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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예술시대의 시낭송
글_이유선 시인, 대구시낭송협회장
# 낭송의 연대기

달과 별은 태양 때문에 빛이 난다. 지구도 그렇다. 문학은 하나의 ‘태양’. 문학은 태생 상 모든 예술 장르의 원천이다. 문학이 흔들리면 다른 예술도 흔들린다. 문학 중에서도 시(詩)는 단연 근원적이다. 시는 문화의 시원이랄 수 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인류문화사의 첫 단추로 실은 말이다. 글은 그 다음이랄 수 있다. 태초의 말은 경계가 불분명했다. 그래서 읊조림 같았다. 경계의 시간과 공간을 파고드는 읊조림은 곧바로 ‘신탁(神託)의 시간’을 몰고 왔다.

시인은 시를 낳는다. 시인의 가슴에 머문 시는 하나의 기도이지만 그게 유명한 주술사를 만나면 하나의 정령으로 돌변하게 된다. 그 기도가 반복이면 낭독이고 그 기도가 타인의 심금에 닿으면 그건 비로소 ‘낭송’이 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때 이미 시낭송은 그 시대의 본령이었다. 서사의 낭송은 점점 서정의 낭송으로 진화해 나갔다. 그게 음악의 기원이 아닌가. 낭송이 액션을 갖게 되면 무용이 되고 감정의 토로가 되면 연극(演劇)이 된다. 시낭송은 고대 그리스문화의 정수였다. 아이스킬로스 및 에우리피데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시인이었던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낭송해야 제맛이다.

한 제사장이 신탁을 받고 있다. 그 신전을 에워싼 무희들이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고 있다. 제사장은 음악인 듯 주술인 듯한 소리를 간헐적으로 내뱉는다. 하늘에 고하는 인간의 고유음성(告由音聲), 거기에는 영험함이 숨어 있다. 그 흐름은 중세 그레고리안 성가로 발전을 했고 훗날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의 가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지금도 기제사 때 축문, 그리고 상여를 몰고 가는 상두꾼의 앞소리는 더없이 낭송적이다. 그 율조가 우리 남창 가곡에 잘 표현돼 있다. 부모의 약손도 낭송적이다. 가족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새벽마다 장독간 옹기 위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천지신명을 향해 지극정성을 드리며 주술과 같은 치성의 음을 쏟아낸다.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온 그 읊조림은 일종의 심금이었다. 그 심금의 파워는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조선 등을 관통한다. 특히 조선 세종은 우리의 국악기를 재정비하고 아악의 인프라를 탄탄하게 구축한다. ‘종묘제례악’이 바로 그것이다. 궁중의 큰 연례가 있을 때마다 그 율악이 궁궐 안에 흘러 퍼졌다. 각 종교권의 기도 역시 낭송과 무관할 수가 없다.
# 낭독과 낭송 사이
누구나 낭독은 할 줄 안다. 예전 국어 시간에 적잖게 낭독했다. 하지만 낭송은 그렇게 보고 읽는 게 아니다. 연주자가 악보와 반주기 없이 즉흥연주를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시낭송은 새로운 시의 창작이랄 수 있다. 시인이 비록 시는 잘 창작했어도 그 시의 의미를 정확하게 간파해 듣는 이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호흡을 불어넣어주는 과정, 그게 시낭송이다.
그 시절 웅변대회가 있었고 누구보다 음성이 좋은 사람은 대접을 받았다, 그런 사람들은 유명 성우로 성장해갔다. 라디오시절에는 그 성우가 국민배우로 사랑을 받았다. 60~70년대 여성 포크뮤지션시대를 열었던 박인희는 박인환 시인의 시 ‘목마와 숙녀’를 정말 낭랑하고 감성어린 목소리로 낭송해 인기를 얻었다. 작고한 국민DJ 이종환도 시낭송 마니아였다.
# 국민시낭송시대 개막
난 시낭송가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시퍼포먼스를 엮는 퍼포머(Performer)이다. 판토마임처럼 보이지만 시종 말을 하고 있으니 마임과는 구별이 된다. 연극은 상대와 대화를 하는데 난 혼자 독백하듯 낭송한다. 그래서 난 1인 총체극처럼 낭송을 오감만족형으로 끌고 간다.
예전 시낭송가들은 너무나 서정적이었다.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낭랑하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 목소리를 더욱 돋워주는 감미롭고 애잔한 배경음악을 깔았다. 진지하고 서러운 포즈를 취하면서 적당하게 유장한 호흡을 삽입하며 시를 매만졌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일종의 ‘문화적 허영’ 같았다. 시를 그냥 흉내 내는 것 같아 별로 공감이 되지 않았다.

