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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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_인터뷰
우리 민족과 전통에 관심 많던 애산 이인
그를 재조명하다.
인터뷰이_이정  애산학회 이사장 이병근
인터뷰어, 정리_이시명
대구에서 출생한 애산 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 ~ 1979년 4월 5일)은 독립운동가, 법률가, 정치인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김병로, 허헌과 함께 3인의 민족 인권 변호사로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 사회저명인사들을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고 조선 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해방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정부 수립 후 초대 법무부 장관을 맡았다. 종로 애산학회에서 이인의 아들 이정과 애산학회 이사장 이병근을 만나 그에 대해 들어보았다.
▷ 애산 선생님께서는 어떤 분이셨는지요?
이 정 : 해방 전에 변호사가 많지 않았어요. 변호사가 많지 않았는데 선친이 변호사 되신 게 1923년인가 24년이에요. 일본 변호사 시험을 합격을 해셨을 때 당시 변호사가 한 다섯, 여섯 명밖에 안됐을 거예요. 주로 무슨 활동을 했냐면 독립운동 가담자 변호를 많이 맡았어요. 강력한 본인의 의지가 있으셨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하신 내 작은 할아버지의 영향이 많아요. 이시영이라고, 대구 달성공원에 기념비가 있지요. 해방 후에 장관도 하시고 국회의원도 하셨지만 일제 강점기에 선친의 변호사 활동 또한 독립 운동과 관계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 당시에 2,000건 넘게 변호를 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정 : 2,000여 건의 변호 중에 절반이 독립운동 변호였어요. 독립운동가들이 이시영 숙부와 친구다보니 선친은 이 분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고, 그 분들도 선친을 신임하셨겠지요. 만주서 연행되어 오면 선친에게 연락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무장투쟁을 하던 오동진 선생께서도 옥중에서 선친한테 편지를 보냈어요. ‘내가 여기에 있다. 그것 좀 맡아달라’하시어 선친이 사건을 맡으셨습니다. 도산 선생께서도 상해에서 잡혀와 가지고 변호인들을 다 거절했어요, 선친이 처음 가서 변호한다고 할 때도 거절했어요. 나중에 선친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을 면회 오라고 부탁하셨지요. 이 분들이 이시영 선생의 지기들이시고 선친이 조카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 또 다른 이야기들이 있을까요?
이 정 : 애산선생님께서는 일제시대 때 주로 활동하신 변호사로서 변호하시며 민족운동을 하셨던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수원 고등농림학교 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비롯해서 그때 변호를 하실 때 민족을 내세웁니다. 그래서 재판장에서 민족의식을 일깨워주는 의미에서 ‘민족정기가 없으면 국가도 망한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 이곳 애산학회는 어떻게 한글학회 내에 있는 건가요?
이 정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가 돼서 감옥에 가셨어요. 일제는 한국어 사용 금지령을 내리고 이에 맞서서 ‘나랏말이 없으면 그 민족은 망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뭉친 조선어학회는 국어사전을 만들려고 노력을 하는 가운데 자연히 학회는 민족운동의 중심이 됩니다. 선친은 변호사였지만 ‘말이 없으면 민족도 망한다’는 조선어학회에 동조하여 전 재산을 학회에 기증하셨지요. 당연히 애산학회는 한글학회 안에 자리를 잡게 됐지요.
▷ 한글학회에 전 재산을 기증하셨다는데 평소에 국어학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이 정 : 일제의 조선어 사용 금지령은 동시에 조선민족정신의 파멸을 의미한다는 생각이 당시의 식자층들에게 번지고 있었지만 사전조차 없었지요. 사전을 만든다는 일은 돈이 많이 들어가는 집단작업이에요. 선친은 국어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조선어학회에 많은 금전적인 기여를 하셨어요. 이는 또한 독립운동의 일환이었지요. 우리말에 관심이 많으셨고, 한글에 관심을 가진 결과가 바로 사전인거죠.
▷ 다른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신 게 있을까요?
