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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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3
대구예술아카이브 구축의 방향
글_이호신 한성대학교 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조교수
약 7년 전의 일이었다. 대구시의 한 관계자로부터 대구예술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기초연구에 집필진으로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무렵 한창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터라, 집필진으로 참여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어렵사리 간곡한 요청을 물리쳤지만, 연구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실제로 아카이브는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내내 궁금했다. 가끔 관련 현황을 찾아보았지만 연구논문과 보고서 이외의 다른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대구예술아카이브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질 무렵 대구시에서 다시 예술아카이브 구축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생뚱맞게 옛일을 떠올리는 것은 그 일이 시작조차 못하고 좌초된 연유가 무엇인지 자못 궁금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이유를 알아야 지금의 이야기가 다시 허무한 말잔치로 끝나버리지는 않으리라고 기대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아카이브의 의미
아카이브(archives)는 영구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기록물 자체, 기록물의 보존 장소, 기록물을 관리하는 기관을 모두 지칭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런 간단한 정의 탓인지 아카이브의 기능과 역할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무척 많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아무렇게나 모아서 쌓아놓으면 그것으로 아카이브가 구축된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을 만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작업은 기록물이 될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임에 틀림이 없지만, 아무런 맥락 없이 이런저런 자료를 마구잡이로 수집하는 일이 결코 아니다.
대구미술관 <프레임 이후 프레임>전 아카이브 전시(사진 : 대구미술관)
아카이브는 본래 정부 기관의 투명한 운영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로 등장했다. 아카이브는 정부가 수행하는 업무를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누가 무슨 일을, 어떤 목적과 방법으로 수행했는지를 시민들이 손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제도로 출범했다. 이런 까닭에 아카이브는 어떤 조직이나 개인이 수행하는 업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진행 과정과 결과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기록물은 업무와의 관계 속에 정리가 된다. 계층적 관리와 집합적 기술은 아카이브만의 고유한 정리 방법으로, 도서관 그리고 박물관과 아카이브를 구별시켜 주는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도서관과 박물관이 소장품 하나하나에 대해서 독립적인 목록을 작성하는 것과는 달리 아카이브에서는 기록물을 하나의 개별 개체가 아니라 그 출처를 중심으로, 원질서를 유지하면서, 집합적이고, 계층적으로 관리하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기록과 업무 사이에 내재하는 맥락을 보존하기 위한 아카이브만의 고유한 방법론이다. 아카이브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기관과 그 속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과거에 수행했던 활동의 구체적이고 소상한 맥락을 파악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작업은 단순히 자료를 모으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조직이나 사람의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행적들을 지금, 이 순간에도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작업이다.
아카이브의 역할과 기능
아카이브의 역할과 기능은 인간의 기억과 꽤 많이 닮아 있다. 인간은 살면서 겪은 모든 일을 기억 속에 담아 두지는 않는다. 기억으로 남는 것은 우리 삶에 커다란 의미를 지닌 주요한 사건과 경험으로 철저하게 제한이 된다. 아카이브의 경우도 인간의 기억과 마찬가지로 지나온 활동의 모든 흔적을 담아 놓을 수는 없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경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와 가치를 발견할 수도 없다. 그래서 아카이브 구축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떤 기록들을 선별해서 남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 결정은 달리 이야기하면, 무엇이 우리에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인가를 파악하고 평가하는 과정이다. 아카이브에 기록을 남기고 보존하는 행위는 그 사람이, 그 사건이 그만큼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행위와 절대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서 아카이브에 기록물을 보존하는 행위는 특정한 인물·기관·업무·사건이 그만큼 미래 사회에서 참고할만한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조명하는 작업이다. 기억은 분명 과거의 산물이지만, 절대적으로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작용한다. 기억이 없다면 나는 더 이상 나로서 오늘을 살아갈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남겨진 기록들은 분명 과거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쓰임은 현재와 미래로 넘겨진 것이다. 아카이브는 이 과거의 기록들을 우리 사회에 필요한 역사와 이야기로 만들어가는 곳이다. 과거의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집단기억과 정체성을 형성하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작업이 바로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일이다. 아카이브 없이는 역사도 존재할 수 없다.
