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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2
누구를 위하여 퇴근 종은 울리나?
: 주 52시간 노동시대의 문화 환경
글_윤규홍 예술사회학 / 갤러리 분도 아트디렉터 / 대문편집위원
1.

사람들이 뭔가 착각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주당 노동시간이 62시간에서 52시간 상한제로 줄어든 환경이 개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관한 전망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텍스트를 쓰는 나는 그 숱한 전망이 우리 현실을 과잉 해석하고 있다고 본다. 그게 좋은 쪽을 향한 희망사항이든, 아니면 나쁜 쪽으로 기운 우려든 별 차이가 없다.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짚고 널리 알리는 게 언론의 기능이다. 그래서 신문과 방송은 주 52시간 노동에 관해서 여론을 이끌어가려는 건 당연하다. 언젠가부터 이를테면 경제신문은 거의 모든 기사가 최저 임금제와 주당 52시간 근무 제한을 끼워 넣지 않고는 결론을 내지 못하는 요상한 원칙이 생긴 것 같다. 뭐가 잘못 되어도 그게 다 인건비가 올라가고 근무시간이 준 탓이라 한다.

특집을 기획하는 첫 단계에, 이 글은 주 52시간 근무 환경이 우리 문화 향유의 방식을 어떻게 바꿀지에 관한 물음에서 도출되었다. 글이 좀 더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노동 시간 단축에 따른 문화적 상황을 세대와 직업 별로 나누어 예시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이 글은 그것을 뺐다. 왜냐하면 그렇게 완성된 글은 이번 특집 의도에 무난히 녹아 들어가겠지만, 이미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대나 직종 혹은 성별 구분에 의한 인구통계학 변수의 상호관계 파악은 그것이 비록 탐색적 연구 수준이라고 할지라도 일정한 크기 이상의 표본을 필요로 한다.

하필이면 내가 본 기사들만 그런 건진 몰라도(예, 그렇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모든 자료를 모아서 대조하는 매크로 분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52시간 노동 제한에 관한 기획 글들은 하나같이 특정한 사람들의 사례를 팩트로 내세웠다. 예컨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 A씨는 늘어난 여가를 이렇게 쓰고, B씨는 고민인 저렇게 생겼다는 식이다. 설마 사례로 인용된 그 A, B, C란 인물들이 허구의 창조 캐릭터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우리나라 2770만 경제활동인구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성을 가질 수는 없다. 여론을 이끈다고 자부하는 몇몇 사람들의 환상이 사실로 포장되는 사례는 어느 현대 사회에서나 곧잘 벌어지는 일이다. 이른바 ‘조작된 이성’을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식으로 비판하면 심각해지겠지만, 그게 이 짧은 글의 목적도 아닐뿐더러 내 관심은 딴 곳을 향해 있다.

주52시간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독립변수와 여가 생활의 질적 상승이라는 종속변수 사이에는 일종의 환상이 끼어든다. 그 환상은 실은 어디에도 없지만 실제로 있을 거라고 믿는 네스 호의 괴물처럼 사람들 머릿속을 파고든다. 참 재미있는 것은 사실이 아닌 걸 사실이라고 말한 당사자조차도 시간이 지나며 리플리 증후군에 빠져서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나는 그런 담론이 공적인 조직 문화에서 도덕률이 되어서 노동에 대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굳히는 쪽으로 기능한다고 본다.

2.

