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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리뷰_전시
가장 높고 길게 드리운 간송의 문화재 사랑
글_황석권 《월간미술》 수석기자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1994년 이후 최악의 폭염이라는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은 관객이 전시장을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줄을 서서 전시를 관람하는 탓에 작품을 강제적으로 세밀(?)하게 관람해야 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주말임을 감안해도 믿기지 않는 장면이었다. 바로 <간송미술관 개관 80주년 기념-조선 회화 명품전>(대구미술관, 6.16~9.16, 이하 ‘간송 조선회화 명품전’)에서 벌어진 일이다.
<간송미술관 개관 80주년 기념-조선 회화 명품전>을 보기위해 대구미술관 전시장을 가득 메운 관람객들
비단 이번 대구미술관의 <간송 조선회화 명품전>의 경우만이 아니다.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이 주최하는 전시는 그간 전공자와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 사실이다. 1년에 봄과 가을, 딱 2번, 좁디좁은 간송미술관에 관람객이 몰려들어 만든 행렬로 장관을 이루곤 했다. 요란한 홍보가 있었던 것도 아니요 휴게시설이나 쾌적한 관람환경 등 특별히 관람객을 위한 배려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듯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장식장이 전부였다. 고미술에 관심이 많은 애호가나 전공자, 연구자들이 전시에 발맞추어 발행되는 《간송문화(澗松文華)》를 구입하는 것이 전시관람과 더불어 간송미술관을 찾는 이유의 전부였다. 그러나 누구나 대한민국 최고의 고미술 소장처로 간송미술관을 첫 손에 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당시 간송미술관 관람객의 마음은 ‘이번이 아니면 다시 못볼지도 모른다’는 애절함이 있었을 것이다.
1.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간송미술관 개관 80주년 기념-조선 회화 명품전>
2. <간송미술관 개관 80주년 기념-조선 회화 명품전> (대구미술관 전시실 내부)
간송미술관 전시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보다 컬렉션의 품격에 있다. 간송미술관은 12점의 국보와 보물 등 1만여 점을 소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엄격한 기준에 의거해 지정되는 국보와 보물임을 감안하면 간송미술관 소장품의 면모가 드러나는 셈인데 설립자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의 생전 높은 안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컬렉터의 컬렉션에 대한 안목은 느닷없이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꾸준한 학습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소장 기준이 명확해야 하고 그것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 수반되야 한다. 간송은 와세다대(법학)를 졸업하고 귀국한 해(1930)부터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 서화사연구자로서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계명구락부, 1928) 등을 편찬한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과 교유하며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 문화재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상황에서 약탈과 밀거래의 대상이었는데 간송의 문화재 수집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안타까워한 절실함에서 비롯했다. 사전작업은 서울 관훈동 소재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 운영하는 것이었다. 안목을 키우는 간송의 노력도 전방위로 이어졌는데 그는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1886~1965)),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1901~1981),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1972),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 1899~1978) 등 당대 문사, 예술가들과 적극적으로 교유하였다. 그가 이러한 안목을 바탕으로 모은 문화재는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이자 이번 전시 개최의 이유이기도 한 보화각(葆華閣, 1938년 개설)에 모이게 됐다. 보화각은 단순히 미술품 소장의 공간이 아니라 우리 문화에 대한 연구기관으로 역할을 했다. 보화각은 간송 서거(1962) 후 간송미술관으로 개칭하고 봄, 가을 정기전을 개최하면서 연구서 《간송문화》를 펴내고 있으며 전시, 연구, 보존사업 등은 가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시기별로 나열된 <간송미술관 개관 80주년 기념-조선 회화 명품전> (대구미술관 전시실 내부)
<간송 조선회화 명품전>의 구성은 3개 섹션으로 구성된 바, 1섹션은 간송의 문화재 수집과 관련한 삶을 조명하고, 2섹션은 주요 출품작인 조선회화를 연대순으로 살펴보게 했다. 마지막 3섹션은 다양한 멀티미디어를 활용하여 관람객이 우리 고미술 감상을 참여의 형식으로 경험할 수 있게 했다.
