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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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_캐리커처에세이
애산 이인 선생의 민족 변론 이야기
글_제갈덕주 경북대 한국어문화원 책임연구원
캐리커처_ 김승윤

애산(愛山) 이인(李仁, 1896.9.20.∼1979.4.5.) 선생의 조부 경주 이씨 관준은 세거지 경북 경주에 살다가 한말 애국계몽운동단체였던 자강회와 대한협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아버지 학포 종영 선생이 대구로 이거하여 애산을 낳았다. 애산의 숙부는 우제 이시영 선생이다. 애산은 일찍 대구향교와 동제서당에서 한문 수학한 뒤 대구의 달동 심상소학교를 1기생으로 졸업하고 대구 달동의숙에서 4년 수료와 경북실업보습학교에서 2년을 수학하였다.

아버지 종영 선생이 보성전문학교를 창설하여 그 경영을 맡으면서 서울로 이거하여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다가 열일곱 살 되던 해인 1912년 45원을 손에 쥐고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 동경으로 떠났다. 동경에서 한화공, 박문서관의 교정원을 하면서 입시 준비 과정인 동화학교에서 6개월 간 수료한 뒤 세이소쿠중학교와 니혼대 전문부 법과 야간부를 다니며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2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대학 시절 「조선총독부의 학정을 세계에 호소한다」(일본대구지)에 게재하면서 민족 자주독립의 꿈을 키워나간다. 다시 대학원 과정인 일본대학 고등전공과에서 2년간 수학한 뒤인 1918년 9월 23세의 젊은 나이로 귀국하여 조선상업은행 종로지점 행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딛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변호사의 꿈을 안고 재차 일본으로 건너가 “법정에서 저들과 싸우리라”라는 결심을 굳힌다. 1차 변호사 시험에 실패를 하고 1923년 2월 28세의 나이로 일본변호사 자격시험인 고등문과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한다.

서울에서 변호사업을 개업한 뒤 처음 변론을 맡은 사건이 1923년 5월 의열단사건이었다. 1919년 만주 지린성에서 김원봉, 이성우 투사 등이 모여 항일 단체인 의열단을 조직하여 조선 내 곳곳에서 과격한 폭력을 유발하여 일제를 놀라게 만들었다. 특히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대구 동화사에서 최윤동(제헌국회의원)이 중심이 되어 대구조선은행 폭파를 기도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기소된 사건에 변론을 맡았다. 당시 몇 안 되는 우리나라 변호사 중 허헌, 김병로 선생과 함께 이 사건을 변론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항일독립투쟁사에 남을 만한 굵직굵직한 사건에는 거의 빠짐없이 관여하게 된다.

특히 대구법원에서 의혈단 사건 관련자에 대한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비판한 변론에서 급기야 피소인들이 윗옷을 벗어 보이며, 고문으로 인해 피멍으로 얼룩진 알몸을 드러낸 소위 나체공판으로 일제의 법조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1925년 7월 당시 조선, 동아, 중앙 등 민족주의 성향을 띤 언론사들에 연이은 검열과 정간으로 이어지는 압박을 거부한 언론탄압 규탄대회를 주도하던 서정희, 유진태, 김한규 선생이 종로경찰서에서 체포되어 기소되는데, 이 사건의 변론도 애산이 맡았다. 또 1925년에는 고학생의 상조기관인 갈돕회의 총재를 맡고 여자고학생상조회를 만들어 고학생을 돕는 한편, 조선어연구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위원이 되어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이 승하하자 창덕궁 일대에 모인 애도행렬 사이에 중앙, 휘문, 중동, 양정, 배재, 보인 학교 생도 200여 명의 학생들이 일제 타도의 격문을 뿌리며 만세운동을 벌인 소위 6․10 만세사건의 변론을 맡은 애산은 “주권을 잃은 백성은 옛 주인마저 잃었다. 이 어린 학생들이라도 어찌 한 방울의 눈물과 분노가 없겠는가? 일본은 비분한 눈물마저 처벌할 것인가?”라는 유명한 변론문을 남겼다.

