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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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_아카이브
민족 독립 투쟁의 대열에 선
대구가 낳은 애산 이 인
글_이상규 경북대 교수 / 전 국립국어원장
애산(愛山) 이인(李仁, 1896.9.20.∼1979.4.5.) 선생의 조부 경주 이씨 관준은 세거지 경북 경주에 살다가 한말 애국계몽운동단체였던 자강회와 대한협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아버지 학포 종영 선생이 대구로 이거하여 애산을 낳았다.1)
애산의 숙부는 우제 이시영 선생이다. 애산은 일찍 대구향교와 동제서당에서 한문 수학한 뒤 대구의 달동 심상소학교를 1기생으로 졸업하고 대구 달동의숙에서 4년 수료와 경북실업보습학교에서 2년을 수학하였다.
아버지 종영 선생이 보성전문학교를 창설하여 그 경영을 맡으면서 서울로 이거하여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다가 열일곱 살 되던 해인 1912년 45원을 손에 쥐고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 동경으로 떠났다. 동경에서 한화공, 박문서관의 교정원을 하면서 입시 준비 과정인 동화학교에서 6개월 간 수료한 뒤 세이소쿠중학교와 니혼대 전문부 법과 야간부를 다니며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2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대학 시절 「조선총독부의 학정을 세계에 호소한다」(일본대구지)에 게재하면서 민족 자주독립의 꿈을 키워나간다. 다시 대학원 과정인 일본대학 고등전공과에서 2년간 수학한 뒤인 1918년 9월 23세의 젊은 나이로 귀국하여 조선상업은행 종로지점 행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딛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변호사의 꿈을 안고 재차 일본으로 건너가 “법정에서 저들과 싸우리라”라는 결심을 굳힌다. 1차 변호사 시험에 실패를 하고 1923년 2월 28세의 나이로 일본변호사 자격시험인 고등문과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한다.

메이지대학 시절 김성수, 안재홍, 장도수, 유억겸, 김양수, 김도연 등과 유학을 하면서 깊은 우정을 다져나간다. 특히 조선어학회에서 함께 활동한 김양수, 김도연 선생과는 가장 가까웠던 교우였다.

권기철, Tokibul 작품 @ 2017.
서울에서 변호사업을 개업한 뒤 처음 변론을 맡은 사건이 1923년 5월 의열단사건이었다. 1919년 만주 지린성에서 김원봉, 이성우 투사 등이 모여 항일 단체인 의열단을 조직하여 조선 내 곳곳에서 과격한 폭력을 유발하여 일제를 놀라게 만들었다. 특히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대구 동화사에서 최윤동(제헌국회의원)이 중심이 되어 대구조선은행 폭파를 기도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기소된 사건에 변론을 맡았다. 당시 몇 안 되는 우리나라 변호사 중 허헌, 김병로 선생과 함께 이 사건을 변론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항일독립투쟁사에 남을 만한 굵직굵직한 사건에는 거의 빠짐없이 관여하게 된다. 특히 대구법원에서 의혈단 사건 관련자에 대한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비판한 변론에서 급기야 피소인들이 윗옷을 벗어 보이며, 고문으로 인해 피멍으로 얼룩진 알몸을 드러낸 소위 나체공판으로 일제의 법조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2)

1925년 7월 당시 조선, 동아, 중앙 등 민족주의 성향을 띤 언론사들에 연이은 검열과 정간으로 이어지는 압박을 거부한 언론탄압 규탄대회를 주도하던 서정희, 유진태, 김한규 선생이 종로경찰서에서 체포되어 기소되는데, 이 사건의 변론도 애산이 맡았다. 또 1925년에는 고학생의 상조기관인 갈돕회의 총재를 맡고 여자고학생상조회를 만들어 고학생을 돕는 한편, 조선어연구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위원이 되어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이 승하하자 창덕궁 일대에 모인 애도행렬 사이에 중앙, 휘문, 중동, 양정, 배재, 보인 학교 생도 200여 명의 학생들이 일제 타도의 격문을 뿌리며 만세운동을 벌인 소위 6․10 만세사건의 변론을 맡은 애산은 “주권을 잃은 백성은 옛 주인마저 잃었다. 이 어린 학생들이라도 어찌 한 방울의 눈물과 분노가 없겠는가? 일본은 비분한 눈물마저 처벌할 것인가?”라는 유명한 변론문을 남겼다. 또 만주와 국내에 활동하던 천도교청년회와 형평사 단원들이 항일운동인 소위 고려혁명단 사건이 터지자 신의주 경찰에서 기소한 15명의 변론을 맡았다. “일본은 동양평화를 위한다는 미명 하에 조선을 합병하였으나 조선에 대한 식민정책은 양두구육에…”라는 변론 중에 일본 검사 모토지마(本島)가 변론을 가로막고 지극히 불온한 언동으로 변론인을 법적 조치를 취하고자 하는 곤경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이어지는 변론에서 “일본은 동양평화를 위한다는 미명 하에 조선을 합병하였으나 조선에 대한 식민정책은 양두구육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라고 응수하여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였다.
1927년 신간회의 창립과 더불어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신간회의 해소론이 제기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만의 민족단체를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1929년 6월 일제 최대의 항일 사건인 소위 형평사 사건으로 광주경찰서에서는 630명이라는 대량 집단을 검거하여 기소한 사건이 발발했다. 이 사건은 후일 광주학생사건으로 이어졌는데 지주와 농민의 계급타파를 부르짖었던 형평사 단원을 일망타진하는 대형 사건이었다. 애산은 즉시 광주로 달려가 이들의 변론을 자임하였다.

