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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갖춘마디로서의 시절가조
정나영 『별빛도 못갖춘마디』 리뷰
글_이정환 시인
정나영 시인은 등단 10년 만에 첫 시조집 『별빛도 못갖춘마디』를 펴냈다. 책 제목이 ‘별빛도 못갖춘마디’라고 붙였지만 모든 것을 잘 갖추고 있는 시조집이다. 그만큼 다채로운 시도에 힘쓰고 있으면서 시조 형식을 잘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각은 새롭다. 우리 시대의 현실과 삶에 대한 진지한 천착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10여 년 간 닦아온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작품으로 증명하고 있다.
가야 할 길이 멀어 생각도 허기진 날은/ 마른 멸치 한 줌으로 장국을 우려낸다/ 퍼렇게 일어선 물결, 바다도 함께 우린다// 오기도 부끄러움도 끓는 열탕 속으로/ 한 시대의 사투리가 짤막하게 지나가면/ 수평 밖 거친 물결도 은빛으로 날이 선다// 파도의 등솔기를 갑판 위에 남겨두고/ 해체된 속살만큼 편서풍에 실려 오는/ 섬 하나 닻을 내리고 가만히 와 앉는다.
「멸치장국을 우리며」 전문
정나경 『별빛도 못갖춘마디』 (목언예원, 2018. 8)
「멸치장국을 우리며」는 일상을 노래한 시편이다. 하지만 시선이 갇혀 있지 않고 확산의 묘를 잘 살리고 있다. 즉 ‘가야 할 길이 멀어 생각도 허기진 날은/ 마른 멸치 한 줌으로 장국을 우려’내면서 ‘퍼렇게 일어선 물결, 바다도 함께 우린다’는 진술에서 그러한 정황을 읽는다. 둘째 수에서 ‘오기도 부끄러움도 끓는 열탕 속으로/ 한 시대의 사투리가 짤막하게 지나가면/ 수평 밖 거친 물결도 은빛으로 날이 선다’ 라는 비유를 통해 시의 화자는 무엇인가 말하고자 한다. 이 대목에서 단단한 심지가 느껴진다. 한 가정의 주방에서 비롯된 생각이 넓은 바다까지 나아가 ‘파도의 등솔기를 갑판 위에 남겨두고/ 해체된 속살만큼 편서풍에 실려 오는/ 섬 하나 닻을 내리고 가만히 와 앉’게 되는 경지에까지 이르고 있다.
가로등도 잠이 깊어 혼미한 새벽 앞에/ 잃어버린 기억처럼 눈이 온다, 하얗게/ 아마도 감출 것 많은 지난날을 덮나 보다// 마주 보지 않으려고 문간 밖에 내버려 둔/ 뜨거운 숨결도 어지러운 발자국도/ 한순간 슬픔을 건너 꽃이 되어 일어선다// 간절한 마음일수록 수화조차 필요 없고/ 박수를 준비하는 객석의 고요처럼/ 마침내 홀로 깊어져 어둠마저 환하다
-「눈 내리는 밤」전문
「눈 내리는 밤」은 회화성이 짙은 작품이다. ‘가로등도 잠이 깊어 혼미한 새벽 앞에/ 잃어버린 기억처럼 눈이 온다, 하얗게’라고 선명한 이미지의 구사 끝에 ‘아마도 감출 것 많은 지난날을 덮나 보다’라고 담담히 말하면서 ‘마주 보지 않으려고 문간 밖에 내버려 둔/ 뜨거운 숨결’과 ‘어지러운 발자국’을 떠올린다. 이 모든 것이 ‘한순간 슬픔을 건너 꽃이 되어 일어’서는 것을 본다. 하여 ‘간절한 마음일수록 수화조차 필요 없고/ 박수를 준비하는 객석의 고요처럼’눈 내리는 밤은 ‘홀로 깊어져 어둠마저 환’해진다.