노동시간 단축이 우리 여가를 변화시킬 수 있나? 이 새로운 제도가 실시되면서 양과 질적인 면 모두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면, 적어도 우리의 입장은 그 변화의 중요한 축을 문화예술이 맡아야 된다는 당위론일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여가가 사회적 관심이 된 때는 근대 이전 귀족 계급이 심미적 활동을 포함한 일체의 여가를 독점하던 시대를 지나서 산업 사회의 노동자 계급이 일에서 벗어난 여유 생활을 찾아가기 시작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 계급의 저항은 크게 보아 ‘좀 더 임금을, 그리고 좀 더 적은 노동시간을’ 향해 가는 투쟁이었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일하는 사람들에게 매겨진 봉급 수준이나 근로 시간이란 게 그 투쟁의 결과라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비교사회학의 시각에서 남한은 해방 이후 압축근대화를 이루어왔다. 무슨 말인가 하니까, 흔히 말하는 서구의 선진국들이 1789년 프랑스대혁명과 1812년 영국 산업혁명을 통해 중세를 떨치고 근대사회로 발을 디뎠는데, 그 나머지 나라들 중에서 한국은 그 어느 경우보다 혹독한 식민 지배를 경험하고, 또 체제 분단과 내전과 궁핍을 겪었다. 그 와중에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취한 남한의 결과는 우리 스스로도 놀랄 만하다. 다 좋은데, 선진국들이 2세기 넘게 서서히 이루어 온 그 근대의 기획을 우리는 불과 수십 년 만에 거의 따라가거나 추월한 셈이다. 이렇다보니까 그 빛의 다른 한 쪽에는 매사를 남들보다 빨리 해야 된다는 강박이 모든 국민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빨리빨리병’은 그렇게 생겼다. 남들 놀 때 같이 놀면 성공 못하니까, 나는 일하고 공부해야 된다. 또 노는 것도 기왕이면 일에 도움이 되는 목적을 떨치지 못했다. 예컨대 회식문화가 그 예가 아닐까.

과거 압축 성장을 진행하는 데에는 국민 전체 수준의 합의가 있어야 되었고, 물리적인 억압이나 이데올로기 조작이 반드시 따랐다. 국민의 의무가 시민의 권리를 억누르는 과정은 총화단결이라는 구호로 미화되었다. 이러한 도덕률, 즉 에토스는 지금도 거의 모든 조직 문화에 스며들어있다. 바로 지금, 주 52시간 상한제에 즈음하여 내가 가장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는 부분은 법으로 정해진 ‘강제 퇴근’ 이후에도 여전히 직장인들은 노는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일의 한 부분으로서, 체제가 은근히 세뇌시킨 자기 개발의 테두리 안에 머문다는 사실이다. 많은 대기업들은 52시간 상한노동제에 맞춰 취미 발표회나 취미목록 제공서비스를 직원들에게 시행하고 있다. 이건 또 무슨 창조적인 발상일까.

3.

주 52시간 노동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에서 지적되고 있는 부분은 현실적으로 제도 시행에 따른 수혜를 받을 직종이나 일터가 그렇지 않은 곳보다 적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지적은 옳으나, 제도가 노동시간 단축이 차츰 확산되는 방향과 기준점이란 점에서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대나 직업 별로 52시간 노동 적용에 대한 관찰이 필요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렇다고 이 지면을 통해 그 자료를 확보하는 것은 어렵다. 다만 이 시론의 논리를 펼쳐가기 위해서 간단한 언급은 필요하다.

먼저 세대 간 문화 향유 차이를 밝히기 위한 구분은 보통 10대, 20대 식의 10년 단위 세대 구분보다 예컨대 6세에서 15세, 16세에서 25세, 그리고 56에서 65세와 같은 기준이 더 적절하다. 중학생과 대학생이 수용하는 대중문화의 질이나 항목이 얼마나 유의미한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보자. 필자가 계속 주장해 온 이 세대별 사회학적 분석 기준은 다른 언로를 통하여 소개하도록 한다. 또 다른 중요한 기준은 직업군인데, 직업을 구성하는 노동 시장이 가령 화이트컬러와 블루컬러, 1,2,3차 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도 계약직, 인턴직,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등 서로 다른 노동 조건에 처해있다. 여기에 전업주부와 구직희망자의 관점, 성별로 구분되는 젠더 감성 및 사회 조건, 학력의 차이에 따른 문화 취향과 지식 습득 경로 같은 인구통계학적 변수를 내세우면 노동과 여가에 대한 집단별 분류는 수없이 쪼개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계층 집단별 문화 분석에서 비중 있게 관찰되는 그룹은 대략 25세에서 35세 사이의 여성들이다. 이 집단은 만혼 경향과 사회참여율 증가로 인하여 직장인 미혼여성이 많은 수를 차지한다. 이들 미혼 여성은 가장 문화적으로 민감하고 소구력이 큰 집단임이 출판 전시 공연 시장에서 쌓인 경영정보를 통해 밝혀졌다. 이들은 대학교의 교양 커리큘럼이 무색하게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정한 교양을 섭렵하기 시작한다. 거칠게 말하면, 이들 젊은 여성이 우리나라 문화산업을 먹여 살리는 시장 소구력(티켓 파워)을 과시한다. 자본주의 체계는 바로 이들을 정점으로 문화와 예술의 저변을 구성하고 있다.
다양한 문화행사들
4.

