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목차보기
대구예술의 힘
Print Friendly, PDF & Email
대구예술의 힘_아카이브
대구 문화재를 사랑한 ‘맥타가트 교수’
글_황희진 매일신문 디지털국 기자
올해 3월 7일 진행된 서울옥션의 올해 첫 경매에서 이중섭((1916~1956)의 「소」가 47억원에 낙찰됐다. 8년 전인 2010년 35억6천만원에서 11억원 넘게 뛴 가격이다. 이중섭의 작품 가운데 최고가를 기록한 것이다. 2개월 후인 5월 2일 ‘2018 서울옥션 부산 세일’에서는 이중섭의 「싸우는 소」가 14억 5천만원에 낙찰됐다. 2016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술계는 물론 연극계와 무용계 등 문화예술 각계에서 이중섭을 집중해 기린 바 있는데, 이후에도 이중섭은 여전히 ‘핫’한 조명을 받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중섭 작 「소」 (사진_매일신문DB)
‘이중섭 조명’이라는 각양각색의 장치가 무대에 끊임 없이 설치되고 있는 셈인데, 그 시초가 있다. 바로 아더 제이 맥타가트 박사(Dr. Arthur J. McTaggart, 1915~2003)다. 맥타가트 박사는 1915년 미국 인디애나주 로간스포트에서 태어났다. 고교 졸업 후 공장에서 4년간 노동자로 생활한 맥타가트 박사는 교사의 꿈을 갖고 인디애나주 퍼듀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이어 뉴욕주 코넬대학교로 전학, 비교문학을 전공했다. 1943년 코넬대 석사 과정에 진학했으나, 당시 2차 대전이 발발하자 군 입대를 선택했다. 군에서 교관으로 복무한 다음 캘리포니아주 스탠포드대학교로 가 교육학 박사과정을 거쳤다.

이제부터 맥타가트 박사와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한국전쟁이 휴전을 맞은 1953년이 기점이다. 앞서 1948년부터 미국 국무성 공무원이 돼 이탈리아와 폴란드에서 근무한 맥타가트 박사는 37세가 된 해인 1953년 부산으로 왔다. 주한 미 재무관으로 일했고, 자신의 교사의 꿈을 서울대, 고려대, 경희대 등에서 강의를 하며 펼치기도 했다.

이때까지는 그가 잠시 경험한 한국이다. 부산과 서울 다음 행선지인 대구는 그의 남은 인생 상당 부분을 채워주게 된다. 1956년 맥타가트 박사는 대구 미국 공보원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대구 미 공보원은 현재의 중앙로 대우빌딩 남쪽에 있었다. 그리고 이후 그가 만나게 되는 이중섭이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고 여러 예술가들과 교류한 향촌동은 바로 옆 동네였다.

1956년 미국 공보원 근무 시절
(사진_ 『맥타가트 박사의 대구사랑 문화재사랑』, 국립대구박물관 출판, 2001)
1955년 1월 맥타가트 박사와 이중섭은 첫 인연을 맺는다. 정확히 말하면 맥타가트 박사가 이중섭의 서울 개인전을 본 후 동아일보 그해 2월 3일 자 신문에 전시평을 쓴 것이다. 이어 5월에는 대구 미 공보원에서 이중섭 개인전이 열렸고, 맥타가트 박사는 「신문을 보는 사람들」 등 이중섭의 은지화 작품 3점을 구입, 미국 뉴욕 현대 미술관에 기증한다. 이어 다음 해인 1956년 4월 2일 뉴욕 현대 미술관 측은 이중섭의 은지화 작품들을 소장키로 최종 결정한다. 이는 한국 화가 최초 뉴욕 현대 미술관 영구 소장 사례다. 다만, 이중섭은 이 사실을 생전에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리구 그해 9월 6일 서울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맥타가트 박사와 이중섭의 가장 유명한 일화는 이렇다. 맥타가트 박사는 대구 미 공보원에서 전시회를 개최한 이중섭의 담배 은박지 소 그림을 보고 “그림 잘 봤습니다. 당신의 황소는 스페인의 투우처럼 무섭더군요”라고 했다. 그러자 이중섭은 화를 냈다. “내 소는 싸우는 소가 아니라 일하고 고생하는 소, 소 중에서도 한국의 소란 말이야.”그러면서 전시회에서 팔리지 않은 그림들을 대구 미 공보원 바로 옆 경복여관의 아궁이에 태워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얼핏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불협화음’으로 들리지만, 어찌됐건 맥타가트 박사의 작품 구입(맥타가트 박사는 귀국할 때에도 이중섭의 작품 10여점을 구입했다.) 및 미술관 기증 덕분에 이중섭은 점차 유명세를, 이중섭의 작품은 점점 가치를 얻게 된다. 물론 이를 이중섭이 직접 목격하고 또 누리지 못한 것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당시 이중섭을 알아본 사람으로 맥타가트 박사와 구상(1919~2004) 시인, 윤장근(1933~2015) 소설가 등이 전해진다. 일본 유학 시절 이중섭과 인연을 맺은 구상 시인은 이중섭의 작품을 자신의 첫 시집 「시집구상」 등 다수의 작품집에 표지화로 선택했다. 윤장근 소설가는 구상 시인과 함께 이중섭과 교류하며 이중섭의 전시회도 뒷바라지했다. 맥타가트 박사를 비롯한 여러 인사가 대구 시절의 이중섭을 조명하고 또 지원한 점은, ‘근현대미술의 메카, 대구’라는 수식을 쓸 수 있게 된 현재의 대구가 분명 빚을 진 부분이다.

