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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_기고
인문학은 상품이 아니다
글_이재성 계명대 교수

유난히도 무더운 올 여름의 폭염만큼이나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人文學) 열풍이 드세다. 시장의 인문학, 동네 인문학, CEO 인문학, 퇴근길 인문학, 점심 인문학, 아이폰 인문학, 기업 인문학 등등, 말 그대로 ‘~ 인문학’ 상품이 홍수다. 소비시장이 만든 인문학 대유행의 시대다. 유행이 유혹하고 문화가 소비된다. 학교에서 배제되고 추방당한 인문학이 백화점에서, 지자체에서, 그리고 도서관에서 유행병처럼 소비된다. 겉으로 보기에 인문학의 열풍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도하지 않다.

대학마다 최고경영자들을 대상으로 한 단기 및 속성의 인문학 강좌가 개설되고, 기업들은 경영과 인문학을 융합시키려는 궁리에 골몰하며 각 지자체와 도서관에서는 서로 경쟁하듯 평생학습의 이름으로 유사한 인문학 강좌를 열고 있다. 산업화의 물신(物神)과 이념의 독단에 지친 한국사회가 인문학에서 치유와 위안의 자리를 찾고 있다.

대구문화예술회관 DAC 인문학강좌

지난 수십 년간 한국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정을 겪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선진사회를 위한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진정한 선진사회는 인문정신의 발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인문정신은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추동된 감성의 과잉, 의식의 과잉, 행위의 과잉들을 단순하고 청빈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감산(減算)의 사유이다. 이런 사유 안에서만 삶에 대한 성찰, 균형 잡힌 역사의식, 관용과 상생의 열린 정신이 가능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한국사회는 바로 저 인문정신을 놓치고 말았다.

공동체의 물질적 기반을 이루는 시장이나 기업 또는 과학기술은 산업화 과정에서 오직 경쟁과 효율을 앞세웠고, 공동체의 정신적 기반을 이루는 정치나 문화 또는 도덕은 민주화 과정에서 저항과 투쟁만 강조했다. 양자의 일방적 물신과 독단 사이에서 ‘인문의 지혜’가 녹아들 틈은 없었다. 인문학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성찰과 탐구, 비판과 질문은 양자의 특정 프레임에 포획되어 그 건강성을 잃어버린 채 세뇌의 수단, 타인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수단, 타인의 정신을 노예로 만드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던 것이다.

인문학은 기능보다는 가치를, 사실보다는 의미를 중시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은 고대 로마의 사상가 키케로가 말했듯이 ‘인간에 관한 연구'(Studia Humanitas)에서 연원한다. 말하자면 인문학의 본질은 ‘인간의 인간성’을 대상으로 한 탐구이며, 이때 인간성이란 사람됨, 인간다움, 휴머니즘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인간이 갖는 윤리성 혹은 도덕성을 그 기초로 한다.

사람다운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윤리적 인간, 좋은 인간을 뜻한다. 윤리성은 그 본질을 종교성 혹은 영성에 두고 있기 때문에 윤리성과 영성은 인간성을 논하는 두 가지 핵심적인 기제이다. 좋은 혹은 착한 마음씨가 윤리의 기초라면 종교의 기초는 사랑이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은 인간성을 대상으로 하여 윤리성과 영성이라는 양 기제를 통해 ‘보다 인간다운 인간’을 향해 우리를 인도해 나가고자 하는 제 학문들인 문학, 역사, 철학, 종교, 예술의 탐구를 본질로 하는 학문이다.

인문 ·예술·과학 분야로 진행되는 2018 인문학 가치 확산사업 <작가콜로퀴엄 – 인문·예술·과학> 특강

인간성을 탐구의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은 사회의 경제적 인프라를 구성하는 일개 부속품도 아니며, 또한 시장권력의 도덕적 자기 정당화를 위한 수단도 아니다. 스티브 잡스가 인문적 텍스트를 동원해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서 애플의 창의적 제품을 만들었다”며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고 인문적 사유를 강조했지만 그의 현란한 마케팅 뒤에서 애플 협력업체의 노동자들은 잔혹한 노동환경과 인권침해에 시달리지 않았던가. 잡스는 인문학을 통해 대중을 믿음의 영역, 종교의 영역으로 인도했고, 인문학을 잘 이용하면 자본가도 존경의 대상,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적 권능을 갖고 대중을 지배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지만 거대 산업자본에 실용적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인간다움’을 획득할 수는 없다.

