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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와 사랑하는가?
– 이 시대 청춘들의 조금은 ‘위험한’ 사랑 –
글_천선영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
젠더 이슈를 둘러싼 생각의 격차

생각이 다르다, 대화가 안 되는 것이 ‘정당한’ 이혼사유가 되는 세상이다. 노인세대 분들은 혀를 끌끌 차실 지도 모르겠지만, 그 분들도 경험한 적 있지 않으실까. 벽과 이야기하는 느낌, 그 막막함. 더구나 누구보다도 나를 잘 이해해주어야 할 것 같은 상대방과 말이 통하지 않는 느낌, 그것은 얼마나 참기 어려운 일인가.

이런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우리 시대 청춘들의 사랑을 새삼스레 고민하게 되었다. 성별에 따라 얼마나 큰 젠더 인식의 평균적 격차가 존재하는지를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성별전쟁’을 부추길 의사는 결코 없으나, 글의 전개상 성별적 범주 구분을 피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관찰되는 사실에 기초한 이야기이니, 정직하게 정면으로 건너가 보려 한다.)

가을학기에 진행하는 젠더 교양 수업에서도 그 차이를 매년 확인한다. ‘젠더 이슈, 페미니즘 등에 우호적인 비율이 얼마나 될까’라는 질문에 여학생들은 여학생 중 10명 중 최소 5명~7명은 되지 않겠나 하는데 반해, 남학생들은 남학생 중 많아도 1~2명 아닐까라고 한다.(어떤 학생은 20명에 1명 정도일 것이라고도 한다.) 다른 객관적 자료들을 찾는 수고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매일매일 온 몸으로 확인하며 살고 있으니…

남여 인식차표
이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여학생들은 ‘예쁘다’는 말이 때로 불편하고, 때로 무례하게까지 느껴지며, 때로 성희롱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반해, 남학생들은 ‘아니 그게 왜’, ‘칭찬이잖아’라는 반응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이다.
“Please aim for a girl” – 불쾌, 분노 vs. 과도한 민감성
얼마 전 우리 학교 학생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논란이 되었던 사진(특정 상업공간의 남성 소변기 문구)이다.
이 사진을 본 여학생 다수는 즉각적으로 불쾌한 감정을 느끼는 반면, 남학생 중 적지 않은 수는 ‘화장실 깨끗하게 사용하라는 의도 아니겠나’, ‘농담을 다큐로 받나’, ‘뭐 이런 것까지 문제를 삼나'(순화된 언어로 전한다) 이런 분위기였던 것 같다.(와중에 때 아닌 영문법 논쟁(aim to가 아니라 aim for이니 문제가 아니라는 식의 얘기)이 벌어졌다는 것도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이 영어 문장은 문법적으로나 문맥적으로나 한 가지로밖에 해석될 수 없다. 만약 다른 의미로 사용했다면 잘못 쓴 문장이다. 오래된 농담이지만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가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라는 의미일 수 있지 않냐는 수준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이 문장의 해석 문제는 젠더민감성과는 –요즘 말로- ‘1도 관계없다’.)
논란이 되었던 특정 상업공간의 남성 소변기 문구가 적힌 사진

학생들에게 들은 바로는 오간 말의 공격성이 더해져 결국 이 논쟁의 핵심(특정 범주에 속하는 다수의 사람에게 불쾌감을 유발하는 문장이 공공장소에 버젓이 또는 생각없이 게시된 것)보다 과도하게 반응하고(인터넷 게시 및 비판) 지나치게 대응하는(이 문장이 게시되었던 장소에 가지말자는 주장) 것 아니냐는 논쟁으로 흘러버린 감이 없지 않다.

지금 여기에서 이런 인식 격차의 원인이 무엇이며, 어떤 해결책들이 있는 것인지 길게 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선 나는 조금 다른 질문을 하고 싶다.

누가 누구와 사랑하는가?

그것은 ‘누가 누구와 사랑 하는가’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사 전반에, 특히 연애, 결혼, 출산과 육아 등의 과정에 있어 성과 젠더 문제가 얼마나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도대체 우리 사회에서 – 특히 젊은이들- 누가 누구와 사랑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언급된 경험적 데이터에 비추어 말해보면, 남학생들은 자신의 여친이 그나마 ‘급진적 페미니스트’가 아니길 빌어야 할 판이고, 여학생들은 열에 한 명도 되지 않는다는 높은 젠더 민감성을 가진 남친을 만날 행운을 기다려야 한다.