온 몸이 찢어져도 내 길을 가야 했다/ 한 방울 남은 피가 빙점 아래 언다 해도/ 예정된 길을 재촉하며 바람도 날을 세웠다// 지나간 춤사위에도 놓지 못한 그리움 하나/ 끝끝내 보듬지 못해 가지마다 새기는 말/ 내일은 햇살과 함께 초록으로 돌아오리라// 남녘에서 배가 오면 고운 잎새 달아준다는/ 서투른 위로에도 슬픔은 반이 되고/ 목 메인 가슴 귀퉁이 불씨 다시 모은다
-「겨울나무」전문
‘겨울나무’는 시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써보게 되는 비근한 소재다. ‘온 몸이 찢어져도 내 길을 가야 했다’라는 첫 줄에서 비장하기까지 한 결의를 읽는다. 그래서 ‘한 방울 남은 피가 빙점 아래 언다 해도/ 예정된 길을 재촉하며 바람도 날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지나간 춤사위에도 놓지 못한 그리움’때문에’끝끝내 보듬지 못해 가지마다 새기는 말’이 ‘햇살과 함께 초록으로 돌아’올 꿈을 꾸고, ‘남녘에서 배가 오면 고운 잎새 달아준다는/ 서투른 위로에도 슬픔은 반이 되’기에 화자는 힘을 내어’목 메인 가슴 귀퉁이 불씨 다시 모’으는 일에 몰두한다. 한겨울에도 나무는 봄 맞을 채비를 단단히 한다. 사람살이도 매한가지다.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
눈부신 햇살 아래 발걸음이 천근이다/ 밀쳐내도 밀려오는 허물 벗은 절망들이/ 또 하루 젖은 외투를 무겁게 벗겨준다// 새끼발 생채기는 아직 빨간 꽃잎이다/ 신발 끈 조여매고 첫새벽을 깨우면/ 별빛도 못갖춘마디, 시린 가슴 데운다
-「현관」 전문
「현관」은 삶의 무거움과 더불어 활기를 제시한다. ‘눈부신 햇살 아래 발걸음이 천근’이어서 ‘밀쳐내도 밀려오는 허물 벗은 절망들이 또 하루 젖은 외투를 무겁게 벗겨’주는 정황을 통해 세상살이가 여의치 않음을 나직이 말한다. 눈부신 햇살 아래라면 응당 발걸음도 가벼워야 마땅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처리하거나 해결해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새벽,’새끼발 생채기는 아직 빨간 꽃잎’ 인데도 ‘신발 끈 조여매고 첫새벽을 깨우면’서 화자는 힘차게 하루를 시작한다. ‘별빛도 못갖춘마디’그 못갖춘마디가’ 시린 가슴 데워’ 주기 때문이다. ‘못갖춘마디’ 앞에 ‘별빛도’가 놓여서 미묘한 울림을 자아내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책꽂이가 휘도록 빼곡 꽂힌 전공 서적/ 빳빳한 표지 위에 끼 부리는 책 제목들/ 서로가 하얀 침묵으로 곁눈질이 한창이다// 포장도 뜯지 못한 책장 잠시 뒤적이면/ 줄 맞춘 활자들이 꿈틀대며 일어선다/ 백지설 솔깃한 유혹 두근대던 시간 넘어// 에밀을 펼쳐놓고 뜬 눈으로 지새우던/ 나도 함께 묶어낸다, 팽팽한 책 더미에/ 허공에 가뒀던 생각 슬그머니 버린다
-「오래된 책을 묶다」 전문
「오래된 책을 묶다」는 독특한 시편이다. 어느 날 ‘책꽂이가 휘도록 빼곡 꽂힌 전공 서적/ 빳빳한 표지 위에 끼 부리는 책 제목들’이 ‘서로가 하얀 침묵으로 곁눈질이 한창’인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포장도 뜯지 못한 책장 잠시 뒤적이면/ 줄 맞춘 활자들이 꿈틀대며 일어’ 서면서 ‘백지설 솔깃한 유혹 두근대던 시간 넘어’가 클로즈업된다. 하여 ‘에밀을 펼쳐놓고 뜬 눈으로 지새우던/ 나도 함께 묶어’내어 ‘팽팽한 책 더미’위에 올려놓는다. 그러자 ‘허공에 가뒀던 생각’마저도 ‘슬그머니 버리게’ 된다. 책과 가까이하는 사람은 책에 치여 살 때가 많다. 책에 압도되어 정작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리무중에 처하기도 한다. 그런 심경이 이면에 깔려 있다.
