕의 킴포스터 갤러리 전시에서 소개된 <만다라>는 ‘황홀하고 관능적인 리듬, 색채, 이미지의 아우성’, ‘박현기는 동양 전통의 영적인 세계를 상징하는 만다라의 고정된 이미지를 우아하고 미니멀하게 설치해 놓으면서도 하이테크놀로지로 해체, 재조합해서 무궁무진한 이미지의 변종을 초고속으로 쏟아낸다.'(마야 다미아노비치 Maia Damianovich) 라고 평가받았다. 관람자의 눈을 시간과 공간의 혼돈 속에 몰아넣은 그의 작업은 아시아 미술을 정적이고 추상적으로 바라보던 서구인들의 편견을 바꿀 만큼 훌륭한 완성도를 이루었다.

박현기 <만다라> 1997, 비디오프로젝터, 실린더
이처럼 초기의 영상 미디어를 독특하게 적용한 데서부터 화려한 완성도의 테크닉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었지만, 그는 미디어를 비과학적 인식의 도구로 생각하였다. 그의 작업노트에서는 서구와 다른 우리의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언급하였다. 그는 여기서 해방 이후 미군정에 의해 행해진 서구의 교육방식과 과학적 합리적 사고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였다.

“과학이란 물질적이고 분석적인 지배를 초래했고, 과학은 또 정신적인 물(物), 그 자체에 지배되고 있는 그러한 결과를 자초한 것이다. 특히 지금과 같은 공간이나 시간의 개념이 과학이란 정보매체를 통하여 동시에 교감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현기 작가노트, 1981.7.13.)

박현기는 비디오를 접했던 초기부터 비디오를 표현수단으로 삼으면서도 ‘탈테크놀로지’적인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중적으로 보이는 미디어에 대한 그의 태도는 작품의 토대를 이루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전통적 사고, 즉 대상에 대한 비분석적, 비과학적인 통합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가 작품으로 노출한 엇갈림은 오로지 모든 것에 적용되는 변화의 진실, 실체란 결코 잡히지 않음을 현현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일 게다. 이처럼 그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세계관을 독창적이면서도 단순하고 명쾌하게 꿰뚫어 표현하였다. 대구는 물론 한국예술의 힘을 보여주는 박현기는 미디어를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해석한 독자적 시각으로 한국 미디어 아트를 정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