예쁘다는 칭찬이 때로 왜 어떻게 성희롱이 될 수 있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가는 젊은 남성. 야하게 입고 다니지 마라, 밤늦게 다니지 마라는 ‘착한 조언’이 왜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논리로 확대 해석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젊은 남성이 있는가? 한 가지만 생각하시라. 여성 중 적어도 과반수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개연성이 높다는 것. 그리고 연애 중인 남성이라면 상대방과 이런 얘길 진지하게 나눠본 적이 있는지, 그것에 대한 상대방의 의견을 알고 있는지 자문해보시길…

연인과 정치 얘기?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종교 얘기? 마음먹으면 안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성과 젠더 문제를 건너뛰고 지속할 수 있는 연인관계가 ‘논리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젠더 민감성이 높은 축에 속하는 여학생들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결론은 비혼’일 수밖에 없다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이야기들을 한다.(논리적으로는 젠더민감성이 낮은 축에 속하는 남학생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인 듯…)

물론 다른 한편 -혼인율 감소, 이혼율 증가, 가족 해체, 저출생(低出生)1)의 ‘공포’가 회자되는 현실이긴 하지만- 길거리에는 젊은 연인들의 물결이 넘친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나 싶기도 하다.

성별간 면대면 젠더 대화 ‘실종’

허나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질문 하나가 있다. 젊은 연인들은 성과 젠더 이슈에 대해 진지하고 솔직한 대화를 나눌까? 학생들의 대답은 대부분 ‘아니오’다. 여학생들은 주로 ‘분위기가 싸해질 것 같다’, ‘싸울 것이 뻔하다’, 그래서 이야기 자체를 회피하게 된다는 답을 한다. 남학생들은 관심이 없거나, (정확하게 이유를 대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지만) 이 주제 자체를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게 있는 듯하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자체만 들어도 기분이 안 좋아지기도 한단다. 성별 간, 특히 젊은 연인들 사이에서도 성과 젠더 관련 대화다운 대화는 ‘실종’ 상태가 아닐까 한다.

이런 상황은 대단히 아이러니하다. 꽤 많은 사람들이 젠더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심지어 관심을 갖도록 강요(?)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혹자는 말한다. 젠더 이야기가 갑자기 차고 넘치는 것 아니냐고. 이유가 뭐냐고. 당혹스럽고 피곤하다고.

맞다. 젠더 담론의 양 자체가 급격하게 증가한 것은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특이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생활세계의 젠더 담론 실종’이 그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젠더 공론장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형성되어 있는 것 같다. 정당 대변인의 공식 브리핑 내지 TV 뉴스나 신문 사설로 대표되는 지극히 ‘정치적 올바름’에 기초한 젠더 담론, 페미니즘 진영에서 이루어지는 담론과 활동, 그리고 온라인상에서 관찰되는 극심한 ‘젠더전쟁’.

이 세 공론장에서 젠더담론은 때로 꽤 큰 차이를 드러내고, 가끔은 그 차이가 너무 커 보여 과연 조정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우리 사회 전반적 평균은 어디쯤 와있을까 하는 질문을 해보게도 된다.

동시에 또 하나 관찰되는 재미(?)있는 현상은 일상생활 안에서 성과 젠더에 대한 성실한 대화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기성세대야 그렇다 친다 해도 젊은이들 사정도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친구들 사이에서 여학생들끼리, 남학생들끼리 나누는 이야기가 없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그것도 성과 젠더 이슈의 특정한 부분에 국한된 경우가 적잖은 듯하고, 서로 다른 성별의 젊은이들이 맨 정신으로 이 문제 전반에 대해 얼굴을 맞대고 서로의 다른 의견을 확인하고, 토론하고, 조율하는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오가는 이야기들의 수준은 안타깝게도 ‘우리 학과 여/남학생들 외모 순위’ 정도인가? 학생들에게 듣는 이야기는 자주 많이 슬프다. 젠더 수업 수강하는 남학생은 “남자가 왜 그런 걸 듣냐, 여학생들 많아서 듣냐”는 소리를 듣고, 페미니즘 관련 서적을 들고 다니는 학생은 “너도 꼴페미냐”는 비아냥을 듣는단다. 친구, 동료들 사이에서도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조차 조심스럽단다. 이런 현실은 언론, 인터넷에서의 젠더담론 홍수를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다.

