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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 – 릴레이기고 #3
실패의 역사
글_윤동희 개념미술가
화가, 미술가, 작가 등 이 시대에는 예술가를 부르는 명칭이 다양하다. 언젠가 존경하는 작가께서는 나를 “개인사와 거대역사의 교차적 시선을 통해 한국사를 바라보는 개념미술가”라고 불러주신 적이 있다. 개념미술가. 나의 작업관을 아우르는 의미이자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와 알맞게 맞아떨어져, 이전의 설치미술가와 같은 방법론적 명칭에서 탈피하게 되었다. 하지만 개념미술가든 설치미술가든 작가에게는 언제나 같은 질문이 그림자처럼 동반된다. 작가로 활동하며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즉 예술을 하며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 21세기에 전업 작가로 살기로 마음먹는 것은 고흐나 이중섭을 떠올릴 때 따라오는 고독한 예술가의 로망조차도 해당되지 않는 생존과 치열함 그 자체이다.
<편안한 믿음, 변환구조물 위에 싱글채널비디오, 00:02:24, 2010>
대부분 작가는 본인이 경험한 세상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어낸다. 경험은 끊임없이 사유 되고 각자의 개성을 바탕으로 시각화를 거쳐 형상으로 만들어진다. 형상들이 모여 의미를 자아내고 최종적으로 작품이 전시될 공간과 작품의 메시지가 맞아 떨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일단은 작가의 작업 실현은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작품의 성공이 작가의 성공과 늘 관련이 있지는 않다. 작가들은 모여서 돈 이야기를 하고 자본가들은 모여서 예술 이야기를 한다. 연말이면 예술가를 위한 프로그램과 지원 공모들이 앞다투어 좋은 예술가를 맞이할 준비를 하지만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예술기관을 거쳐 작가에게로 오기까지 자율성을 잃고 힘없는 슬로건이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망령, 싱글채널비디오, 00:04:07, 2015>
작품을 대하는 태도와 구현하는 형식은 개개인의 방법론과 작업 환경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작품은 작가 각자의 거울과 같아서 그 창작의 동력은 대략 비슷한 지점에 서로 닿아 있다. 궁극적으로 바라보는 이상이 현실과 조금 떨어져 있을지라도 스스로의 삶을 태도를 작품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자아 표출의 욕구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붉은 밤, 붉은 등과 구조물위에 페인팅, 가변설치, 2015>
나의 작업 역시 사회에 의문을 던지고 경험을 의심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나 자신의 개념과 사회가 상호 작용하며 생기는 불협화음을 발견하고 생경하게 바라보며 자아를 확립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제도의 불합리함과 경제적 어려움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맞닥뜨릴 때 나의 행위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내가 예술가 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고 곧 자기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을 위해 예술을 계속 해야 하는가?

미술관과 갤러리는 관람객의 숫자로 성과를 판단하고 대학은 취업률을 기준으로 학과의 운영구조를 개편한다. 유행하는 제품이 생산라인에서 가속화되듯 우리는 자본주의가 설계해 놓은 시스템 안에서 예술을 소비하고 있다. 디자인된 예술을 소비하는 방식은 수동적이며 관조적이다. 전시장의 관람객들이 기억하는 것은 작품의 의도보다 정방형 안의 이미지이다. 예술은 점점 본연의 역할을 잃고 위축되어 애물단지가 되어버린다. 이제 예술가는 뜨거운 메시지라는 화염병을 던질 힘이 없거나 견고한 벽에 부딪혀 소멸되는 작은 불꽃놀이처럼 보일 뿐이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거대한 시스템은 ‘창의성’을 뒤쫓아 연약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비둘기를 안은 모나리자, 프린트위에 유화, 352X77cm, 2015>, <비둘기를 안은 모나리자> 부분

그러나 여전히 예술은 개인에게는 작은 위로이자 본질적으로 새로움의 추구이며, 현대 사회를 발전시키는 힘이다. 그 힘을 지향하는 이들이 모여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들의 전위적 활동과 에너지가 사회로 발산하는 파급력을 생성한다. 창작 욕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담론이야말로 그 결이 거칠지언정 사회와 예술간 균형을 이루고 조화를 만드는 가장 견고한 다리가 된다.

문화를 이루는 뿌리가 이념이라면 꽃은 예술이라는 말이 있다. 문화에서 시대성을 배제할 수 없는 만큼 미술 역시 그 시대를 반영한다. 미술이 관람객에게 몇 초간 카메라를 통해 보는 피사체로 치부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형태, 표현 방식 그리고 더 나아가 전시의 맥락까지 파악하려는 노력을 받게 된다면, 분명 예술가들의 근심은 곧 사치가 될 것이다.
또한 각자의 좌표 위에서 던지는 질문과 고민들이 예술로 순환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타협안에서도 자신만의 선을 지켜야 한다. 자본주의에 빗대어 보자면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이기만한, 말 그대로 ‘실패한’ 수많은 결과물들이 예술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작가는 이 실패한 결과물이 갖는 역사와 의미를 담론으로 논의하고 개념으로 성립해야 한다. 그렇다면 다시 반문하는 것으로 서문의 질문에 답을 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 예술로 생활을 유지해야 하는가?

<돌보다, 재개발구역에서 가져온 돌 위에 금색락카, 가변설치,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