좀처럼 관람객이 앞으로 빠지지 않는 답답한 전시관람 속도의 전시장을 거닐어 보았다. 전시장 초입에는 간송의 유품과 유작 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의 인장과 생전 사용하던 도구는 물론 그의 필법을 엿볼 수 있는 서예작업이 선보였다.메인 전시 격인 2섹션은 조선의 초기부터 말기까지 회화사를 일견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100여 점에 달하는 출품작의 36명에 이르는 작가의 면모도 화려하다. 학창시절 미술 혹은 역사 교과서에 실렸던 작품을 실견할 수 있는 기회가 흔한 것은 아니기에 전시작 하나하나를 쉽게 지나치기 아쉬웠다. 더욱이 간송은 조선회화 수집에 더 심혈을 기울였다하니 더 애달픈 생각마저 들었다.
1. <간송미술관 개관 80주년 기념-조선 회화 명품전> (대구미술관 전시실 1섹션 내부)
2. <간송미술관 개관 80주년 기념-조선 회화 명품전> (대구미술관 전시실 2섹션 내부)
3.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간송미술관 개관 80주년 기념-조선 회화 명품전> (대구미술관 전시실 3섹션 내부)
시기별로 몇몇 작품과 작가를 살펴보자. 우선 조선 초중기의 안견(安堅, 1418~?), 강희안(姜希顔, 1418~1465), 신 씨(신사임당, 1504~1551). 이징(李澄, 1581~?), 김명국(金明國, 1600?~?) 등의 작품이 보인다. 화원(畫員) 화가와 양반가, 여성 등 출신성분도 다양하다.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1447)로 친숙한 안견의 <추림촌거(秋林村居, 가을 숲 속의 마을)>는 조선전기 산수화의 묘법(描法)이 잘 드러난 대표작이라 하겠다. 역시 함께 출품된 강희안의 <청산모우(靑山暮雨, 푸른 산속의 저녁비)>와 더불어 조선의 대표적 컬렉터 김광국(金光國, 1727~1797)이 펴낸 《해동명화집(海東名畫集)》에 수록됐다.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로 칭송받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모친이자 대표적인 여류 문인으로 잘 알려진 사임당(師任堂) 신 씨의 <훤원석죽(萱苑石竹, 원추리꽃과 패랭이꽃)>, <귀비호접(貴妃蝴蝶, 양귀비 꽃과 호랑나비)>는 그의 초충도(草蟲圖) 양식을 살펴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김명국의 <비급전관(秘笈展觀, 비결을 펼쳐보이다)>은 표정의 세심함과 옷깃의 다소 거칠고 호방한 필치를 비교해 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1. 김득신 <야묘도추>2. 심사정 <촉잔도권>부분3. 김정희 <적설만산>4. 이정 <풍죽>
이른바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조선 후기는 회화가 만개한 시기로 꼽힌다. 일반인들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정선(鄭敾, 1676~1759), 심사정(沈師正, 1707~1769), 이인상(李麟祥, 1710~1760), 최북(崔北, 1712~1786), 강세황(姜世晃, 1713~1791), 변상벽(卞相璧, 1730~1775), 김홍도(김홍도, 1745~1806), 이인문(李寅文, 1745~1824), 김득신(金得臣, 1754~1822), 신윤복(申潤福, 1758~?) 등 이름 그 자체가 역사인 대화가가 다수 배출됐다. 화원화가와 더불어 남종화풍을 수용한 문인화가의 활동이 두드러지던 시기이기도 하다. 익히 알려진 정선의 다수 작품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 <풍악내산총람(楓岳內山總覽)>은 그야말로 금강산을 한 눈에 들여다보게 한다. 정선의 작품이 다수 출품된 이유로 그의 작품의 다양한 양상을 살펴볼 수 있었다. 문인화가 심사정의 8m가 넘는 달하는 두루마리 대작 <촉잔도권(蜀棧圖卷)>의 규모도 전시의 화제가 되기 충분했다. 상상에 의한 풍경을 그려낸 이 작업을 마치고 심사정이 이듬해 세상을 뜰 정도로 열정을 기울였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홍도의 <황묘농접(黃猫弄蝶, 노란 고양이가 나비를 놀리다)>에 등장하는 고양이와 나비는 당장이라도 화면 밖으로 나올 듯한 치밀한 묘사력이 눈에 띈다. 루브르에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있다면 지금 대구미술관에는 신윤복의 <미인도>가 있다. 국보 135호로 지정된 《혜원전신첩(惠圓傳神帖)》에 실려있는 이 작품은 그야말로 조선시대 대표적 여인상으로 각인되어 있다. <모나리자>가 그렇듯 <미인도>를 실견하는 현장에 길게 줄이 늘어서 있음은 당연하지 않을까?
<간송미술관 개관 80주년 기념-조선 회화 명품전> 신윤복의 <미인도>앞 관람객 (대구미술관 전시실 내부)

조선 말기는 김정희(金正喜, 1786~1856)로 상징되는 조선문인화의 완성과 장승업(張承業, 1843~1897), 조석진(趙錫晉, 1853~1920), 안중식(安中植, 1861~1919)으로 이어지는 화원화가 끝자락의 여정을 볼 수 있다. 추사난법(秋史蘭法)을 보여주는 <적설만산(積雪滿山)>, <세외선향(世外仙鄕, 세상 밖의 신선 향기)> 등을 이하응(李昰應, 1820~1898), 민영익(閔泳翊, 1860~1914) 등의 난법과 비교해 보길 권한다.

이번 <간송 조선회화 명품전>이 갖는 의의는 단순히 조선의 대표회화를 실견하는데만 있지 않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문화의 가치를 지키는데 얼마나 많은 이들의 희생과 열정이 있었는지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들 중 간송의 자리는 가장 높고 넓은 곳에 있다.

(사진제공_대구미술관 홍보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