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커처_ 김승윤

맥 박사님은 꿈을 갖고 있지 않고서는 이런 고행 같은 삶을 영위 할 수 없을 것이다. 맥 박사님은 혼자 속에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꿈, 그 꿈을 먹고 사는 분 같았다. 그 때 나는 그 꿈은 나와 같은 가난한 학생들을 키우는 것을 보람으로 삼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맥 박사님이 6. 25 이후 폐허가 된 한국에 오셔서 30 여 년간 한국의 대학생들을 교육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도우면서 사신 것도 이러한 철저한 생활 정신이 바탕에 있었던 것 같다. 맥 박사님은 세계 2차 대전 시 이탈리아에 장교로 가셔서 많은 사람들을 사귀셨고,(생전 이탈이아에는 친구들이 많아서, 이탈리아에서 돌아가신다고 말씀 하신 적이 있다.) 월남 전 시에는 월남에 국무성 관리로 가셔서 월남인들을 경제적으로 엄청 도우셨고 자신이 사귄 우체국장 가족을 워싱턴 디시의 노모가 계시는 주택에 이민 보내서 그들에게 생활비까지 보내셨다. 맥 박사님은 어려운 형편에 놓인 국가에 가셔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젊은이들을 도운 것이 그의 삶속에 일맥상통한다.
맥 박사님이 6.25 직후 엄청 어려웠던 시절 폐허의 서울에서 서울대학교 등 몇 개의 대학교에서 강의 할 때 있었던 일화들도 유명하지만, 내가 군에서 제대한 후 영남대학교에 복학한 1976년부터 약 20 여 년 간 그 분이 영남대학교와 경북대학교에서 가르치실 때의 일들을 소개하고 싶다. 나는 DALA(Daegu Applied Linguistic Association: 대구 AFKN 청취회의 후신 단체)의 미군 방송 영어뉴스 교정일로 매주 2회씩 맥 박사님을 만나서 내가 받아쓴 뉴스 원고를 맥 박사님한테 교정 받았다. 맥 박사님은 일 주일에 여러 날씩 친구 분들과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술에 취해 나의 대구시내에 있는 내사무실로 교정하러 올 때가 종종 있다. 나이가 60을 넘겼는데도, 4년간이나 어김없이 일주일에 2회씩 저녁시간에 찾아오셔서 교정해주시는데, 술에 취해 피곤하실 때는 머리를 꾸벅거리며 졸면서도 끝까지 내색없이 1시간 남짓 수고해주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철저한 봉사정신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맥 박사님의 봉사 정신은 그 분의 우정관계를 보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주말이나, 특히 국가 공휴일, 방학 등에는 나와 여행을 가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경주 불국사 등지에서 아는 분들이 맥 박사님을 찾아와 인사하는 것을 보고 그 분의 교제 범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은 맥 박사님이 경북대학교 분수대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셨는데,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인사를 하러 오는지 인사 받기에 정신이 없으셨다. 몸을 숙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맥 박사님의 성실한 답례 습관이 후에 상당한 두통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해 보았다. 친구들의 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면, 맥 박사님은 누구에게나 “수억”이라고 답하신다. 나는 평생에 이렇게 많은 친구들을 갖고 계시는 분을 만나보기는 커녕 들어본적도 없다. 누구에게나 항시 웃으시면서 온 몸으로 반갑게 맞아주시는 맥 박사님의 생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맥 박사님이 이렇게 많은 친구들을 갖고 계시는 것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대학생들을 잘 보살피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6.25 직후부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때 도와 주셨던 젊은이들이 각계 각층, 특히 학계에 주름잡고 있으니, 그 분에 대한 선담 전파력이 어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1977년도 무렵부터 영남대학교에 장학금을 기탁하셔서 만들어진 우정장학회에 매년 수 천 만원 씩(해마다 액수가 늘어났음), 수십 명의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신 것이 1985년도 70세가 되던 해인 고희 때는 장학금 수혜자가 200 여명에 이르렀다. 맥 박사님은 대학 강의로 받은 월급과 오랜 세월 수집해온 미술품 및 골동품 도자기들을 팔아서 모은 모든 돈을 생활비에는 거의 쓰지않고, 거의 모두 불우한 대학생들에게 바치셨다. 그 학생들이 지금은 주로 서울과 대구, 경북의 주요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고, 6.25 때 대학 제자들은 그의 교훈을 잘 따르다가 많은 분들이 타계하셨다.
맥 박사님이 많은 불우한 대학생들을 도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철저한 검약 생활에서 가능 할 수 있었다. 맥 박사님은 택시를 타지않고, 승용차도 특별한 경우에 누가 제공하면, 제한적으로 수락했다. 항상걷기를 많이하고, 버스를 타고 다니시니까 몸도 건강하고, 남을 도울 수 있는 경제적 여유도 더 생기는 것이다. 맥 박사님은 늘 동전 주머니를 갖고 다니시면서 작은 액수도 철저히 계산하시는데, 미국에 유학 중인 나를 찾아오셔서도 시내에서 물건을 살 때는 센트 단위까지 동전 주머니에서 꺼내어 철저히 계산 하신다.

1977년도 여름 방학 때인가 나는 맥 박사님과 다른 영남대학교 학생 정모씨와 함께 울릉도에 간적이 있다. 맥 박사님은 옷도 신사복 두벌을 교대로 입고 다니시지만, 구두도 튼튼하게 만들게 하여 10년 씩 신는 두 켤레를 교대로 신고 다니시는데, 그 흔한 등산화도 신지 않으시고, 구두를 신고 바닷가의 미끄러운 바위 위를 걷다가 미끄러져 바지가 찢어지고 촛대 뼈가 까진 적이 있다. 울릉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성인봉(해발 950미터)를 오르는 데도, 그 이전에 대구의 팔공산에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구두 신발로 미끄러지시면서 올라가셨다. 이런 단순, 소박한 생활로 낭비를 줄이는 그의 생활 철학은 사사건건의 실천적 삶으로 빛났다.
맥 박사님은 검소한 생활로 늘 자신을 남에게 낮추셨지만, 남에게 대하는 언사에서도 겸양의 미덕을 겸비 하셨다. 남들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수십년 나와 가까이 지내시면서도 손 제자뻘인 20대 후반 복학생인 나에게 매사에 나를 부를 때 한번도 빠짐없이 “Mr. Oh” 란 존칭어를 사용하셨다.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키실 때는 언제나 정중한 표현인 “Would you please mind . . . ?” 구문을 사용하셨다. 맥 박사님이 상품을 학생들에게 수여할 때도 학생이 단상에 올라오면, 먼저 머리를 푹 숙여 인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몸에 배인 겸손한 행동 등은 보고 듣는 이들로 하여금 늘 감탄과 감동을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