대구근대골목 이상화 고택 앞 벽화(사진 : 대구중구청 블로그)
이런 사정들은 예술아카이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예술아카이브를 구축하는 작업에서 실무적으로 겪게 되는 가장 어려운 일은 어떤 기록을 어디에서 수집할 수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수집 대상과 보존연한이 체계적으로 정비된 공공기록물과는 달리 개인의 활동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예술 영역에서 기록의 수집 범위와 대상을 결정하는 일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기록의 존재 유무를 파악하기도 녹록지 않고, 수집 대상자는 불분명하고, 게다가 매우 광범위하기까지 하다. 어렵사리 기록을 가진 사람을 찾아도, 순순히 그것을 내어놓지도 않는다. 이런 사정들로 말미암아 이런저런 기록물들을 닥치는 대로 많이 모으는 것에서부터 아카이브 구축을 시작하려는 유혹에 빠지기가 십중팔구이다. 그렇지만 의미와 맥락 없는 기록물을 마구잡이로 모아 놓기만 해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자료의 무덤이 되어 버리기가 십상이다. 아카이브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남겨진 기록들을 통해서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를 어렴풋하게라도 파악할 수 있어야만 한다.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마구잡이로, 간헐적으로 수집된 자료들은 그 대상의 과거에 대해서 아무런 이야기도 건네주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와 이야기 그리고 기억이 되지 못하는 파편화된 과거의 잔해들일 뿐이다. 그것을 아카이브라고 부르는 것은 지독한 오해의 결과일 뿐이다.
아카이브의 우선순위
이런 까닭에 기록물 수집을 진행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작업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예술아카이브를 통해서 우리 사회에 어떤 이야기를 건네고 싶은가를 먼저 밝혀내야만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예술아카이브 운영의 목적을 공고하게 다지는 일이다. 예술아카이브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가치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 가치와 목적에 따라서 아카이브가 주목해야 할 주제와 대상은 달라진다. 어떤 사건과 인물의 기록을 발굴하고 주목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야 관련 기록물을 집중적으로 수집할 수 있다. 그래야 한 사람·단체·사건·작품의 탄생과 성장을 둘러싼 다양한 맥락을 담고 있는 기록들을 발굴할 수 있고, 그 기록 속에서 역사와 이야기를 건져 올릴 수 있다. 아카이브의 가치와 목적은 무엇을 발굴하고 주목할 것인지를 결정해 주는 열쇠이다. 어떤 일에 집중할 것인가를 가늠할 수 있도록 우선순위를 부여해준다. 그 우선순위를 마련하는 일은 다시 말하면 대구 지역의 예술사를 해석하고, 재조명하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 대구예술에 대한 우리사회의 집단기억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길라잡이로서의 방향성을 분명히 제시하는 것이다.
지난 3월에 열린 대구문화재단 대구근현대문화예술인물 <박기돈, 고택에서 만나다>전
아카이브의 구축을 위해서 가장 시급히 진행해야 할 일은 의미와 맥락 없이 수많은 자료의 더미를 쌓아 올리는 것이 결코 아니다. 대구 예술에 대한 우리의 집단기억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주제와 인물을 발굴하고, 그와 관련된 다양한 기록들을 수집하면서, 그 기록물들 사이에 내재하는 맥락과 정보를 역사와 이야기, 집단기억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아카이브가 가야할 방향
자료를 쌓아둘 보관 장소를 확보하고, 디지털화를 위한 장비를 확보하는 일이 그리 급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시급한 것은 오히려 이런 작업을 열정과 책임감을 가지고 이끌어줄 사람을 찾는 일이다. 예술아카이브와 관련된 예전의 시도들이 대부분 불발로 끝나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아마도 무분별한 자료 모으기와 건물 짓기에서부터 아카이브 구축을 시작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건물을 만들어 달라는 떼쓰기부터 시작했던 까닭일 것이다. 아카이브를 이끌고 갈 사람을 길러내는 데 인색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기록을 끌어 모으겠다는 원대한 이상을 품고서, 야심차게 자료를 수집했지만 그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건져 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 서둘러 성과를 내야한다는 조바심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료를 모으고, 건물을 짓기에 앞서서 이 일을 책임 있게 이끌어갈 능력 있는 전문가를 채용하는 일이 먼저 필요한 것은 아카이브가 대구의 예술을 대표할 수 있는 우리의 상징을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상징은 하루 아침에, 고작 몇 개의 기록들을 가지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의 조사와 연구 그리고 지역사회와의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서 비로소 그 윤곽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만큼 조사와 연구, 소통의 작업을 중심에서 이끌어갈 주체를 세우는 것이 가장 시급하게 진행되어야 할 일이다. 아카이브는 기록물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야기를 만들고, 우리의 집단기억을 형성하는 작업이다. 그 이야기가 역사가 되고, 은유가 되고, 상징이 되어 우리 사회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다면, 웬만한 바람에는 쉽사리 꺾이지 않을 단단한 성채가 될 것이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했다. 대구 예술을 상징할 수 있는 인물과 사건을 발굴하고, 그와 관련된 기록들을 수집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 그리고 조금씩 그 외연을 넓혀서 차곡차곡 대구와 관련된 예술가들과 예술단체의 이야기를 깊고 풍부하게 만들어 나가자. 그래야 7년 전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이 이야기가 적어도 공허한 말잔치로만 끝나지는 않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