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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_이색문화
소박했던 행복했던
글_윤규홍 갤러리 분도 아트디렉터/예술사회학
칼부림에 주먹을 쓰는 무협영화가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무협을 현대식으로 해석했던 몇몇 영화들 가운데 홍콩 배우 성룡이 나온 작품은 좋아했다. 아니, 지난 시절에 성룡을 싫어하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 사람이 더 이상하다. 그 한 명으로도 족했으나, 성룡이 친했던 두 사람, 홍금보와 원표가 삼총사를 이루어 활약하던 골든 하베스트 사의 의 영화들은 지금 봐도 재미있다. 그 중에 「쾌찬차」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다. 세 배우의 나이와 숙련도가 정점에 오른 시기에 나온 영화인지라, 이게 성룡의 대표작은 아닐지 몰라도 가장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는 팬들이 많다. 그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영화 제목인 쾌찬차가 어떤 뜻인지 알게 된 게 요 근래의 일이다. 그 뜻인즉슨 쾌찬차는 우리말로 푸드 트럭이란다.
영화 「쾌찬차」 스틸컷 (사진출처_네이버 영화)
영화에서 볼거리는 성룡과 원표가 푸드트럭에 음식 재료를 싣고 공원 어귀에 주차한 후에 벌어진다. 트럭이라기보다는 밴에 가까운 차가 버튼을 누르자 창과 문이 이리저리 열리고 닫히며 조리대와 테이블이 펼쳐지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은 예컨대 아이언맨 첫 번째 시리즈에서 토니 스타크 몸을 감싸며 수트가 입혀지고 볼트가 조이며 슈퍼히어로로 변신하는 씬이 관객들에게 던져준 스펙터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구닥다리지만, 당시에는 꽤나 즐거운 눈요기였다. 이유는 그렇게 작은 자동차가 근사한 식당으로 변할 수 있게끔 잘 준비되고 수납된 방식과 구조로부터 취하는 쾌감이다. 무술로 단련된 푸드트럭 주인들은 역시나 재빠른 손놀림으로 먹을거리들을 척척 완성했다. 영화야 뭐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곳에 악당들이 등장해서 어쩔 수 없는 싸움에 휘말린 끝에 더 큰 음모를 막아내는 뻔한 영웅담이다. 하지만 많은 영화 관객들은 주인공들의 근사한 요리솜씨를 보면서 이미 그들의 싸움 실력을 가늠하게 하는 장면을 지금껏 기억한다.

언젠가부터 우리 주변에서 푸드트럭을 종종 보게 된다. TV 오락 프로그램에도 솔깃한 소재가 되고 있는 푸드트럭은 하나의 업종이라기보다 그것을 둘러싼 현상이나 트렌드로 보는 편이 맞다. 푸드트럭이 가진 매력도 옛날 그 영화에 보며 느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도 한 가지 음식이 만들어지기까지 들어가는 시간과 재료와 과정을 가능한 단출하게 준비하는 간략미가 그 매력의 첫 번째다. 또 어디에나 가서 전을 펼쳐놓을 수 있는 기동성이 두 번째다. 기동성이라기보다 뭐랄까, 어느 한 곳에 애정을 두고 정착하지 않은 채 여기저기를 떠도는 방랑자 같은 낭만성으로 짚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리고 세 번째로 조리사 상인들이 부지런히 요리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는 친근성 내지 투명성도 매력의 일부분이 분명하다. 종합해서 보건데, 푸드트럭을 사람들이 찾는다면 그것은 의외의 장소에서 평범하지 않은 시설차량에서 사람들과 가까이 다가간다는 세 가지 매력이 맞물린 결과다.

2018 컬러풀대구페스티벌 푸드트럭 거리
그런데 가만히 따지고 보면 푸드트럭이 이제 우리 곁에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느 동네 어귀에나 떡볶이·어묵·순대 분식류나 붕어빵 트럭이 있을만한 자리에는 꼭 서 있지 않나. 그리고 훨씬 전으로 올라가면 포장마차도 있고 리어카도 있었다. 포장마차가 말이 끌지도 않는데 왜 마차라고 부르는지 알 수는 없지만, 리어카는 사람 힘으로 움직인다. 거기에 번데기, 솜사탕 같은 간식거리를 싣고 학교 졸업식이나 운동회에 나타나던 행렬은 이제 도심에서는 점점 보기 힘들어진 풍경이다. 리어카나 차량이나 이런 노점에서 맛볼 수 있는 음식을 우리는 오랫동안 불량식품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상하지. 유독 길거리에서 파는 식품 앞에 불량이란 말이 따라 붙는다. 깨끗하지 못한 주방에서 조리해 내어놓는 식당 메뉴를 불량식품이라고 부르는 일은 흔치 않다. 이렇다면 양호한 식품과 불량한 식품을 가르는 기준은 단순한 위생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통제의 유무에 다른 것일 수도 있다.
푸드트럭을 단지 기동성 있는 리어카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서 사먹는 음식을 불량식품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푸드트럭이 하나의 외식문화로 정착시키는 데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듯하다. 그 노력 때문인지, 여기저기에서 푸드트럭으로 자수성가한 성공사례가 들린다. 또 어떤 지역에 가면 푸드트럭이 모인 명물거리가 형성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 좋은데, 밝은 면만 보자면 그렇고, 다른 한 편에 놓인 실패사례나 행정 마찰은 어두운 면이다. 햄버거와 컵밥으로 출발하여 브랜드가 커나간 푸드트럭이 아직 많은 이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이며 현실은 그것과 다르다. 정부나 지자체를 하나의 주체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 하는 기관의 대략적인 방향은 푸드트럭이 새롭고 이색적인 문화로 자리 잡는 일보다 청년창업에 의한 일자리 창출에 훨씬 더 관심이 가 있다.
2018 컬러풀대구페스티벌 푸드트럭 거리

