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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기고 #3
대구, 나의 찬란한 여름
글_최지이 대구예술발전소 7기 단기작가
대구
대구는 예술가로 성장하기에 참 좋은 도시인 듯하다. 특히 대학 졸업 이후 젊은 작가들의 크고 작은 기관들과 문화공간들에서의 전시 기회가 많고 다양하며 또 그만큼 좋은 토양을 지닌 잠재력 있는 문화인력 인프라와 작가 군이 많은 도시라는 느낌이다.
대구예술발전소 레지던시 입주작가 작업실 전경
내가 있던 수창동 대구예술발전소에서 레지던시를 하는 동안에 가장 부러워하면서 그 가능성에 가슴을 뛰며 본 대구의 모습에는 바로 아직 스스로를 박제하지 않은, -혹은 외부로부터 박제당하지 않은- 젊은 예술가들이 마음껏 펼쳐 놀 수 있는 큰 전시공간, 재료와 인력을 구하는데 좌절하여 작업 자체를 꺾어버리지 않게 해주는 다양한 지원사업들이 있었다. 특히 타 지역들에서와는 다른-, 좋은 것을 받아들이는데 어느 단체건 가질 수 있는 스스로의 배타적 성향을 누그러트릴 줄 아는 여유로움이 보인다. 지역의 젊은 작가들이 고여 있지 않고 다이나믹한 경험들로 자라게 해줄 토양 혹은 지평을 마련해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굉장한 힘과 지지를 받는 구나 대단하다고 느꼈다. 대구의 젊은 작가들은 대단한 부모의 후광을 가진 다부진 아이 같았다.
젊은 시절 타지에서 생계와 작업을 이어가기 위해 분주하고 바쁘게 살았던 예전을 떠올리면 여전히 매 때마다의 어려움이 있었겠으나 작품을 구상하고 제작하는데만 에너지를 쏟으며 다른 여건들을 마련하느라 분주하지 않아도 되었던 나의 대구예술발전소에서의 레지던시 기간은 천국 같은 기회였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기분. 에너지가 넘쳐 꿈을 꾸듯 다시 대학시절로 돌아가 친구들과 하하 호호 작업을 하던 때가 된 듯 나는 살짝 상기되어있었다.
대구예술발전소 1층 유리케이스 설치
대구예술발전소 레지던시 2017
공고에 뜬 작가 모집 안내를 보고 인터뷰를 통해 예술발전소에 입주한 2017년 이후 내게 실제로 이곳은 정말 놀이터처럼 대학시절처럼, 같은 관심사를 가진 친구들도 만나고 맨발로 뛰고 놀며 신나게 작업을 펼쳐 낼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었다. 나는 일단 집이 없어 방황하던 내 작업들을 작업장 한쪽 벽 가득 붙이기도 하고 온종일 마음껏 큰 캔버스들을 짜다가 더우면 샤워하고 나와 내방 가득 작업들을 보면서 빈 공간들에 눈을 반짝이며 꿈을 그려갔다. 때때로 3층 공연홀에서 음악이 들려올 때면 스튜디오 문을 활짝 열어젖혀서 음악이 공간을 타고 퍼져와 몸으로 전달되어 오도록 바닥에 드러누워 울림을 이미지들로 뻗어내 보기도 했다. 그럴 때면 건물 전체가 내게 노래를 불러 주는 듯 기쁘고 마음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2017 대구예술발전소 오픈스튜디오 기간 중 스튜디오 내 액자 설치컷과 스튜디오 7 작가의 작업공간
무료할 틈이 없었다. 오픈스튜디오와 범어 주교좌성당에서 구상해 본 개인전을 마치고 나니 어느덧 계약한 시간이 지나 나는 곧 짐을 꾸려 퇴소할 시간을 만났다. 인근 구미지역에서 활동하던 나는 아쉬움과 그리움을 가지고 당연하다는 듯 이후에도 자주 예술발전소에 들러 기획자와 작가들을 만나고 작당모의도 하며 작품과 작품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전시 기회들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가장 먼저 레지던시 기간 중 제안 받았던 지역예술활성화 프로그램 중 하나로 예술발전소 1층 유리 공간에 자유 드로잉을 시작했다.
가슴이 뛰었다. 얼마 만에 즐겁고 새로운 도전이 되었는가, 나는 다시 어린아이처럼 그림이 즐거워졌다. 게스트룸에서 펜 하나 달랑 들고 내려와 사다리를 타고 유리창을 도화지삼아 여기고 저기고 작은 이미지만 가능했었던 상상들을 확장시켜 펼쳐 내려갔다. 밤이면 깜깜한 밖의 공간이 낮에는 안팎의 미미한 경계에 숨어있던 그림들을 대비시켜 더욱 살아나게 해줬다. 낮에 널따란 유리벽 여기저기에 낙서?를 하고 돌아다니던 나는 스스로 이상한 나라의 행복한 앨리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껏 별 자랑거리 하나 없던 나는’나 허락받고 놀아요’하는 행복한 마음을 자랑하고 싶었던 걸까, 괜히 머리를 조금씩 탈색하고, 스스로 고수하던 오리지널리티의 규칙성을 깼다. 지금도 막히는 기분이 들고 답답해질 때면 노랗고 하얀 머리칼을 만들며 이때의 그 기분을 기억한다.