애산 이인 선생과 파리 제7대학 교수 맏아들 이옥과 함께
철산혁명당 사건, 근우회 사건, 공명단 우편행랑탈취 사건 등 민족 독립을 위해 싸우던 독립운동가를 위해 전국 곳곳을 누비며, 변론을 하였다. 1930년 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들의 흥농사 사건을 변호하다 일본의 학정(虐政)을 비난하여 법정불온변론문제로 6개월 동안 변호사정직처분을 받았다. 수원농고 재학생들이 흥농회를 조직한 것을 반일제 항일 운동으로 몰아붙여 학생들을 구금한 이 사건의 변론 과정에서 탄압적인 인권 문제를 격렬하게 비판한 애산은 결국 변호사 자격 정지처분을 받게 된다. 같은 해 조선물산장려회 회장이 되었다.
1931년에는 조선변호사협회 회장이 되었고, 1935년에는 이우식, 김양수 선생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한 비밀후원회를 조직하여 재정지원을 했다.

물산장려운동 단체의 기관지인 『신흥조선』 사건의 변론, ML당 사건, 상춘단 사건, 1931년 11월 경성제대 반제동맹사건 등 굵직굵직한 항일 저항 사건을 변론을 담당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언론탄압반대 연설회 등으로 여러 차례 유치장 신세를 지다가 마침내 1942년 11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어 이듬해 1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가 맡았던 큰 사건 중에는 의열단사건, 광주학생사건, 안창호사건, 수양동우회사건, 각종 필화 및 설화사건, 수원고농사건, 6․10만세사건, 경성제대학생사건, 만보산사건 등이 있다.
1929년 최송설당의 뜻을 받아 김천고보를 비롯하여 대구 원화여고, 경성실천여학교(1924), 대동중상업고등학교(1926)와 국학대학(1948)의 설립에 참여하여 육영교육 사업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945년 9월 조선민주당이 창당되자 당무부장이 되었다가 10월 미군정 특별범죄심사위원회 수석대법관 겸 심사위원장이 되었다. 1946년 검찰총장이 되어 조선정판사위폐사건 등의 수사를 지휘하는 등 좌익세력의 근절에 노력했다. 1948년 8월 초대 법무부장관이 되었으며, 같은 해 법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1949년 3월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제헌국회의원이 되었고, 6월에 법무부장관직을 사임하고 7월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54년 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57년에는 이범석 등과 함께 범야세력 통합운동을 벌였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재야정치인들과 함께 이승만의 하야와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안을 발표했으며, 같은 해 참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63년 민정당 창당에 참여하고 최고위원이 되었으나 범국민단일야당운동 추진에 실패하자 정계에서 은퇴했다. 1972년 민족통일촉진회를 결성했으며 1974년에는 통일원 고문을 역임했다. 유언에 따라 재산은 한글학회에 기증하였고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그가 영면한 서울 논현동 자택은 고인의 유지에 따라 1979년 4월 5일 집을 포함한 전 재산을 한글학회에 기증하였다. 애산은 국가와 사회 공동체를 위해 실천한 겨레의 큰 스승이다. 애산의 자서전에 쓴 ‘말, 글, 얼’의 정신은 1968년 10월 9일 ‘한글 전용화’를 선언한 박정희 대통령의 담화문에도 실려 있다. 건국대학교와 명지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법률과 경제』, 『법률과 여성』, 『애산여적』, 『반세기의 증언』(명지대학교출판부) 등이 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 1969년 무궁화 국민훈장이 수여되었다.

  • 1)애산의 생가에 대해 한글학회 김종택 회장이 필자에게 “달성군 동산면 효목동(현 대구시 동구 효목동)” 혹은 “대구 봉산정 37번지”, “대구 사일동” 가운데 어디인지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아직 최종적으로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 2)한인섭, 「이인 변호사의 항일 변론 투쟁과 수단」, 『겨레의 큰 스승 애산 이인 선생 추모 강연회』, 대구광역시 한글학회 공동주최, 2013. 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