이 정 : 변호활동을 통한 민족운동이 제일 크고, 그 다음으로는 제일 중요했던 게 과학문명의 발달, 그래서 발명학회 등에 주로 후원을 하시며 관여하십니다. 언어도 민족정신이니 사전에 관심을 가지셨던 거예요. 또 다른 것으로는, 서울 가회동, 재동에 한옥이 많은 북촌 있잖아요? 서울에 있는 집들이 일본식으로 전부 바뀌는데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일하시는 정 모라는 분을 도와주십니다. 종로3가, 인사동 쪽 한옥골목 작은 곳들이 쫙 있어요, 거기도 이사 회의에 들어가셔서 돕는 그런 일들을 많이 하십니다. 그 외에도 발명학회, 물산장려회, 고학생갈돕회 등 활동도 많이 하셨어요. 학교도 설립하셨구요.
▷ 광복 후에 활동하신 내용들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이 정 : 대한민국 정부가 48년도 출발을 할 때, 최초로 조각을 해야 되잖아요. 대통령은 이승만이지만 직접 못하니깐 애산 선생님 말씀을 많이 경청하셨어요. 대법원장도 가인 김병로 선생 같은 분들 추천하시고 거의 다 그때 그랬지. 기초를 다지신 분이에요. 그렇게 하고 나서 국회의원 하시고 정치활동 할 때는 민주주의의 확립과 민생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셨어요. 70년대 초부터는 박정희 대통령 때고, 여러 가지 어려울 때지만 민주화 투쟁에 앞장 서셨죠.
▷ 반민족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도 하셨던데
이 정 : 반민특위를 제헌국회에서 만들었는데 많은 수의 위원들이 이상주의자였어요. 김상덕 위원장 때. 문제는 당시에 우리 국민 가운데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3할 밖에 안됐어요, 다 문맹이었지. 면서기도, 순사도 뭐 글을 알아야 하지 누가 하겠어요. 글 아는 사람이 친일했다 그러면서 정부 인사들을 친일파라고 잡아가니 정부 행정 기능이 마비될 정도였어요. 행정 마비가 일어나서 대통령이 제동을 거니, 항의에 의미로 위원장 이하 위원들이 사임을 했어요. 반민특위 위원장을 국회에서 2차로 선출하는데 첫 번에 만장일치로 이인을 선출했어요. 제헌국회에서 만장일치가 난 유일한 결의가 반민특위 위원장 선출이 아닌가 생각에요. 근데 선친께서 고사를 하셨는데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만장일치로 선출이 되셨어요. 한 개인이 국회의 의사를 무시했다는 여론이 비등하여 당시 해공 신익희 의장이 간곡이 권해 마지못해 위원장을 승낙하셨어요. 본인이 반민특위 위원장을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제헌국회에서 강제로 떠맡겼습니다.
반민특위는 한시적인 기구였어요. 대한민국이 존속되는 날까지 하는 게 아니거든요. 요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계속 끌고 가면서 친일파를 전부 잡아갔으면 좋겠으나 한시적인 기구이고 게다가 전쟁이 일어나 계속 할 수가 없었어요. 안타까운 이야기지요.
▷ 이 곳 애산학회에서 발간하는 학보에 대해 알려주세요.
이 정 : 지금 학보들은 일 년에 한 번 또는 어떤 때는 두 번, 요즘은 한 번씩 나오고 있어요. 이게 학회지만 기금과 보조 인력이 제한돼서 빈번하게 학보를 낼 수가 없어요. 애산 선생님이 법조계에 계셨지만 학회는 법학을 포함한 인문학 쪽을 다루고 있습니다. 정관에도 그렇게 되어있어요. 주로 언어, 문학 쪽이고 역사와 철학을 간간히 취급하고 있습니다.
▷ 애산여적은 어떤 책인가요?
이 정 : 해방 전부터 79년도 돌아가실 때까지 선친은 글을 많이 쓰셨어요. 생전에 글 쓰신 것들을 세권으로 애산여적이라고 해서 묶었는데, 70년대에 쓰신 것을 모으지 못했어요. 남은 것들을 최근에야 묶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애산선생님에 대한 생각, 그런 거를 아시려면 애산여적 4권을 보시면 대개 알 수 있을 겁니다. 하여튼 대구에서, 고향이 대구시지만은 애산선생님은 거국적인 인물인데 그래도 고향에서 관심을 이렇게 가져주신다니 대단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