대구예술발전소는 내게는 맨발로 설 수 있는 공간을 떠올린다. 맨 발이 부끄럽지 않은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곳. 작가들에게 가장 필요한 에너지가 응축된 신비로운 공간에서 나는 살아 숨 쉬는 공간 자체를 느끼고 예술 안에 살 수 있었다.

2018년 개인전, 성북단체전, 그리고 아티스트페어
짜부러지듯 답답한 겨울을 지나고 2월의 개인전과 3월 성북 단체전으로 정신줄을 놓고 지내는 와중에도 대구를 들락날락댔다. 그 사이 대구예술발전소 옆에는 수창맨션과 자갈마당이 어느덧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아직 새로운 작가들이 들어오지 않은 예술발전소는 여전히 집같은 편안함으로 작가들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예술발전소에서의 2월 개인전에선 작은 드로잉과 함께 작년 땀 흘려 제작한 큰 캔버스 화면으로 실험한 작업들의 일부를 선보였다. 큰 2층의 전시장을 분리해 완전히 나누어진 곳에서 같은 기수의 다른 작가들과 같은 시기 전시를 했으므로 그들이 그간 어떻게 작품을 발전시켜왔는가를 볼 수 있어 좋았다. 더불어 한정된 전시 공간이 아닌 곳으로 작품들이 뻗어가 보여 진다면 하고 갈증을 느낀 것도 이때였던 것 같다.

대구예술발전소 아티스트페어 쇼케이스 전시전경
대구예술발전소 교류전 성북예술가압장 2층 복도 유리페인팅
이어진 3월 서울 성북에서 나는 작년의 유리드로잉을 기억하고 계속 관심을 가지고 발전시키던 알레고리와 관련된 새로운 이미지의 드로잉을 시도했다. 아침이면 쉐어하우스가 있던 부천에서 지옥-같지만 사람들은 천사 같은 지하-철을 타고 성북으로 건너가 키를 받아 가압장의 문을 열고, 차가운 아침 공기를 뚫고 청명한 기분에 마음이 끄는 대로 드로잉을 이어갔다. 먼지 낀 유리창에 흰 선이 매끈하게 지나갈 때면 작업으로 내 손을 이끄는 힘이 무엇이었는지가 생생해진다. 명료한 정신과 기분 좋은 피로감이 몰려올 때면 나는 벌써 새로운 이미지와 조우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티스트페어. 해치워야할 일들을 하나씩 끝내가는 가운데, 대구에서 작년부터 이어오던 작당들 중 전시로 발전된 형태를 가져온 궁극체, 대구 작당의 중심이었던 이벤트가 있다.

우리 만남의 중심에는 대구예술발전소가 있었다. 작년 대구 면접 때 만난 동문 정진경 작가에게서 같은 동문인 김소희 판화전문 작가를 소개받았고, 이후 우리는 예술발전소 소장님을 통해 대구에서 이미 활발한 활동을 벌여온 정민제 작가를 만났다. 작가들이라 그런지 금새 누가 뭐랄 것 없이 이야기가 통했고 초등학교에 들어가 친구를 사귀듯 쉽게 친해졌다.

우리는 작품이면서 상품이며, 좀 더 대중에 쉽고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파생 작품들과 이를 보여줄 전시를 고민했다. 작가들이 모여 놀다보니 콜라보레이션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 이미지는 전시 포스터로 이어 활용되어 우리 전시의 주요 상품이 되기도 했다. 과감히 이름을 내던진 우리의 <아티스트페어>는 전시와 함께 좀 더 대중에 미술이 쉽고 즐거운 경험이 되도록 정진경, 김소희 작가주도의 실크스크린과 정민제 작가 주도의 패브릭리스 만들기 워크샵이 진행되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들을 다들 즐겁게 잘도 만들어 벌였다.