또 만주와 국내에 활동하던 천도교청년회와 형평사 단원들이 항일운동인 소위 고려혁명단 사건이 터지자 신의주 경찰에서 기소한 15명의 변론을 맡기도 하였다. 1927년 신간회의 창립과 더불어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신간회의 해소론이 제기되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만의 민족단체를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1929년 6월 일제 최대의 항일 사건인 소위 형평사 사건으로 광주경찰서에서는 630명이라는 대량 집단을 검거하여 기소한 사건이 발발했다. 이 사건은 후일 광주학생사건으로 이어졌는데 지주와 농민의 계급타파를 부르짖었던 형평사 단원을 일망타진하는 대형 사건이었다.

한글날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앞줄 왼쪽부터 장지영, 정인섭, 최현배, 애산, 이세정, 정인승 님)

애산은 즉시 광주로 달려가 이들의 변론을 자임하였다. 철산혁명당 사건, 근우회 사건, 공명단 우편행랑탈취 사건 등 민족 독립을 위해 싸우던 독립운동가를 위해 전국 곳곳을 누비며, 변론을 하였다. 1930년 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들의 흥농사 사건을 변호하다 일본의 학정(虐政)을 비난하여 법정불온변론문제로 6개월 동안 변호사정직처분을 받았다. 수원농고 재학생들이 흥농회를 조직한 것을 반일제 항일 운동으로 몰아붙여 학생들을 구금한 이 사건의 변론 과정에서 탄압적인 인권 문제를 격렬하게 비판한 애산은 결국 변호사 자격 정지처분을 받게 된다.

같은 해 조선물산장려회 회장이 되었다. 1931년에는 조선변호사협회 회장이 되었고, 1935년에는 이우식, 김양수 선생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한 비밀후원회를 조직하여 재정지원을 했다. 물산장려운동 단체의 기관지인 󰡔신흥조선󰡕 사건의 변론, ML당 사건, 상춘단 사건, 1931년 11월 경성제대 반제동맹사건 등 굵직굵직한 항일 저항 사건을 변론을 담당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언론탄압반대 연설회 등으로 여러 차례 유치장 신세를 지다가 마침내 1942년 11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어 이듬해 1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가 맡았던 큰 사건 중에는 의열단사건, 광주학생사건, 안창호사건, 수양동우회사건, 각종 필화 및 설화사건, 수원고농사건, 6․10만세사건, 경성제대학생사건, 만보산사건 등이 있다. 1929년 최송설당의 뜻을 받아 김천고보를 비롯하여 대구 원화여고, 경성실천여학교(1924), 대동중상업고등학교(1926)와 국학대학(1948)의 설립에 참여하여 육영교육 사업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945년 9월 조선민주당이 창당되자 당무부장이 되었다가 10월 미군정 특별범죄심사위원회 수석대법관 겸 심사위원장이 되었다. 1946년 검찰총장이 되어 조선정판사위폐사건 등의 수사를 지휘하는 등 좌익세력의 근절에 노력했다. 1948년 8월 초대 법무부장관이 되었으며, 같은 해 법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1949년 3월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제헌국회의원이 되었고, 6월에 법무부장관직을 사임하고 7월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54년 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57년에는 이범석 등과 함께 범야세력 통합운동을 벌였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재야정치인들과 함께 이승만의 하야와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안을 발표했으며, 같은 해 참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63년 민정당 창당에 참여하고 최고위원이 되었으나 범국민단일야당운동 추진에 실패하자 정계에서 은퇴했다. 1972년 민족통일촉진회를 결성했으며 1974년에는 통일원 고문을 역임했다. 유언에 따라 재산은 한글학회에 기증하였고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그가 영면한 서울 논현동 자택은 고인의 유지에 따라 1979년 4월 5일 집을 포함한 전 재산을 한글학회에 기증하였다. 애산은 국가와 사회 공동체를 위해 실천한 겨레의 큰 스승이다. 애산의 자서전에 쓴 ‘말, 글, 얼’의 정신은 1968년 10월 9일 ‘한글 전용화’를 선언한 박정희 대통령의 담화문에도 실려 있다. 건국대학교와 명지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법률과 경제』, 『법률과 여성』, 『애산여적』, 『반세기의 증언』(명지대학교출판부) 등이 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 1969년 무궁화 국민훈장이 수여되었다.

