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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_인터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한 맥타가트 선생님을 추억하며
글_김미지 영남일보 기자
‘가장 존경하는 분, 살아있는 성인, 한국 문화를 사랑한 외국인…’
맥타가트 선생님과 인연이 닿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맥타가트 선생님을 기억했다.
맥타가트 선생님은 1956년에서 1960년까지 미국 공보원의 대구 미국 문화원장을 역임했으며 1976년부터 1997년까지 21년 동안 영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초빙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미 문화원장으로서 미국문화를 알리는 공적인 일에 그치지 않았다. 한국 문화를 사랑했으며 도움이 필요한 학생, 아티스트들에게 경제적, 정신적 힘이 돼주었다. 말년에 건강이 좋지 않아 워싱턴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대구에서 ‘직업 외교관’ ‘민간 외교관’으로 역할을 한 것이다.

맥타가트 선생님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자신의 제자뿐만 아니라 가능성 있는 신진 아티스트는 물론이고 도움이 필요한 주변 사람들에게 큰 버팀목 역할을 했다. 그런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이용식 전 대구미문화원 부원장, 박승혁 이화여대 명예교수를 만나 생전 맥터가트 선생의 발자취를 되새겨보았다. 이용식 전 부원장은 1950년대 대구 미 문화원에서 함께 재직하며 그와 교류했으며 박승혁 교수는 1970년대 영남대학교에서 맥터가트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며 제자로서 인연을 시작했다.
맥타가트 선생님과 제자들이 함께 문화유적지를 방문해 찍은 기념사진. <우정장학회 제공>
▶ 맥타가트 선생님의 첫만남은 어떠셨나요?
이용식 전 원장(이하 이) : 맥타가트 선생님은 주한미국 대사관의 재무관으로 서울에서 근무하다 대구 미국 문화원장으로 대구에 내려왔다. 그때 함께 근무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취미가 공부, 문화 교류여서 그 뜻이 문화원에서 하는 일와 잘 맞겠다는 생각을 했다. 맥타가트 선생님은 사적으로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교류하길 즐겼다. 항상 식사자리에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초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사람을 편하게 만들 줄 아는 분이라 느꼈다.
박승혁 교수(이하 박) : 맥타가트 선생님을 1976년에 처음 뵀다. 당시 초등교사에서 중등교사로 전직하기 위해 주로 영어회화를 공부하려고 하던 때였다. 영남대학교에서 맥타가트 선생님이 가르치시던 영어회화를 청강하게 되었다. 선생님께선 청강을 흔쾌히 허락해 주셨고 그 이후로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해주시고 안동, 경주 등지로 문화여행을 다니실 때 나와 함께 가자고 해주셨다.
1990년 맥타가트 선생님이 박영호 교수 집 앞에서 찍은 사진. <박승혁 교수 제공>
▶ 맥타가트 선생님은 평소 전시회가 열리면 꼭 둘러보시고 해당 아티스트와 만남을 가지려고 노력하셨던 것으로 안다. 맥타가트 교수님이 신진 작가나 아티스트들을 어떻게 대해주셨는지 궁금하다.
이 : 평소 맥타가트 선생님은 전시회를 잘 다니셨다. 전시회에 가시면 작가와 꼭 이야기를 나누셨다. 그러면서 알게된 정보, 관련 화보, 자료 를 미술학도들에게 전해주곤 했다. 당시 한국사회가 전쟁 후 안정화를 찾아가면서 선진문화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높았다. 선생님은 공부, 정보에 목마른 미술학도들에게 세계적 흐름, 미술 트랜드 등을 알려주시곤 했다.

맥타가트 선생님이 미술 쪽에 조예가 깊어 한국 현대미술에 공헌을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이 도움을 준 아티스트 중에선 이중섭, 김환기 등이 있다. 1955년 이중섭 개인전이 열릴 당시 담배갑 속 은종이에 그린 그림을 보고 크게 감명해 그 그림을 사서 미국의 현대미술관에 보내기도 했다. 맥타가트 선생님는 이중섭의 그림에 대해 한국 정서를 절묘하게 잡아낸 그림이라고 평가했다. 이중섭 그림의 가치를 처음으로 안 외국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박 : 미술학도는 아니지만 선생님 제자들 사이에서 아티스트를 도와주기 위해 작품들도 많이 구매하신 것으로 들었다. 선생님께서 조금만 도와주면 꽃을 피울 수 있는 아티스트들이 많다며 작품 구매에도 상당한 열을 올리셨다. 세상 떠나시기 전에는 소장하던 그림들 중 일부는 미술관에 기증하거나 판매하여 학생들 장학금으로 사용하셨다.