난 솔직히 시를 만든 시인보다 더 많이 시를 분석한다고 믿는다. 시창작 못지않게 시분석은 어렵다. 낭송하려면 분석해야 된다. 시가 가진 울림의 행간을 손금처럼 보고 있어야 된다. 시인은 뭘 말하려고 하는지 시의 정령은 뭘 겨냥하는지를 간파해야 진짜 낭송이 된다. 어디를 붙이고 어디를 끊어야 하는가도 직감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런 기준에서 본다면 각각의 시어가 섞였다거나 미완성인 문장은 단번에 드러나게 된다. 그럼 낭송은 불가능하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호흡도 제대로 흐르지 못한다. 시의 통증이고 압점이다. 걸리는 대목을 수십번 반복해 읽어본다. 입과 맘이 따로 놀면 그건 그 단어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는 말이다. 시인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간곡하게 맘에 걸리는 단어를 지적한다. 그리고 교체해야 될 단어를 정중하게 제안한다. 대다수 수긍한다. 시인이 보는 시와 시낭송가가 보는 시는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여느 낭송가는 암송하면 끝이지만 난 여운을 타야 한다. 무당처럼 시를 굿처럼 뒤엎어야 한다. 이게 오감을 이용한 시퍼포먼스다.

목소리만 있어선 뭔가 허전하다. 주제에 맞는 소품을 찾아 길을 떠나야 한다. 툭하면 서문시장 천 가게를 누빈다. 못 품을 물건은 없다. 세상의 모든 게 시퍼포먼스의 소재가 된다. 무대 분장가, 무대 의상가, 설치미술가, 패션디자이너적인 감각을 최대한 응용해 내 낭송에 맞는 색과 모양을 연출해야 된다.

# 시낭송가는 시인과 동격
시는 직관을 통해 영감을  포착하는 오감이 동원되는 언어예술이다.  시낭송은 시낭송가의 목소리를 통해 작품을 자기화하여 관객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 즉, 시는 시인을 거쳐 궁극에는 시낭송가의 가슴에서 완성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시인과 시낭송가는 동격이다.
시낭송에서 한 발 더 나간 게 바로 ‘시 퍼포먼스’다. 전국적으로 시낭송이 붐을 이루지만 아직 시퍼포머는 그렇게 많지 않다. 모르긴 해도 내가 첫단추를 끼운 것 같다. 이건 텍스트에 매달리지 않는다. 현장성을 중시한다. 행위적 몸짓을 시로 재해석해 낸  일종의 파격적 ‘액션아트(Action art)’랄 수 있다. 기존에는 무대는 무대, 관객은 그냥 관객이었다. 난 무대와 객석의 문턱을 파괴했다. 나의 액션은 객석을 통해 다시 피드백 된다. 즉흥성과 관객 참여성이 생명이다. 그래서 난 항상 망가진다. ‘전위적 소통성’이다.
서정적 시를 많이 쓰는 김동원 시인의 시 ‘쥐떼’를 시퍼포먼스로 만드는 과정도 내겐 행복한 시간이었다. 밀실정치, 군중심리 등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한지에 붉은 글씨체로 총선 등 정치 관련 용어를 적었고, 100장의 전지 크기의 한지를 마구 구긴 뒤 투명한 비늘 볼 안에 집어넣어 객석으로 쥐떼처럼 던지기도 했다. 그런 작품을 얼추 100여 편 제작한 것 같다. 매번 새로운 배경음악을 작곡하기 위해 뮤직스튜디오를 찾는다. 그리고 영상물도 공연에 활용한다. 디지털시낭송을 연출하려는 것이다.
나는 퍼포먼스 통해 시를 재발견했다. 시를 딛고 나는 자유로워졌다 이제 내 몸이 시다. 대구시낭송협회가 등장했지만 아직도 시낭송은 갈 길이 멀다. 그래서 난 더 퍼포먼스적으로 살아야 한다. 아직 시낭송가는 제대로 대접을 못 받고 있다. 대구문협에 여러 분과가 있지만 시낭송 분과는 없다. 무척 아쉽다. 국내의 경우 전국 규모의 재능시낭송협회가 있고 대구에는 내가 만든 대구시낭송협회가 활기차게 활동을 하고 있다.
이제 시낭송이 생활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불안한 현실을 시낭송을 통해 돌파하려는 중년과 실버들도 많다. 지금 시낭송은 문학예술의 무대화로 가는 시대적 소명을 부여받은 중요한 시점에 와있다. 시퍼포먼스는  21세기 창조예술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모든 예술장르를 윈스톱을 활용할 수 있는 차세대 블루오션 종합예술의 핵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