이런 취지가 제대로 통하면 좋지만, 전체 산업에서 자영업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우리나라에서 특정한 사업에 대한 지원은 또 다른 소외를 낳는 게 당연하다. 기존 상인들을 보호하면서 푸드트럭까지 흥하게 하는 방법을 찾다보면 해답은 산으로 들로 향하게 마련이다. 자치단체의 요청에 따라 푸드트럭이 머무는 곳들은 시내 도심이 아니라 사람이 한적한 관광지나 문화체육 시설이다. 이런 곳도 공연 당일이나 전시 개막일 같은 특별한 행사로 제한되는 경우가 있다. 문화예술기획에서 푸드트럭은 엉뚱하게 이용되는 측면이 있다. 행사에 이런저런 구색을 갖추기 위해서 본 프로그램 이외에 마련된 부대행사로 푸드트럭을 동원하자는 생각은 쉽게 할 수 있다. 발상도 쉽고 실행도 쉽다. 왜냐하면 푸드트럭 창업자들은 을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직종 군이 있는데, 바로 플리마켓 참가자들이다. 월평균 수입이 백만 원에 미치지 못하는 자영업자가 전체 상인의 20퍼센트에 달하는 현실에서, 더구나 부의 편중이 심한 예술계에서 푸드트럭 사업과 플리마켓에 뛰어든 개인들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안정되고 온당한 보상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지금 그대로라면 푸드트럭 업주들은 인디언 보호구역에 묶인 아메리카 원주민들처럼 그들이 가진 창의적인 의욕이 관리되며 포장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많은 나라에서 문화의 민주화 원칙에 따라서 ‘찾아가는 예술’이 실현되고 있다. 여기에 발을 들인 예술가들이 자신이 원래 닦아오던 예술의 본류를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만큼 제한되거나 틀을 바꾼 형태를 선보이는 예가 많다. 아직 축적된 데이터 양이 많지 않지만 이 글을 쓰는 나는 현장 예술에 참여하는 작가들이 가지는 성취감과 좌절감을 항목으로 분류하고 정의내리는 사회과학 연구를 생각 중에 있다. 순수 예술은 그렇다 치고, 푸드트럭은 어떻게 될까? 자본주의는 서브컬처와 카운터컬처가 가진 삐딱한 매력을 기성문화에 흡수해왔다. 내가 보기엔 불량식품이 푸드트럭으로 격상된 모습보다 백화점이나 대형쇼핑몰이 건물 속에 푸드트럭 조형을 꾸미고선 먹을거리를 파는 상황이 더 기묘하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 그럴듯하고 매출을 더 올리는 괴랄한 상황을 시뮬라시옹(Simulation)이라는 고색창연한 개념으로 바라본다는 게 지루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또 달리 설명할 방법도 내겐 없다.

2018 대구 동성로축제 푸드트럭 거리 (사진출처_대구중구청 블로그)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계. 미각도 시각 이미지에 지배당한 채, 유별나 보이는 분위기나 데커레이션에 현혹당하는 일이 늘 벌어진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노출시킨 이미지는 가상의 맛집을 현실 속에 불러오고, 그 가짜 앞에 많은 사람들은 무력하다. 푸드트럭도 그 이미지의 힘에 적당히 편승하는 게 현실적으로 안전해 보인다. 하지만 윤리적인 척 하는 미디어는 이 간이음식에 좀 더 높은 질을 요구한다. 이런 모순된 공공성 앞에서 현대 예술은 그 판을 깨고 벗어날 수 있다. 푸드트럭도 그 각각의 차량 한 대가 저마다의 꿈을 품는 게 바람직하다. 꿈은 허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게 소박해도 좋다. 어릴 때 동요가 이어지는 스피커 소리에 목마를 단 리어카가 동네에 오던 날을 떠올린다. 비록 놀이공원은 아니지만 그 간이 목마 한 대가 그곳의 풍경을 행복하게 바꾸어 놓았다. 내가 생각하는 푸드트럭이나 예술도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