선생님께서 친구들, 제자들을 식사에 초대할 때 자주 동석했었다. 선생님의 교제 범위는 여러 분야에 폭 넓게 걸쳐져 있어서 놀랐던 적이 많았다. 군인, 교사, 화가에서 미술 전공 학생, 경영 전공 학생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때마다 화제는 문화, 미술, 음악, 철학 등으로 다양했다. 그런 자리가 ‘문화살롱’처럼 느껴졌다. 학생들에게 의견을 물어봐주시고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셨다.
맥타가트 선생님과 제자들이 함께 문화유적지를 방문해 찍은 기념사진. <우정장학회 제공>
▶ 한국의 전통문화, 유교에도 관심이 높으셔서 경주, 안동 등 문화유적지 여행을 자주 하셨다고 들었다.
박 : 선생님과 함께 그 당시 가야시대 유적, 유물 전시회를 봤었다. 예술성에 감탄하시며 많은 양의 한국 도자기를 수집하셨다. 내가 한국인임에도 오히려 경주의 고적, 유적지 등을 둘려보며 한국 전통과 미술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그만큼 한국 문화와 미술에 조예가 깊으셨다. 말년엔 소장하고 있던 400여점의 도자기를 대구국립박물관에 기증하셨다. 대부분이 대구경북 지역에서 나올 수 있는 신라, 가야시대 유물이었다.
선생님은 유교문화, 역사까지 섭렵하시며 한국사회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하셨다. 한 일화로 선생님께서 일본과 한국사회를 비교하시면서 “일본은 남성지배적 사회(male-dominated society)이지만 한국은 여성지향적 사회다(female-oriented society)”라고 하셨다. 한국 사회가 유교 등의 영향으로 남성지배적 사회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성지향적인 사회라는 것이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남성이 독립적으로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결혼 전에는 어머니에게, 결혼 후에게 아내에게 의존한다고 하셨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모계사회의 유풍이 남아있다며 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했을 때 누가 왕이 되어야 하는 가를 대비(여성)이 결정했다는 사실을 말해주셨다. 선생님이 한국의 역사나 풍습에 대해서 꿰뚫어 보셨구나를 느꼈다.
이 : 맥타가트 선생님이 도자기를 수집한 것은 문화가 소중한 자산이라는 것을 일찍이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에 이탈리아에서 군생활을 했다. 그 곳에서 이탈리아의 문화재들을 보며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님은 전쟁 이후 우리나라, 대구에 와서 토기들이 곳곳에 파헤쳐져 있는 것을 봤다고 했다. 한국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인데 문화재 취급이 이렇게 돼선 안된다고 느껴 수집을 결심했다고 했다. 당시 우리는 전쟁 후 재건에 몰두해 문화재 보존에 대한 관심을 갖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는 문화의 힘을 아는 사람이었다. 기증 박물관을 대구국립박물관으로 선택한 것도 대구시민들의 그 지역에서 나온 문화재와 그 가치를 다시 한번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고심한 결과이다.
2016년 박영호 교수가 방문한 맥타가트 선생님의 묘소. <박승혁 교수 제공>
▶ 맥타가트 선생님처럼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다 보면 기회를 찾아 서울로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시간까지 본인의 고향이 아닌 타지, 대구에서 시간을 보냈다.
박 : 한번은 맥타가트 선생님께 서울에 있으면 더 좋은 학교에 다니실 수 있지 않느냐라고 물은 적이 있다. 선생님은 인자하게 웃으시면서 대구에 내가 도와줄 수 잇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출세주의자들을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이 : 그가 어려운 사람들을 진정으로 도왔던 것은 기계제작공으로 일했었던 그의 청년시절 영향이 컸다고 본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당시는 대공황이 일어나 가세가 기울었을 때였다.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기계제작소에 입사했다. 제작공으로 일하면서도 그는 독서를 하며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후 장학생이 되어 대학에 진학하게 됐다. 공부를 하고 싶었던 그가 적절한 도움을 받아 외교관으로, 교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들이 그가 도움이 필요한 타인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든 이유일 것이다.
▶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이 : 미 문화원은 미국을 다른 나라에 알리는 업무를 하는 곳이다. 맥타가트 선생님은 자신의 공적인 업무도 성실히 수행했을 뿐 아니라 한국 문화를 알리는 데에도 기여했다. 그가 화가들의 작품에 마음 뺏기지 않고 그것을 미국으로 보내 알리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까. 우리나라 화가들의 멋진 작품들이 빛도 보지 못한 채 사라졌을 수도 있을 것다. 한국문화를 알리는 일은 한국인이 했어야 하지만 그는 한 외국인으로서 그 일을 해왔고 또 해냈다.
박 : 선생님의 생활태도, 사상, 교육에 대한 열정 그리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존경한다. 내가 직접 경험한 이들 중에 망설임 없이 존경을 표할 수 있는 사람이다. 교육자로서 선생님을 흉내조차 낼 수 없었으나 그와 비슷해지기 위해 항상 노력하게 됐다. 감사하고 다시 한번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