젊은이들이 성과 젠더 관련 사회적 이슈에 대해 접하게 되는 경로는 대부분 인터넷이고, 인터넷상의 젠더담론이라는 것이 자주 ‘막말전쟁모드’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불균형은 심각한 우려를 갖게 한다. 심지어 연인관계에서조차 성과 젠더 대화가 가능하지도 하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거의 절망적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성과 젠더문제에 대한 진지하고 솔직한 의견교환 없는, 아니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건강하게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우리는 ‘오래오래 행복’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 이런 관계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설사 이들이 결혼에 ‘성공’한다 해도 ‘오래오래 행복하게’가 가능할까?

예전엔 여성과 남성 모두 비교적 낮은 수준의 젠더의식을 갖고 있었고, 설사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 해도 공고한 가부장적 질서 하에서 그런 차이들은 가려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젠더의식의 격차, 특히 성별적 젠더인식 격차가 급격히 증가했을 뿐 아니라. 그 차이를 무화시킬 수 있는 가부장적 질서는 더 이상 힘이 없다.

젠더인식 변화과정 그래프
사회가 변해가는 방향은 정해져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는 젠더문제뿐 아니라 모든 측면에서 수평적, 개방적, 포용적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고, 방향이 바뀔 가능성은 거의 ‘0’이다. 가는 중에 좀 시끄러운 소리가 나겠지만, 그 방향이 우리 시대가 받아들인 ‘올바름’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젠더문제만 다르게 전개될 가능성. 그것도 거의 ‘0’이다.
지금보다 젠더 민감성이 낮아질 가능성, 거의 ‘0’

이 얘기는 우리 사회의 젠더민감성이 점점 높아지는 방향으로 이동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과학적 예언’이다. 예상적중률은 감히 거의 100%라 생각한다. 반대의 흐름을 타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쪽으로 가는 길에서 개인이, 또 우리 사회가 치러야하는 막대한 손실이다. 여성의 젠더 민감성이 높아지는 속도와 남성의 그것이 높아지는 속도 사이의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그로 인한 갈등의 소지는 점점 많아지고 격해질 것이다.(사실 이런 상황은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에도,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사이에도 적용될 수 있는 상황이다. 구조적으로 사회적 약자의 인식전환이 더 빠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 사이의 성과 젠더 문제는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보다 더 기본적이고 전방위적인 적용범위를 가지고 있다.)

적잖은 남성들은 현 상황이 마뜩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미안하게도 다른 전망을 하긴 어렵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과연 남성들에게 ‘나쁜’ 일일까? 나는 물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른 기회에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게 되길 바라지만) 설사 이런 변화가 여성’만’을 위한 것이라 해도, 궁극적으로 이런 변화는 여성들에게 보다 많은 주체성과 책임을 요청하는 길이 될 것이며, 오히려 남성들에게 ‘해방’의 길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 지워졌던 부당한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를 요청하는 여성들은 과연 누구인가? 남성들의 어머니이고 누이이고 친구이고 애인이고 부인이고 딸이다.(논의가 이성애자들 기준으로 흘러가는 듯해서 살짝 불편하지만, 그들 중심으로 사회가 흘러가는 것은 사실이니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리 호소해본다.) 자신들이 조금 또는 많이 불편해하는 길, 그 길이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원하는 길이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와 왜, 무엇을 위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출산장려금보다 중요한 것

나는 젊은이들이 행복하게 함께 살기를 진심 바란다. 그런데 그것은 젊은이들 사이의 성과 젠더 문제에 대한 진지하고 성실한 이야기들이 우리 사회 젠더담론의 빈자리를 채우지 않고는 어려워 보인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행복한 연애와 평온한 가정? 저출생문제 해결? 요원하다. 내 눈에는 성별적 젠더인식 격차 해소 노력이 출산장려금보다 우리 사회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훨씬 더 절실해 보인다.2)

이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자. 우리, 아니 결국 나 자신을 위하는 일인데… 이미 충분히 많이 늦었다!

  • 1)‘저출산’이라는 말이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책임을 지우는 느낌이 있어 ‘저출생’이라는 말로 대체하자는 움직임에 동의하는 마음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다.
  • 2)인구학자 조영태는 우리 사회의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8가지 인구학적 변수를 정리해 제시하는데, 그 맨 앞에 초저출생, 만혼, 비혼이 있다는 것도 기억하자. 물론 그가 그 원인이 성별적 젠더인식 격차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