애산(愛山) 이인 선생은 그 활동의 족적이 결코 법조인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법률을 전공하게 된 것은 일제의 박해를 받아 비참한 질곡에 신음하는 동포를 위하고 나아가서는 독립투사들의 변호를 전담하는 등 합법적인 항일투쟁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의 하나가 변호사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변호사시험 합격증을 교부받은 것이 1923년으로 그의 나이 27세 때였는데, 그해 5월에 변호사사무실 문을 열었는데 당시 조선에는 변호사 수가 적어 그가 최연소 변호사로 개업하였다고 한다. 변호사 자격은 곧 그가 평생을 통해 이룩하려던 민족의 독립과 해방 후 민주주의 실천가로 일관하는 입신의 발판이 되었다. 그것은 동시에 그의 젊은 날에 가졌던 고귀한 꿈을 실현하는 너무나 유용한 도구이기도 했다. 민족을 위한 활동으로 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조선어학회 활동이었다.

조선어학회는 구한말부터 시작된 ‘한글운동’의 영향을 받아 창립됐다.주시경은 1896년 독립신문사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들과 함께 최초의 한글 연구 모임인 國文同式會를 조직했으며, 1907년에는 상동청년학원에서 최초의 한글 교육 기관인 ‘하기국어강습소’를 개설했다. 이어서 그는 1908년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동지를 모아서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했다. ‘국어연구학회’에서는 이전부터 해오던 대로 강습소를 운영해 ‘한글운동’을 확대해 나갔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면서 기존의 ‘한글운동’은 큰 변화를 맞았다. 주시경 등이 국어연구학회와 그 아래의 강습소 이름을 1911년 9월 각각 朝鮮言文會(일명 ‘배달말글몯음’ 또는 ‘한글모’)와 조선어강습원으로 바꾼 것이다. 일제가 일본어를 ‘국어’로 부르는 바람에, 하는 수없이 한국어는 ‘조선언문’ 또는 ‘조선어’로 바뀌면서, ‘한글’과 ‘한글운동’의 위상이 빠르게 떨어졌다. 더욱이 1914년 주시경이 세상을 떠나자 조선언문회와 조선어강습원조차 이름만 있을 뿐 빈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한글운동’이 되살아난 때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부터였다. 바로 1921년 조선언문회의 후신이자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된 것이다. 조선어연구회는 주시경의 제자인 권덕규・장지영・이병기・김윤경 등이 조직했다. 조선어연구회는 구한말 주시경이 주도한 ‘한글운동’의 맥을 그대로 계승했다. 특히 최현배와 이극로가 입회한 1920년대 후반부터는 민족운동으로서의 성격이 강화된 ‘한글운동’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조선어연구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중요한 활동을 펼쳤다. 1926년 10월 ‘가갸날'(1928년부터 ‘한글날’로 바뀜)을 제정해 첫 번째 기념식을 개최했고, 그해 12월부터 조선어강습회를 열어 대중에게 한글 보급을 확대했다. 또한 1927년 2월 잡지 ≪한글≫을 창간했고,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해 ‘朝鮮語辭典編纂會’를 조직했고, 1930년 12월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등에 대한 사항을 결정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민족국가 건설의 기초가 되는 ‘한글’의 기반 확대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31년 조선어연구회는 조선어학회로 개편됐다. 개편된 조선어학회에서는 기존의 ‘한글운동’을 더욱더 조직적으로 발전시켰다. 먼저 대중에게 한글을 보급하는 활동을 벌였다. 1931년부터 1937년 무렵까지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전국 각지를 돌면서 한글강습회를 개최했다. 이때 회원들은 대중에게 한글의 보급뿐만 아니라, ‘한글운동’의 당위성까지도 선전했다. 한편, 한글을 정리하고 통일하는 활동도 함께 실시했다. 그 결과 1933년 10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1936년 10월에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1940년 6월에는 10년에 걸쳐 작업한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발표했다. 이로써 조선어학회는 한글의 정리와 통일이라는 중대한 민족적 과제를 완수했다.