그리고 사실 이 일을 제대로 벌이기 전에 우리는 몇 가지 실험들을 예술발전소에서 작당해 실험해보았다. 3월 15일 <욜로, 오 작가여!> 전시 오픈에 맞춰 우리는 하루치기 쇼케이스 전시를 2층 로비와 2층으로 연결된 1층-3층 계단에서 선보였고, 작품이 된 상품과 상품이 된 작품들을 판매했다. 당시 모여든 에너지 덕분일지, 사람들의 관심과 새로운 시도에 대한 우리의 열의는 판매 성과와 별개로 당일치기 전시를 마치면서 거둬들인 일부 현수막과 작품들을 4층의 빈 공간에 채워 넣게 하였고, 자연스러운 실제 전시 구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2018년 2월 전시전 공간 구성 중
예술발전소의 빈 공간들에 하나씩 작품을 입히고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와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라났고, 예술발전소에서는 우리의 적극적인 작당 에 호의를 가지고 많은 협력을 해주었다. 말 그대로 즐거운 놀이가 된 전시 기획과 구성과 설치. 모든 과정에 우리 작가들은 어릴 때처럼 의견이 달라 서로 투닥거리다가도 금새 어른으로 돌아서 각자의 의견을 듣고 존중하면서 서로의 의기를 돋웠다.

관심과 열기에 전시는 연장전에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들어오고, 전시는 이어졌다. 조금씩 전시 작품과 상품을 변경하고, 유리 쇼케이스에는 작가의 새로운 작품과 굿즈들을 넣어 1층과 4층 공간에 전시했다. 복도 벽의 공간과 3층의 빈 공간들에도 작품들이 바뀌고, 현수막 들이 걸렸다. 정진경 작가는 최근까지 우리의 작품이 걸린 Studio 4번 방에서 작가의 생생한 작품 창작과정을 노출한 라이브 드로잉을 펼쳤다. 그리고 드디어 2주 전 로비의 일부를 제외한 작품이 철수 되었다. 그렇게 다시 맞는 새 여름이 왔다.

지금

정글을 뚫고 지나가는 시간 같다. 정신 못 차리게 더운 가운데 습한 기운에 피부는 따갑고 위로는 끝을 모르는 나뭇잎이 하늘을 막아 지금이 어디쯤인지 모르겠다. 정신없이 윙윙대는 모기와 벌레들이 눈과 귀를 괴롭힌다. 당장의 눈앞을 막는 잎사귀 덩굴들을 잘라내 가면서 어디 있을지 모를 뱀이나 큰 동물들을 피해서 조마조마 길을 뚫고 나가는데 이것이 길인지 아닌지도 나를 어디로 이끄는지도 확신하지 못한 채로, 피부에 베어 와 닿는 잎들을 거칠게 때로는 요령껏 거둬내며 한걸음 한 걸음 걷는다. 나는 어쩌면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는 시간을 내딛는다.

실제로 대학을 다시 다니는 꿈을 꾸었다. 자주 꾸는 꿈이지만 늘 각자의 작품은 언제나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빛나 언니와 송이언니, 남희와 동선이 오빠가 같이 다 작업에 열중해서 다닥다닥 작업실을 공유하며 펼쳐내는 큰 작품들을 보면서 매번 매력을 느낀다. 내 손, 내 작업에 대한 아쉬움보다 내가 펼칠 작품을 마음에 그리면서 꿈인 줄 모르고 다시 가슴이 뛰고 두근거린다.

아티스트페어 4층 공간에 설치된 최지이 작가의 작품을 활용한 아트텐트와 정민제 작가의 어쩌다 엄마 프로제트 작품

그 예전 좁은 작업실을 공유하며 같이 몸을 부딪치고 생각과 시선을 공유하며 꿈을 키워나가던 시절의 그 옆자리 친구들은 당시엔 몰랐던 배고픈 현실을 잊게 만드는 힘이었던 듯하다. 이미 한참 전에 대학을 졸업하고서 각자의 삶의 길로 뿔뿔이 흩어져 나가, 안부의 소식조차 드문드문하고, 지방으로 내려와 작업을 이어간다며 작업실을 꾸려나가면서도 가장 큰 갈증 중 하나는 작업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나갈 내 옆의 친구들, 그리고 함께 나누던 에너지 같다.

레지던시의 매력은 그런 것일까, 시작하면서 꿨던 그 꿈은 짧지만 찬란했던 2017년의 여름을 만들며 이후로 대구에서의 당연한 지지기반으로서의 왕래 기회를 마련해주었고 현재의 나를 성장시키고 있다. 나의 부족한 마음 솔직한 기록들은 매일 나보다 너그럽고 나보다 여유를 가진 세상에서 조금씩 부드럽게 나이를 먹는다. 새로 맞는 여름들에 찬란히 익어간다.