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예술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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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예술의 힘_캐리커처 에세이
낭만주의 교육자 아더 맥타가트 박사
글_오성현 한국영어영문학연구소 소장
캐리커처_ 김승윤
30 여 년 전인가 미국유학시절, 한 겨울 눈이 많이 내린 추운 날씨의 크리스마스 이브에, 인디아나주 Logansport 에 있는 맥타가트 박사님 댁을 예고없이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맥 박사님(이후로 줄여서 맥 박사님이로고 함)의 여동생 Helen(전직 교수) 그리고 고향 주택을 지키며 사시는 남동생 William(전직 도서관 사서) 과 함께 하루 저녁을 보냈다. 맥 박사님이 평생을 다니던 고향 천주교회에 미사 참석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우리 세 사람은 맥 박사님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대화는 내가 몇 가지 질문을 하는 식이었는데, 뉴욕에 사는 간호사 여동생 Mary(부군은 물리학과 교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독신이었다. (이 여동생의 딸은 맥 박사님이 마지막 여생을 보낸 메릴랜드 주에 있는 요양원을 매주 드나들며 맥 박사님을 보살폈다.) 맥 박사님이 평생을 독신으로 보내고 있는 이유를 묻는데 대한 Helen의 답변은, 부모님의 고국 에이레에서는 국민들이 문학, 특히 시에 관심이 많아서, 젊은이들이 결혼을 늦게 하며, 결혼에 관심이 없어서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아서 맥 박사님의 독신 생활이 특별나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들 형제자매 세 사람은 맏형 아더 맥타가트 박사님부터 차례로 동생을 보살피고,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자며, 독신으로 살기로 합의 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고(故) 맥타가트 박사
그러고 보니, 맥 박사님 댁에 올 때 이용한 낡은 지역 택시의 여자 운전기사의 얘기가 생각났다. 나와 합승한 다른 한 손님을 내려주고(워낙 가난한 시골지역이라 택시의 합승은 일상이었다.), 나와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택시 기사는 맥 박사님을 Purdue 대학으로 몇 번 모셔다 드린 적이 있는데, 30 여 분간 Purdue 대학으로 가는 동안에 주고 받은 대화를 생각 할 때, 맥 박사님은 굉장히 재미있는 분이고, 낭만적이라고 말했다. 맥 박사님의 그런 낭만적 기질은 이 날 저녁 잠자리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이 날 저녁은 굉장히 추웠는데 외풍이 심해서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100년 된 낡은 주택 건물의 이층에 방을 달리하여, 나는 작은 방에, 낡아 빠진 누더기 이불을 덮고 침대위에 자고, 맥 박사님은 김정희 추사체 필본들과 신라에서 이조까지의 도자기들로 가득찬 10평 남짓의 공간의 바닥에 주무셨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나는 감기에 심하게 걸려 괴로웠고, 70이 넘은 맥 박사님은 벌거벗고 나오셨는데, 건재하셨다. 맥 박사님은 이러한 내핍 생활을 즐기시는 것 같았다.

맥 박사님은 꿈을 갖고 있지 않고서는 이런 고행 같은 삶을 영위 할 수 없을 것이다. 맥 박사님은 혼자 속에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꿈, 그 꿈을 먹고 사는 분 같았다. 그 때 나는 그 꿈은 나와 같은 가난한 학생들을 키우는 것을 보람으로 삼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맥 박사님이 6. 25 이후 폐허가 된 한국에 오셔서 30 여 년간 한국의 대학생들을 교육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도우면서 사신 것도 이러한 철저한 생활 정신이 바탕에 있었던 것 같다. 맥 박사님은 세계 2차 대전 시 이탈리아에 장교로 가셔서 많은 사람들을 사귀셨고,(생전 이탈이아에는 친구들이 많아서, 이탈리아에서 돌아가신다고 말씀 하신 적이 있다.) 월남 전 시에는 월남에 국무성 관리로 가셔서 월남인들을 경제적으로 엄청 도우셨고 자신이 사귄 우체국장 가족을 워싱턴 디시의 노모가 계시는 주택에 이민 보내서 그들에게 생활비까지 보내셨다. 맥 박사님은 어려운 형편에 놓인 국가에 가셔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젊은이들을 도운 것이 그의 삶속에 일맥상통한다.

맥 박사님이 6.25 직후 엄청 어려웠던 시절 폐허의 서울에서 서울대학교 등 몇 개의 대학교에서 강의 할 때 있었던 일화들도 유명하지만, 내가 군에서 제대한 후 영남대학교에 복학한 1976년부터 약 20 여 년 간 그 분이 영남대학교와 경북대학교에서 가르치실 때의 일들을 소개하고 싶다. 나는 DALA(Daegu Applied Linguistic Association: 대구 AFKN 청취회의 후신 단체)의 미군 방송 영어뉴스 교정일로 매주 2회씩 맥 박사님을 만나서 내가 받아쓴 뉴스 원고를 맥 박사님한테 교정 받았다. 맥 박사님은 일 주일에 여러 날씩 친구 분들과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술에 취해 나의 대구시내에 있는 내사무실로 교정하러 올 때가 종종 있다. 나이가 60을 넘겼는데도, 4년간이나 어김없이 일주일에 2회씩 저녁시간에 찾아오셔서 교정해주시는데, 술에 취해 피곤하실 때는 머리를 꾸벅거리며 졸면서도 끝까지 내색없이 1시간 남짓 수고해주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철저한 봉사정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북대학교 문과대학에 출강할 때(1955)