이를 기초로 조선어학회는 최대 숙원사업이었던 ‘조선어사전’ 편찬을 마무리 짓고자 했다. 조선어학회는 표준말 제정을 끝낸 1936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어사전’ 편찬에 돌입했다. 먼저 사전편찬에 필요한 비용을 확보하고자 비밀리에 후원회원을 모집했고, 이어서 학회 회원들이 분담해 원고를 작성했다. 작성한 원고의 일부를 조선총독부 도서관에 출원했고, 1940년 3월에 이르러 삭제와 정정을 조건으로 간신히 출판허가를 받았다. 1942년 봄부터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 조판과 교정 작업을 실시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해 10월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과 후원자를 포함한 33명을 검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일제의 탄압으로 ‘조선어사전’ 편찬은 중단됐고, 조선어학회도 해산당하고 말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한 구술 자료나 회고 기록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지만 실증적 사료로서 재판 기록이나 검찰 공소 기록 그리고 변론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다. 다만 1944년 9월 13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선고한 예심종결결정서([사건번호 1943년 예 제11호])가 󰡔건재 정인승 전집󰡕 권6 부록에 일본어로 작성된 원문(269~323쪽)(당시 함흥지방법원 담당판사 나카노 도라로(中野虎雄), 담당서기 松川堯洽)과 번역문(242~268쪽)을 포함하여 상고심 조선고등법원의 1945년 8월 13일 판결문이 남아 있는 것이 현재 유일의 증빙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상고심 판결문(형상 제59호)은 현재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으나 원문 상태의 판독이 어려울 정도로 자료가 양호하지 않다.

애산 이인선생의 궁정동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조선어학회에 대한 공판은 예심 회부 이후 무려 1년을 더 끌어 1944년 12월에 시작되었다. 그것이 완전히 끝난 때는 함흥지방법원에서 1심 판결 선고가 내려지던 1945년 1월 16일이었다. 공판에 회부된 12명 가운데 핵심인물인 이극로가 징역 6년, 최현배가 징역 4년, 이희승이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과 정태진이 각각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인을 비롯한 김법린‧이중화‧이우식‧김양수‧김도연은 각각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장현식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인이 경찰에 붙잡힌 때가 1942년 11월이니 갇혀 고생한 지가 이미 2년을 넘었으니, 사실상 미결수로서 형기를 모두 채운 셈이다. 이인은 1심 판결이 내려지던 1945년 1월 16일, 갇힌 지 2년 2개월이나 지나 풀려났다. 그것도 집행유예 3년이라는 올가미가 씌워진 채였다.

이인 선생은 함흥경찰서에서 악독하기 짝이 없는 고문을 당하고, 1944년 2월부터 그해 9월 30일까지 끌어진 예심에서도 마찬가지 취급을 당하며 거의 생사의 기로에 섰다. 예심판사의 예심종결결정문에서 일제 당국이 이인 선생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느냐 하는 귀중한 자료가 남아있다. 이는 태평양 전쟁 말기에 단말마적 반응을 보이던 우리의 적(敵)인 일제당국이 그들에 대항하며 한결같은 투쟁을 벌인 선생에 대한 평가로서 그 객관성이 아주 많이 담보된다고 하겠다.