매스미디어가 그리는 52시간 노동 시대의 모습은 평소에 엄두를 내지 못했던 예술과 운동을 취미로 시작하고, 육아와 가사에 가족들이 노동 분담을 하고, 더러는 어학이나 자격증 공부를 위해 학원을 간다. 하지만 이것은 예상이 아니다. 누군가의 희망사항이다. 너무 건전하지 않나? 체제는 사람들을 통제 가능한 범위에 묶어 두려고 한다. 그 어떤 기사에도 일직 퇴근 후 방바닥에 누워서 티브이 리모컨을 돌려라, 술 한 잔 거나하게 하라는 말은 없다. 체제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개인은 새로운 환경에 자신이 뒤처지는 것을 체질적으로 두려워한다. 이것은 ‘불금’이라는 말이 금요일에 혼자 있는 자신을 패배자로 규정하게끔 만드는 이데올로기와 같은 맥락이다.

‘불금’처럼 여가와 관련하여 최근 문화계에서 퍼지고 있는 신조어가 ‘소확행’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줄인 이 말은 일상 속에서 자신만의 만족스러운 삶을 꾸려가는 상태다. 내가 알기로 소확행의 어원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다. 날 잡아 흰 셔츠를 빳빳이 다려서 차례대로 걸어두는 일, 매일 듣는 라디오를 켜고 오늘은 어떤 곳이 나올지 기대하는 일이 그 사람의 작지만 분명한 행복이다. 하루키는 1960년대 서구의 비트(Beat)세대를 동경하며 그 시절 그들의 폐쇄적이고 요란하지 않은 삶을 꿈꿔왔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소확행은 다르다. 해시태그가 붙은 SNS 속 소확행은 자기과시와 비일상과 호화스러움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당연히 예술 감상과 체험 또한 자기도취적인 성격을 벗어나면 그것을 할 이유가 없어진다.

근대 예술의 역사는 곧 취미와 과시의 역사다. 하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는 계급 질서가 강제하는 사회가 더 이상 아니므로 누구나 뭘 좋아하거나 익숙한 척 꾸미기 좋은 시대다. 이런 시대 환경은 노동 임금 상승과 커뮤니케이션공학기술의 발전이라는 물적 토대로 인해 가능해졌다. 덕분에 대중들은 시공간과 위계를 뛰어넘는 계급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는 직장인들도 어렵지 않게 유럽 고성을 찾아가서 유한계급 이미지를 차용할 수 있다. 이는 남한에서 산업화 기획이 시작된 반세기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다. 저임금 노동자와 유한계급이라는 브리콜라주적 자아정체성은 취미를 통해 끝없이 재생산된다.

우리는 주52시간 시대에 대중들이 즐거움을 누리는 이 모습을 허상이라고 깎아내리지는 말자. 테오토르 아도르노는 <부정의 변증법>에서 현대인은 여러 겹의 허상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그것이 곧 실체라고 하질 않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남을 의식하는 여가의 행복을 걷어 내면 뭐가 남을지 궁금하다. 노동의 52시간제는 축제가 아니다. 우리의 희망 속에 그것은 일상이다.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들, 사람은 좀처럼 안 바뀐다. 어떤 바람이 불고 자극이 와서 일시적으로 변화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라이프스타일은 회귀곡선을 그리면서 개인의 역사를 복원해 갈 것이다. 대중매체는, 문화 트렌드는 이 환경에서 우리에게 어떤 실천을 요구한다. 우리는 여기에 맞서야 한다. 자신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상태. 그것을 아무 할 일이 없는 무료한 상황으로 묘사하는 것은 내가 예를 들었지만 좀 웃긴다. 그렇지만, 위대한 예술은 이와 같은 권태로움과 외로움 속에서 탄생해왔다. 굳이 뭘 할 필요가 없는 정신의 진공 상태 또한 이 시대에는 필요하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많은 일을 해왔다. 문화를 실천하지 않는 것, 이 또한 문화다. 모르고 있나 본데, 새롭게 주어진 시간은 온전히 당신만을 위한 시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