맥 박사님의 봉사 정신은 그 분의 우정관계를 보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주말이나, 특히 국가 공휴일, 방학 등에는 나와 여행을 가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경주 불국사 등지에서 아는 분들이 맥 박사님을 찾아와 인사하는 것을 보고 그 분의 교제 범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은 맥 박사님이 경북대학교 분수대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셨는데,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인사를 하러 오는지 인사 받기에 정신이 없으셨다. 몸을 숙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맥 박사님의 성실한 답례 습관이 후에 상당한 두통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해 보았다. 친구들의 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면, 맥 박사님은 누구에게나 “수억”이라고 답하신다. 나는 평생에 이렇게 많은 친구들을 갖고 계시는 분을 만나보기는 커녕 들어본적도 없다. 누구에게나 항시 웃으시면서 온 몸으로 반갑게 맞아주시는 맥 박사님의 생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맥 박사님이 이렇게 많은 친구들을 갖고 계시는 것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대학생들을 잘 보살피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6.25 직후부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때 도와 주셨던 젊은이들이 각계 각층, 특히 학계에 주름잡고 있으니, 그 분에 대한 선담 전파력이 어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1977년도 무렵부터 영남대학교에 장학금을 기탁하셔서 만들어진 우정장학회에 매년 수 천 만원 씩(해마다 액수가 늘어났음), 수십 명의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신 것이 1985년도 70세가 되던 해인 고희 때는 장학금 수혜자가 200 여명에 이르렀다. 맥 박사님은 대학 강의로 받은 월급과 오랜 세월 수집해온 미술품 및 골동품 도자기들을 팔아서 모은 모든 돈을 생활비에는 거의 쓰지않고, 거의 모두 불우한 대학생들에게 바치셨다. 그 학생들이 지금은 주로 서울과 대구, 경북의 주요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고, 6.25 때 대학 제자들은 그의 교훈을 잘 따르다가 많은 분들이 타계하셨다.
맥 박사님이 많은 불우한 대학생들을 도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철저한 검약 생활에서 가능 할 수 있었다. 맥 박사님은 택시를 타지않고, 승용차도 특별한 경우에 누가 제공하면, 제한적으로 수락했다. 항상걷기를 많이하고, 버스를 타고 다니시니까 몸도 건강하고, 남을 도울 수 있는 경제적 여유도 더 생기는 것이다. 맥 박사님은 늘 동전 주머니를 갖고 다니시면서 작은 액수도 철저히 계산하시는데, 미국에 유학 중인 나를 찾아오셔서도 시내에서 물건을 살 때는 센트 단위까지 동전 주머니에서 꺼내어 철저히 계산 하신다.

영남대학교 개교 3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1977)

1977년도 여름 방학 때인가 나는 맥 박사님과 다른 영남대학교 학생 정모씨와 함께 울릉도에 간적이 있다. 맥 박사님은 옷도 신사복 두벌을 교대로 입고 다니시지만, 구두도 튼튼하게 만들게 하여 10년 씩 신는 두 켤레를 교대로 신고 다니시는데, 그 흔한 등산화도 신지 않으시고, 구두를 신고 바닷가의 미끄러운 바위 위를 걷다가 미끄러져 바지가 찢어지고 촛대 뼈가 까진 적이 있다. 울릉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성인봉(해발 950미터)를 오르는 데도, 그 이전에 대구의 팔공산에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구두 신발로 미끄러지시면서 올라가셨다. 이런 단순, 소박한 생활로 낭비를 줄이는 그의 생활 철학은 사사건건의 실천적 삶으로 빛났다.

맥 박사님은 검소한 생활로 늘 자신을 남에게 낮추셨지만, 남에게 대하는 언사에서도 겸양의 미덕을 겸비 하셨다. 남들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수십년 나와 가까이 지내시면서도 손 제자뻘인 20대 후반 복학생인 나에게 매사에 나를 부를 때 한번도 빠짐없이 “Mr. Oh” 란 존칭어를 사용하셨다.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키실 때는 언제나 정중한 표현인 “Would you please mind . . . ?” 구문을 사용하셨다. 맥 박사님이 상품을 학생들에게 수여할 때도 학생이 단상에 올라오면, 먼저 머리를 푹 숙여 인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몸에 배인 겸손한 행동 등은 보고 듣는 이들로 하여금 늘 감탄과 감동을 주었다.

이경희 화백의 개인전에서(1957)
이제 맥 박사님께서 타계하신지 15년이 되었다. 나는 그 분의 숭고한 생활 양태에 늘 감탄하면서 살고 있다. 돌아가신 직후에는 4,5회 꿈에 나타나셔서 생전처럼 나를 다정하게 대해 주시는 데, 그 분의 은혜를 갚지 못해 죄인 된 느낌으로 자책하고 있다. 그분은 세상에 뿌린 귀한 씨앗을 잘 결실하고 있음을 하늘에서 내려다보시면서 기뻐하실 것으로 믿는다.
(사진출처_나전석 외 <맥타가트 박사 – 생애와 일화>, 동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