피고인 이인은 ……1923년 4월 이래 경성부 청진정(淸進町)에서 변호사를 개업하고 있는 자로서 1918년 여름부터 조선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바 그 후 변호사로서 각종 사상사건에 관여하기에 이르러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간주하고 그 독립을 주장하는 사건 관계자의 사상에 공명하여 1930년 중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 피고사건의 변호인으로서 변론을 할 때 “조선인이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것은 본능이다.”라고 절규,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언동을 하여 치안을 방해한 동 사건 피고인 등의 범죄를 곡비(曲庇)하고 그 소행을 상양(賞揚)한 혐의로 정직 6월의 징계처분을 받은 적이 있으며, 항상 총독정치에 불만을 가지고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여 민족주의 진영의 이채로운 인물……1)

일제 하 기나긴 기간을 통해 한 몸을 아끼지 않고 민족과 국권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이인 선생에게 해방 후 국가사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역할이 주어졌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서는 그가 맡은 역할을 대체로 시간 순으로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이인 선생은 1945년 10월 22일 미군정 당국에 의해 수석대법관으로 임명되어 취임하였다. 그의 노력에 의해 대법원이 어느 정도 형체를 갖추게 되었고, 각급 법원을 정비하는 작업이 진척되었다.

또한 이인 선생은 대법관 자격으로 특별범죄심사위원회에 파견되었다. 미군정 당시의 특별범죄심사위원회는 조선에 있는 일본인이나 총독부 관리 중 전범자를 처리하기 위한 기구였다. 그가 다음 해인 1946년 5월 검찰총장으로 임명되고 난 후 이름만 유지하던 이 위원회의 폐지를 미군정청에 건의하여 곧 폐지되었다. 1945년 12월 2일에는 국내 법률가들이 모여 헌법기초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임시정부 귀국환영회 바로 다음날이었다. 회장에 김병로, 부회장에 이인 선생이 추대되었다. 헌법, 정부조직법, 선거법 세 분과를 나누어 자료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후 미군정청에 의해 이인 선생은 1946년 5월 16일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어 2년 반 동안 건국의 기초를 다지는 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부임하고 나서 바로 좌익의 조선정판사위폐사건을 맡아 기소하여 1946년 10월 판결을 받아내고, 그해 10월 1일 일어난 대구폭동사건 등을 처리하였다. 1947년 7월부터 미군정청과 협의 하에, 당시 극심한 좌우대립 속에 치안교란의 근원이 되던 좌익세력의 척결에 나섰다. 특기할 일은, 이승만의 간청에 의해 미군정기에 그의 사적인 자문역을 맡아 건국을 위한 중요한 조언을 해주었고, 미군정청의 하지 중장과 이승만의 불화를 해소시키는 중간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참여하도록 적극 건의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이로 미루어 그는 당시 미군정청과 이승만 사이를 연결하는 핵심고리역할을 하였고, 이는 대한민국의 탄생이라는 역사적 결과물을 산출하게 된다. 그가 검찰총장 재직 시에 5·10 제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거가 무난하게 치러지기도 했다.

정부수립 후 이승만은 1948년 7월 24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는데, 검찰총장으로 여전히 일하던 이인 선생은 이승만에 의해 그해 8월 2일 법무장관으로 임명이 되었다. 법무장관은 1949년 6월까지 10개월간 역임하였다. 법무장관으로서 그는 그해 8월경 이승만의 주저를 무릅쓰고 대법원장에 김병로를 적극 천거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이후 대법원장인 김병로와 법무장관 이인의 주도 하에 1948년 9월 15일 법전편찬위원회가 구성되어 법률과 법제정비에 나섰다. 이는 민법, 형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 등의 기본법률과 그 부속법령을 마련하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선생은 법무장관직을 그만 둔 후에도 법전편찬 일에는 계속 참여하여 무려 13년간 그 일에 관여하였고, 김병로가 정년으로 위원장직을 물러난 후 4년간 그의 뒤를 이어 위원장직을 맡아 작업을 마무리하였다. 그해 9월경 정부수립을 기념하여 대사령을 제안하여 각의에서 통과되도록 하였다. 법무장관으로 있던 중 1949년 3월경 종로을구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 후 이승만에게 네 번이나 사표를 제출한 끝에 그해 6월 6일 사표가 수리되었다.