물질주의 만능과 고도화된 과학기술 그리고 경쟁체제의 굴레에 마비된 인간의 인간성 회복, 즉 인간다움은 과연 가능할까. 인문학의 핵심적인 가치는 개인과 사회를 자기반성의 자리로 이끌어 문화적 감수성과 역사적 안목, 더 나아가 책임 있는 공동체의식을 고양시키는데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의 인문학 열풍에는 우려스러운 면이 많다. 인문학 열풍의 진원지가 바로 자본이자 기업이기 때문이다. 지금 유행하는 인문학은 진정한 인문학이 아니고 시장권력이 추동한 기업 인문학이다. 기업 인문학은 인간다움을 위한 고뇌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이윤과 부의 창출, 즉 인문학의 상품화에만 관심이 있다. 인문학 열풍과 함께 물질주의, 과학기술주의, 경쟁체제가 심화되는 이유다. 하지만 인문학은 결코 상품이 아니며, 상품이어서도 안 된다.

영화 <스티브 잡스> 스틸 이미지 (사진_네이버 영화)

본디 인문학의 본령은 무용성에 있다. 그러나 오늘날 시장권력은 끊임없이 인문학의 유용성을 묻고 따진다. 말하자면 자본의 증식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자본에 복무하라고 요구한다. 대학에서 와인을 어떻게 마시는지, 호텔 사용법이 무엇인지를 교양교과목에서 가르치는 모습에서, 돈 있고 여유 있는 사람들이 일류 호텔의 와인과 스테이크를 곁들인 교양강좌에서 어울리며 재기 넘치는 인기 강사의 ‘간추린 인문학’ 강의를 들은 뒤 우르르 해외 골프 여행에 나서는 모습에서 인문학의 상품화를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이렇듯 인문학의 상품화는 인문학을 수요자 중심 교육 혹은 부자들의 사교 클럽에 ‘교양의 외투’나 걸쳐주는 도우미 역할이라는 구조적 파국의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기업이나 지상파 방송 그리고 각종 지자체나 도서관에서 유행하고 있는 흥미로운 역사적 일화 시리즈나 문학, 철학의 말랑말랑한 토막 이야기 몇몇 개로 인문학의 깊고 넓은 바다를 간추려 담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인문학은 논리체계가 아니다. “논리적으로는 옳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인간세계에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그는 지식과 지혜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 철학자연 하는 자들은 대부분 논리적인 옮음, 즉 ‘지식’에만 몰두해 있지 정작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 정의되는 철학은 내팽개쳐두고 있다. 지혜는 지식이 추구하는 논리를 뛰어넘어 직관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인문학의 영역은 근대가 주조한 문학⋅역사⋅철학으로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가장 뛰어난 직관인 종교와 예술이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길에서 빠질 수 없는 이유다. 그동안 인문학의 위기, 가난한 인문학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인문학은 본래 가난한 법이다. 인문학이 언제 가난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종교와 예술은 더욱 그렇다.

대구 시인보호구역 인문학 강좌(사진_시인보호구역 페이스북)
인문학은 어떤 요령을 가르쳐 주거나 쓸모 있는 정보를 제공해 주는 지식 보따리가 아니다. 인문학은 성장과 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적 가치에 대응하는 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오래도록 묵히고 삭힌 지혜의 바탕자리, 그 ‘오래된 새로움’이다. 인문학의 길은 기본적으로 길 외부에 있다. 오늘날의 기업 인문학으로 대변되는 인문학은 길 외부를 상상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불임의 학문, 불구의 학문이 되어가고 있다. 인문학은 어떤 정답이 아니다. 인문학은 성역 없는 자유로운 정신적 유영을 전제로 인간의 삶과 실존에 대해 엄숙한 물음을 던지며, 궁극(窮極)의 자리를 향하는 관조의 눈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