생각이 시릴수록 허기 깊은 저물녘/ 외면당한 채소들이 노을처럼 누워 있다/ 두고 온 손주 얼굴이 파리하게 흔들리고// 무심한 발길에도 자리 차마 접지 못해/ 몇 번을 세어 봐도 겨우 단돈 몇 천원뿐/ 백발의 여든 생애를 똬리 틀어 앉힌다// 부르튼 손끝마냥 하루해가 버겁지만/ 내일은 아닐 거야 스스로를 달래며/ 말없이 굽은 허리를 어스름에 기댄다
-「좌판」 전문
「좌판」은 이번 시조집에서 감동을 안겨주는 점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다. 화자의 따사로운 눈길이 전편에 잘 녹아 있다. ‘생각이 시릴수록 허기 깊은 저물녘/ 외면당한 채소들이 노을처럼 누워 있는’ 것을 눈여겨보면서 ‘두고 온 손주 얼굴이 파리하게 흔들리는’ 것까지 짐작한다. 좌판 앞으로 많은 발길이 오고 가기에 ‘무심한 발길에도 자리 차마 접지 못하고’ 주위를 살핀다. 호주머니엔 ‘몇 번을 세어 봐도 겨우 단돈 몇 천원뿐’이어서’백발의 여든 생애를 똬리 틀어 앉힌’채로 버티고 있다. ‘부르튼 손끝마냥 하루해가 버겁지만/ 내일은 아닐 거야 스스로를 달래’면서 ‘말없이 굽은 허리를 어스름에 기대고’ 좌판을 지킨다. 화자는 이렇듯 안쓰러운 정황을 오랫동안 먼발치서 바라보면서 삶이란 대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끝으로 단시조 두 편을 보겠다.
마주 서면 낌새챌까/ 감아드는 작은 몸짓// 내밀한 소문처럼/ 그림자가 부푼다// 풀수록 더욱 옥죄는/ 너와 나의 엉킨 생각
-「등나무」 전문
밤새 비는 자박대며 꽃무릇을 희롱하고// 시 한 줄 쓰지 못해 머릿속은 하얀 감옥// 한 소절 금빛 노래를 번개처럼 맞고 싶다
-「시작」 전문
「등나무」는 ‘등나무’의 생태에서 ‘너와 나’ 혹은 인간관계를 떠올리고 있다. ‘마주 서면 낌새챌까/ 감아드는 작은 몸짓’이 결국 ‘내밀한 소문처럼/ 그림자가 부푸는’ 장면으로 확대된다. 그것은 ‘풀수록 더욱 옥죄는/ 너와 나의 엉킨 생각’과 다르지 않다. 풀려고 하다가 더욱 꼬여버리는 관계에 대한 번민이 고스란히 축약되어 있다.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게 만드는 시편이다.
「시작」은 한 편의 시를 쓰기까지 혹은 만나기까지 모진 견딤과 뼈아픈 궁구가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밤새 비는 자박대며 꽃무릇을 희롱’하는데 ‘시 한 줄 쓰지 못해 머릿속은 하얀 감옥’이 된 화자는 간절히 바란다. ‘한 소절 금빛 노래를 번개처럼 맞고 싶다’고 열정적으로 갈망한다. 그것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음을 정나영 시인의 첫 시조집『별빛도 못갖춘마디』에서 조심스레 엿본다.
시인에게 어떤 사명이 있다면 그는 이번 시조집에서 그 점을 어느 정도 보여주었다고 확신한다. 단순한 자연 예찬과는 분명히 거리가 먼 창작 태도를 견지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다해 이 시대의 현실과 삶을 육화하는 일에 힘썼기 때문이다. 더불어 개성적인 목소리의 발현이 잘 뒷받침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