이인 선생은 위와 같이 제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어 국회로 들어갔는데, 제헌국회는 1948년 8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키고 이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대와 친일세력의 조직적 준동 속에 1949년 6월경 반민특위의 김상덕 위원장 등이 모두 사퇴하였는데, 이인 선생은 그 후임으로 위원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또 제헌국회가 끝날 때까지 나머지 8개월간 법제사법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1950년 5월 30일의 제2대 총선을 얼마 앞둔 시점에서 선거를 준비하던 중 이승만의 법무장관 재입각 요청을 거절한 뒤, 이 선거에서 관권의 노골적인 개입에 의해 아깝게 적은 표차로 낙선된다. 그리고 6·25동란의 참상을 겪은 후 1954년 5월 20일 실시된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다시 의정단상에 서게 되었다. 4·19의거 후 1960년 7월 27일 거행된 총선에서 참의원에 당선되었고, 그 후 반 박정희 정권의 쪽에 서서 투쟁하다 우여곡절을 거치며 1967년 2월경 정계를 완전히 은퇴하였다.

이인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국권의 회복과 민족의 자주 및 융성을 위한 뜻을 세우고 자신을 그 일에 바치려 했다. 아주 다행스럽게 법조인 자격을 취득하여 이를 입신의 기틀로 삼아 그 뜻을 실천해나갈 수 있었다. 그의 삶 전체는 이렇게 애국·애족의 궁행(躬行)으로 일관하였다.

선생의 행적은 이뿐만이 아니다. 1976년 8월 15일 효자동 집을 팔아 자신은 조그만 집을 사고 남은 돈 3,000만 원을 한글학회 건립기금으로 기증하였다. 기증할 당시에 그는 “나는 이미 팔십이 넘었으니, 집이 클 필요가 없고 가장 보람 있는 일이 우리의 ‘얼, 말, 글’이 발전되고 보급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2억 원의 모금운동을 벌여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지금의 한글학회의 회관을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1979년 4월 5일 작고하기 전에, 선생은 자신이 살던 강남구 논현동 28의 22 대지와 그 지상 이층집도 한글학회에 기증하라고 유언하여, 그 유지가 실현되었다.

이인은 민족의 양심을 지키고 살아간 인물이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의사와 마찬가지로 서양의 근대문물이 들어오면서 새롭게 틀이 잡힌 상층 직업이다. 따라서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제국주의 침략이 이루어지는 바람에 이들 직업을 가진 인물들은 자연스럽게 제국주의적이자 반민족적인 인식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식민통치를 받던 시기에, 그것도 식민통치가 직접 진행되고 있던 국내에서 결코 꺾이거나 변절하지 않고 민족적 양심을 지키며 살아간 상층 직업인을 찾기란 매우 힘들다.

식민지 시기의 변호사는 식민통치라는 조건 속에서 법률을 매개로 살아간 사람이다. 그러자니 통치자의 기준으로 세상을 가늠하기 십상이고,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변호사 이인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살았다. 그래서 그가 더욱 귀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 고영근, 「開化期의 國語硏究團體와 國文普及活動-「한글모죽보기」를 중심으로-」, 『韓國學報』 9, 일지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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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정인승, “조선어학회사건,” 『건재 정인승 전집 6』 한말연구학회(박이정, 1997), 261면. 여기에서는 한인섭, 위의 글, 3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