1990년 제자들과 함께 해인사에서 (사진_ 『맥타가트 박사의 대구사랑 문화재사랑』, 국립대구박물관 출판, 2001)
맥타가트 박사의 안목은 예술품 또는 문화재를 구입을 하든, 이어 그것을 기증하든, 아니면 소개를 하든 어떻게든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안목이 그저 안목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게 이중섭은 물론 하회탈에도 적용됐다.

1954년 류한상 전 안동문화원장은 당시 대구 미 공보원장이던 맥타가트 박사에게 하회탈을 소개했다. 1960년 이전까지만 해도 하회탈은 안동 하회마을 주민들조차 10년에 한 번씩 열리는 하회별신굿 때에나 볼 수 있었다. 더구나 신령한 물건이었기에 나무궤짝 속에 보관된 탈을 꺼낼 때 향을 피워 제사를 올리고 절을 해야만 볼 수 있었다. 이걸 맥타가트 박사도 그대로 했다. 한국 문화재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맥타가트 박사는 당시 수소문 끝에 하회마을로 찾아와서는, 향을 피우고 절을 한 후 하회탈 사진을 촬영해갔다. 맥타가트 박사는 사진에 자신의 소개글을 곁들여 외신에 전했다. 이게 국제적으로 회자된 다음 한국 정부에 다시 전해졌다. 안동 하회탈 및 병산탈이 1964년 국보 121호로 지정될 수 있었던 하나의 연유다.

하회탈(사진_매일신문DB)
맥타가트 박사는 평생 모은 한국 문화재를 자신이 가장 오래 한국 생활을 한 대구에 기증하기도 했다. 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동양미술박물관에 위탁했던 토기 등 한국 문화재 482점이 2000년 4월 21일 대구박물관으로 이관됐다. 즉, 기증이었다. 이 결정이 아니었다면 맥타가트 박사의 그간의 한국 문화재 수집 및 반출은 다소 부정적인 시각에 놓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당시 맥타가트 박사의 방대한 수집 규모만큼 그의 꼼꼼한 기록도 화제가 됐다. 유물카드에 구입 경위 및 시기, 규격, 출토지 등을 자세히 기록해 학문적 가치를 높여서다. 그리고 또 하나. 같은 해 우리 정부는 프랑스가 병인양요 때 빼앗아 간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프랑스에 요구하면서 갈등을 빚었고, 당시 프랑스의 태도와 맥타가트 박사의 기증은 180도 다른 사례로 부각됐다.

대구박물관에 따르면 맥타가트 박사가 기증한 한국 문화재 482점은 고려자기, 조선백자, 분청사기 등의 미술품들을 비롯, 특히 경남 거창·합천·창년 등지의 가야 토기들이 다수로 구성됐다. 대구경북에서 출토된 신라토기 위주 문화재를 주로 갖고 있는 대구박물관은 맥타가트 박사의 기증을 계기로 신라·가야 토기의 수준 높은 비교 전시를 할 수 있게 됐다.

왼쪽부터 맥타가트 박사가 대구박물관에 기증한 유물, 고려 청자철·백퇴화국화문마상배, 고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신라 목항아리 및 그릇받침
(사진_ 『맥타가트 박사의 대구사랑 문화재사랑』, 국립대구박물관 출판, 2001)
맥타가트 박사는 대구로 온지 9년만인 1965년 베트남 전쟁이 벌어진 월남 미국 문화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공무원 생활을 마친 후 1976년 대구로 다시 돌아왔다. 영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초빙돼 20여년간 제자를 양성했다. 실은 그의 대구 문화재 사랑보다 좀 더 많이 알려진 게 그의 제자 사랑이다. 재산을 털어 수백명의 장학생을 배출했다.

대학 교수로서의 맥타가트 박사에 대해 ‘낡은 양복 서너벌, 무릎이 튀어나온 바지, 해진 구두 세켤레, 두세곳 꿰맨 양말’이라는 한 언론 보도 속 표현이 전해진다. 그는 최소한의 생활비 30만원정도를 제외한 월급과 연금의 대부분을 제자들에게 장학금으로 줬다.

영남대 인문관 1층 맥타가트 박사 흉상
맥타가트 박사는 1997년 영남대 교수직을 그만뒀다. 그의 나이 82세때다. 그리곤 40여년의 한국 생활을 마감하고 고국인 미국으로 돌아갔다. 태어난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다 2003년 7월 15일 워싱턴 근교 한 양로원에서 8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9년 뒤인 2012년 12월 8일 영남대학교는 인문관 1층 로비에 맥타가트 박사의 흉상을 세웠다. 2013년 7월 맥타가트 박사의 10주기를 앞두고 제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2천500만원의 기금으로 설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